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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반란군은 없다 (68/171)

68. 반란군은 없다2021.12.25.

노에비안의 집무실은 아카시아 백작의 집무실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삭막하고 황량한 분위기.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넓고, 우중충한 그림이나마 장식용으로 몇 점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2년 동안 이 저택에서 살았지만, 나는 그가 처음 이 저택을 구경시켜준 이후로 이 집무실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저택은 무척 넓었고, 결혼 초반의 내 체력으로는 내 집무실과 침실을 오가며 대공비의 업무를 숙지하는 데 바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저택에 머무는 날이 많이 없으니 굳이 이 집무실로 와볼 필요도 없었고. 잠시 옛 기억을 더듬던 나는 집무실 문을 잠그고 온갖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평소 깔끔떠는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수선함이었다. 혹시 잘못 건드렸다가 내가 왔다 간 흔적이라도 생길까 봐 눈으로만 살폈다. 중요한 서류였다면 아침마다 집사가 직접 청소하러 들어오는 이 공간에 아무렇게나 두지 않았을 것 같았다. 책상 서랍은 대부분 잠겨 있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서랍에 맞는 열쇠를 찾아 하나하나 다 열어 보았다. 온갖 종류의 외국어로 쓰여 있는 서류는 물론, 그가 공적을 쌓으며 얻은 자잘한 작위들과 영지 일에 관련된 서류뿐이었다. 꺼내 본 서류를 정리해 다시 넣고, 서랍을 다시 잠그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나는 중간중간 일어나 바깥을 살폈다. 아직 로아드네스의 기사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저 정도의 인원이 저택 앞에서 버티고 있다면, 노에비안이 설사 후문으로 들어오려 하다가도 저쪽으로 가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두근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나는 책상 아래 금고를 열었다. 아카시아 백작처럼 금괴라도 들어 있을 줄 알았던 곳에는 서류 봉투들만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다 같은 모양과 재질, 색깔의 서류 봉투 중 가장 위에 놓인 서류를 꺼내자 ‘서부’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다음 것도. 그다음 것도. 또 그다음 것도 전부 ‘서부’ 라고만 적혀 있어 아주 수상해 보였다. 카스타냐 공작의 영역. 로아드네스가 몇 년을 굴렀던 전장. 내가 알고 있는 서부의 이미지는 그런 것뿐이었기에 이렇게 작은 금고 하나를 꽉 채울 만큼 서류 봉투가 들어 있는 것은 몹시 기이했다. 모든 봉투가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넣어놓은 듯한 봉투는 밀랍 처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내 보았다.

16558463239064.png“……!”

두께에 비해 간결한 문장들이 내 두 눈에 가득 박혀 들어왔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서부에 다시 반란군을 보내라.] 긴장으로 젖어 든 손이 잠시 서류를 놓칠 뻔했다. 나는 그것을 구기지 않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떤 지역에서 서부로 군사를 이동시키라는 내용의 문서는 누가 봐도 이 서류를 작성한 사람이 ‘일부러’ 반란군을 보내는 것이라고 밖엔 볼 수 없었다. 손이 아닌 몸이 떨렸다. 동시에 누군가 내 생각을 전부 빼앗아 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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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3239064.png“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내용은 인지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밀랍 처리가 되어 있는 금고 속 서류 봉투들을 처참한 심정으로 응시하다가 가장 안쪽에 있는 봉투를 꺼냈다. 가장 오래된 서류일 게 분명한 봉투는 밀랍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뜯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처럼 완벽한 타이밍이 또 찾아올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안의 내용을 읽어내리는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내 뇌를 잡아 주무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도대체…….

16558463239064.png“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적혀 있었다. [서부에 마나석을 심어 마물을 불러내라.] [반란군을 서부에 집중해라.] 공문서용 타자기로 적힌 반듯한 글씨들이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어지럽혔다. 마물. 반란군.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것들을 서부로 보내라는 내용. 그리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가장 마지막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로아드네스 2황자의 발을 묶어 수도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해라.] 꾸역꾸역 참았지만 결국 그 낡은 서류를 한번 구기고야 말았다. 갓 성인이 된 로아드네스가 수도에 발도 못 붙이게 했던 그 마물과 반란군들. 그를 전장귀로 만든 론타의 위험한 것들이 피치 못한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가, 아니 노에비안이 ‘일부러’ 보냈다는 말이었다. 그의 집무실, 그의 금고에 감춰져 있던 진실이니 당연히 그의 것이지 않겠는가.

16558463239064.png“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 흔한 초상화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집무실에서, 나는 노에비안이 앞에 있는 것처럼 짓씹어 뱉었다.

16558463239064.png“나를 원한 거였다면, 그냥 나 하나로 만족했으면 좋았잖아.”

왜 이런 소모적인 방법으로 국력을 소모하냐는 애국적인 생각은 단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다만 지나간 로아드네스의 시간들이 너무 안타까워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16558463239064.png“로아드네스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렇게 싫었어? 로아드네스가 내게 다가오는 게?”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울부짖던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던 마음과는 별개로 참 가엾다고 느껴지던 그 목소리가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뱃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16558463239064.png“네 것이 없으면 남의 것을 빼앗아도 되는 거야?”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나와 결혼식을 치르고, 바보같이 내가 당신에게 마음을 주는 동안 당신에게 속아 전장을 전전해야 했던 로아드네스에 대한 시간은 도대체 누가 보상하지? 손에 쥐고 있던 서류에 다시 힘을 주는데, 갑자기 뒷장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누군가 덧붙여 놓은 쪽지였다. [반란군이 어디 있습니까?] 라는 물음의 쪽지. 그 쪽지 아래 휘갈겨 쓴 다른 쪽지 하나가 답처럼 덧붙여져 있었다. [반란군은 없다.] [만들어서 보낼 뿐.] 나는 한참을 웃었다. 내게는 더 이상 나올 눈물 같은 게 없었다. 가슴이 터질 듯한 울부짖음 대신 실없는 웃음소리가 넓은 집무실 바닥에 낮게 깔렸다. 그동안 로아드네스를 전장으로 보냈던 명분인 ‘서부의 반란군’이 노에비안이 꾸민 짓이라니. 나는 반란군 때문에 늘 소란스러운 서부의 소식을 전하던 신문 기사를 기억했다. 2황자 로아드네스가 반란군을 토벌하러 갔으나, 항상 원인 모를 마물들에게 가로막혀 반란군보다 마물사냥을 더 많이 했다든가. 그 마물들이 잊을만하면 출몰해 서부의 마을들을 짓밟아서 온갖 종류의 마물들을 베어내느라 차출된 병사들은 팔이 너덜거릴 만큼 목을 벤다고 했다. 나는 로아드네스의 상처 많은 몸을 기억했다. 언뜻 벌어진 셔츠 사이로 희미한 흉터들이 가득했었다. 갓 성인이 된 어린 황자가 전장을 구르며 얻은 흔적들이었다. 충격으로 새하얘졌던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선명히 느껴지는 분노였다. 나는 누가 잡아 이끌기라도 한 듯 노에비안의 집무실 책상에 힘주어 앉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크게 울렸다. 밀랍으로 봉한 서류를 뜯어버리고 말았으니, 노에비안이 이 금고를 열어 뒤져 보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안에 있던 것이었다지만 운이 나쁘면 알아채고 말 것이다. 더 큰 진실에 손을 뻗은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과 뜨거운 머릿속과는 달리, 나는 누가 보면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계속 실없이 웃고 있었다. 블리에가 말하던 진실이 이것이었을까? 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제 어찌해야 되는지도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품에 넣어둔 도리스의 편지를 꺼내 내려다보았다. 반복해서 그것을 읽어내리던 나는, 곧 노에비안의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편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트로비카 가문의 문양이 선명히 박힌 고급 편지지였다. 편지지 그 자체로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 두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아마도 붉게 충혈되었을 눈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노에비안의 깃펜을 집어 들고 도리스에게 답장을 썼다. [비 전하에 대한 제 충성심을 의심하신다면 섭섭하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대공 전하라 할지라도 저는 제 능력을 알아주신 비 전하께서만 저를 믿어주신다면, 언제든지 그를 뒤로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빠른 속도로 썼지만, 글씨는 아주 단정했다. 내가 쓴 내용을 가슴에 새기듯 반복해서 읽어본 나는 곧 두 번째 편지지를 집어 들어 다시 이어 적어 내려갔다.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거슬리시는 게 맞지요?] 고작 손으로 쓴 한 문장뿐이지만 달리기를 한 듯 호흡이 거칠어졌다. 겨우 숨을 가다듬은 나는 앞에 놓인 망할 서류를 응시하다가 다시 깃펜을 꾹 움켜쥐었다. [제가 아주 재미있는 걸 찾았는데, 혹시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어요.] 황태자가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버릴 만한, 아니 버릴 수밖에 없는 명분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더 이상 그의 금고에 있을 수 없는 서류 봉투가 내 앞에 있었다. 황제의 책사이자 황태자파의 수장인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반란군과 마물을 서부에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 말이다. 나는 그것을 보물처럼 소중히 끌어 안았다. 그때. 갑자기 창밖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느릿하게 걸어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문에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또 다른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트로비카의 깃발이 꽂힌 거대한 마차가 시야에 잡히고, 그 안에서 노에비안이 내려 로아드네스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일단은 이 집무실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겹겹이 겹쳐 입은 드레스 자락을 들춰 서류 봉투를 단단히 끼워 숨긴 나는 책상 위의 편지지로 다가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를 사랑한다면서 갑자기 이러는 제가 이해되지 않으실까 봐 덧붙이자면, 저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답니다.] 그래, 내 머릿속이 이렇게 뜨거워지고. 이토록 가슴이 터질 것 같고.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모두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 사랑을 배신하고, 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에요.] 아드리엔의 유령이 진실을 요구해도 울부짖기만 하고, 블리에와 행복하게 살라는 말에 모든 죄가 사해진 것처럼 홀가분해 하던 그 낯짝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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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류 봉투를 제외한 모든 물건을 제자리로 둔 나는 아무렇지 않게 1층으로 내려가 노에비안을 맞았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들어오던 노에비안이 나를 보자 엄숙한 얼굴을 했다.

16558463239113.png“로아드네스 2황자가 정문에 있더군.”

16558463239064.png“네, 상관 있나요?”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그를 맞이하며 힘껏 껴안아 주었다. 스스럼없는 애정표현에 주변 사용인들이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노에비안이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16558463239064.png“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정문에서 누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죠?”

노에비안은 내게서 들을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듯 표정을 풀고는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목욕물을 준비하라 가스팔에게 명령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는 가스팔을 무시하고, 나는 내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고 침실로 올라가는 노에비안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 위로, 도리스에게 보낼 답장에 덧붙인 문장들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비 전하. 대공비 자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제 사랑을 짓밟은 그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요.] 사랑에 눈이 멀어 언감생심 대공비 자리를 꿈꾸던 블리에 아카시아. 사랑에 배신당해 눈에 뵈는 게 없는 블리에 아카시아. 도리스가 나를 그 무엇으로 생각하며 이용하든, 결과는 같으리라. 노에비안 트로비카, 당신이 가장 초라하고 비참하게 무너지는 결과 말이다.

16558463239064.png“요나, 이 편지를 시스코메틴 백작저 아이린 영애에게 직접 전해, 황태자비 전하께 전해달라 부탁하렴.”

물론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건 블리에 아카시아가 아닌 나, 아드리엔 피레타이니 도리스의 도움에 내가 보답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그녀를 이용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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