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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남편을 바꿀 생각 (69/171)

69. 남편을 바꿀 생각2021.12.29.

도리스는 내 편지를 전달받자마자 대공비 아드리엔의 조문을 오겠다며 공문을 띄우더니 황태자를 대동하고 직접 궁을 나섰다. 도리스와 함께라 줄곧 불편해 보이던 황태자는 내가 드릴 말씀이 있다 하자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별안간 내가 내민 첫 번째 서류 봉투를 열어 보더니 한없이 유순하던 두 눈망울에 충격의 빛이 어렸다. 곁에서 함께 서류를 본 도리스 역시 똑같이 충격을 받았지만, 곧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블리에 아카시아가 이만큼 잘 해낸 게 믿을 수 없어 찢어지려는 입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질수록 도리스는 웃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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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태자의 흠결 없는 하얀 손이 내가 내민 두 번째 서류 봉투로 향했다. 그것을 꺼내 하나하나 읽어갈수록, 가까스로 유지하던 그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첫 번째는 노에비안이 반란군과 마물을 서부로 일부러 보낸 사실. 두 번째는 그것을 ‘만들어’ 보냈다는 사실이 담긴 봉투였다. 숨이 멈춘 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던 황태자는 도리스가 팔을 살짝 건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소리 없는 절망에 빠진 황태자와 눈을 맞추었다.

16558463343618.jpg“생각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16558463343623.jpg“전하!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이 나라의 황족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요! 거기다 다른 곳도 아닌, 제 친정인 서부에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아시기라도 하는 날엔…….”

도리스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에 황태자의 표정은 더 아연해졌다. 가뜩이나 카스타냐 공작에게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일 테지. 나는 이미 노우라를 통해 황태자의 현 상황을 꽤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공작이 알게 되는 순간, 황태자파 내부에서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은 자명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겨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바르데날도가 빠르게 얼굴을 쓸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어떻게 좀 해보라는 도리스의 시선을 마주하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8463343627.png“비 전하. 전하께도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16558463343623.jpg“블리에!”

16558463343627.png“평귀족도 아니고, 황제 폐하의 아우이자 전하의 숙부시잖아요. 전하의 세력에 큰 영향을 끼치는 분이시니 반란군과 엮어 쳐내시는 게 쉽지 않으시겠지요.”

바르데날도는 내 다정한 목소리에 조금 위로가 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식어 빠진 차를 들이켰다. 그럼에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지 고개를 몇 번이고 흔들었다. 도리스가 미간을 살짝 구기다가 황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따라 일어났다. 황태자가 또 노에비안을 편들기라도 하면 영혼까지 털어버릴 기세였다.

16558463343618.jpg“비께서는 대공비의 조문을 마저 하고, 천천히 환궁하세요.”

16558463343623.jpg“전하. 이걸 보시고도 대공과 상의하러 가시는 건 아니겠지요?”

16558463343618.jpg“도리스.”

황태자가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 목소리가 매우 잠겨 있었기에 도리스가 움찔했다.

16558463343618.jpg“이 제국을 큰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내가 황태자로 있는 한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입니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황태자는 깊은 한숨과 함께 천장을 바라보다가 돌연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16558463343618.jpg“……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의도야 어쨌든 평생 모르는 채로 살 수 있었던 진실을 밝혀준 부분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황태자는 퍽 진심인 양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저 이 일을 묻어두고 대공비로서 호의호식 하며 살아가는 게 내겐 최고의 시나리오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는 이례적으로 나를 향해 고개까지 살짝 숙이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별관을 벗어났다. 가스팔이 문밖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따랐다. 잠깐 서서 그 모습을 응시하던 도리스가 산뜻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주 개운한 표정이었다. 눈엣가시이던 노에비안은 물론이고, 황태자마저 큰 약점을 잡힌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미 제 손아귀에 천하가 있다는 듯 방글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6558463343623.jpg“아아-. 블리에. 난 그대가 이렇게까지 일을 잘 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얼마나 통쾌한지. 아마 블리에도 곧 대공의 추락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낄 거예요. 어때요? 여자들끼리 건배하는 건?”

도리스가 테이블 위에 화병과 함께 장식처럼 놓여 있던 샴페인 병을 땄다. 황궁에서 함께 나온 하녀가 기겁을 하며 자신에게 병을 달라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저지하고는 잔에 그것을 따랐다. 장식용이나 다름없는 그 샴페인은 미지근하니 별맛도 없을 테지만 도리스는 그것을 아주 달게 마시더니 한잔 더 따라서 내게 주었다. 반강제로 건배를 하고 샴페인을 마셨다. 역시 미지근하니 맛이 없었다.

16558463343627.png“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 모르겠군요. 이런 걸 보여드리면 당장이라도 대공을 불러 다그치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16558463343623.jpg“후후-. 블리에. 그대는 아직 황태자 전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도리스가 사납게 웃더니 제 손으로 잔을 더 채우고 술을 들이켰다.

16558463343623.jpg“모든 걸 다 가질 배포도 없으시면서 정은 쓸데없이 많은 남편이라니, 얼마나 피곤한가요? 이런 일을 보았는데도 그냥 넘긴다면 이번에는 내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그녀는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서부에 일부러 반란군을 만들어 보낸 남편의 책사를 알게 되고도 저런 반응이 고작이란 말인가? 도리스라면 조금 더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16558463343623.jpg“아, 이건 블리에에게만 알려주는 건데요.”

그녀는 다른 시녀들에게는 비밀이라며 내게 몸을 더 가까이했다. 그래봤자 테이블을 사이에 둔 터라 바짝 다가올 수 없을 텐데 말이다.

16558463343623.jpg“그가 이대로 대공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남편을 바꿀 생각이에요.”

16558463343627.png“!”

나는 샴페인 잔을 겨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응시했다. 도리스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보다 지금부터 할 말인 거 같았다.

16558463343623.jpg“예를 들면, 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는 어떨까요?”

나는 탄식이 나오기 전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지금 도리스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16558463343623.jpg“그까짓 눈동자 색으로 차별받기에 로아드네스 님은 쌓은 공적이 너무 많지요. 특히 내 고향 서부에서요. 대공이 욕심을 부려 그분께 날개를 달아준 셈 아닌가요? 더군다나 그분은 돌아가신 레티나 황후 폐하의 적통이기도 하고요. 아버지께서는 로아드네스 님보다는 엘라콘에 있는 9황자를 염두에 두신 것 같기도 하지만 글쎄요. 그런 풋내나는 어린 황자보다는 좀 더 사내다운…….”

16558463343627.png“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비 전하?”

아까까지 희번덕이던 도리스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지자,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다행히 도리스는 그런 내 행동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내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정확히 살핀 듯했다. 나를 꿰뚫을 듯 응시하던 도리스는 미친 여자처럼 샐쭉 웃었다.

16558463343623.jpg“농담이에요. 다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모든 건 황태자 전하께서 대공을 버리느냐 안 버리느냐에 달려 있고요. 대공을 버리고 더 높이 올라갈지, 대공과 함께 침몰하는 배에 빠져 죽을지 판단은 전하의 몫이죠. 그 정도 사리 판단도 못 하는 남편과 카스타냐의 딸이 함께할 리 없잖아요?”

가볍게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도리스가 가뿐하게 일어났다. 나는 따라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녀의 시중으로 모피를 걸쳐 입은 도리스는 술기운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고 있었다.

16558463343623.jpg“아,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조문객으로 온 거였네요? 조문객이 축하의 샴폐인을 터트리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요. 블리에가 방명록에 대신 이렇게 좀 써줘요.”

나는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16558463343623.jpg“꼴 좋구나, 아드리엔 트로비카.”

도리스는 마치 아드리엔이 살아 있기라도 하듯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16558463343623.jpg“죽어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배웅은 됐다는 도리스가 떠나고도 나는 한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밖에 서 있던 마리와 요나가 내 근처에 와 서성일 때까지 나는 도리스가 했던 말들을 수없이 곱씹었다. 죽은 아드리엔에 대한 적개심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도리스를 본 건 어찌 보면 내가 얻은 수확이었다. 퍽 괜찮은 황태자비 노릇을 하던 그녀의 민낯을 내게 보여준다는 건 그만큼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거니까. 하지만……. 황태자가 자신의 숙부를 차마 버리지 못한다면 남편을 바꾸면 된다고?

16558463343627.png‘로아드네스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손이 떨렸다. 우울한 표정으로 도리스의 곁에 서 있을 로아드네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가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도리스와 카스타냐 공작이 마음먹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아드네스가 이 더러운 구정물에 엮이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16558463343627.png‘모든 건 황태자의 결정에 달렸다고?’

서부의 세력이 필요한 황태자. 하지만 정 때문에 숙부를 놓지 못하는 황태자. 이 정도 압박으로도 안 된다면…….

16558463343627.png“요나, 당장 애니를 대공비의 집무실로 불러와.”

16558463404631.jpg“집무실이요?”

16558463343627.png“죽은 대공비의 집무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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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니는 요즘 죽을 맛이었다. 늘 제 세상처럼 활보하고 다니던 대공저에서 쥐죽은듯이 지내는 게 이렇게 숨 막힐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장 힘든 세탁방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망할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6558463404631.jpg‘큰일에 쓰고 싶다고 해놓고서는.’

벽장에 오래 갇혀 있었던 기억으로 백작 부인은 몹시 두렵긴 했지만, 큰일에 자신을 쓰겠다고 말하던 사람이 입을 싹 닫고 본 척도 안 하고 있으니 애가 닳기는 했다. 기막힌 양가감정이었다. 무서워 곁에 가기는 싫은데, 큰일에 쓴다 해놓고 모른 척하니 조바심이 나는 것을 보면.

16558463404631.jpg‘이대로 정말 그 여자가 대공비가 되는 걸까.’

그 유명한 2황자에, 대공에, 이제는 황태자와 황태자비까지. 조문을 핑계로 그 여자와 직접 만나는 것을 보니 그 여자의 자신감이 영 허영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저기 헤집고 다닐 수 없으니 카스타냐 공작에게 보고를 하지 못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애니는 곧 품 안 깊숙이 감춘 대공비의 인장을 옷 위로 눌러보았다. 빈 종이에 이 인장을 찍어누르며 얼마나 무수한 상상을 했던가. 카스타냐 공작의 수족이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가 대공이 술에 취한 틈을 타 동침을 할 수만 있다면 이 인장이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망상을 했다. 블리에 아카시아의 출신도 좋지 못한 것을 뻔히 아는데, 하물며 몰락했지만, 한때는 귀족 출신이던 자신이 못 될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까. 신경질적으로 닦는 척하던 걸레를 집어 던지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16558463404631.jpg“애니. 부인께서 부르셔.”

그 여자의 어린 하녀였다.

16558463404631.jpg“너, 말이 짧다?”

16558463404631.jpg“길 이유라도 있니?”

요나는 꽤 배짱 있는 아이였다. 귀여운 얼굴에 속아 얕봤던 자신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조막만 한 하녀의 머리통을 쏘아보며 따라가는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죽은 대공비의 집무실 앞에 선 것이었다.

16558463404631.jpg“여기는 왜……?”

16558463404631.jpg“들어가 봐.”

요나는 너무나도 쉽게 문을 열어주며 그녀에게 눈짓했다. 늘 잠겨 있던 이곳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열리다니, 게다가.

16558463343627.png“왔구나, 애니.”

계속 생각하던 그 여자가 놀랄 만큼 반듯한 자세로 그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집사와 집무실에 대해 의논한다더니 설마 죽은 대공비의 집무실을 차지하기라도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블리에가 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친 애니는 등 뒤에 닿는 차가운 문의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숨을 멈추었다.

16558463343627.png“언제까지 대공비의 인장을 네가 들고 있을 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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