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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친애하는 피레타 소공작 부인께 (70/171)

70. 친애하는 피레타 소공작 부인께2022.01.01.

얼어붙은 애니와의 신경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한 번의 공포를 학습한 애니는 한마디도 못 한 채 뻐끔댔고, 내 시선이 자신을 진득하니 훑자 견디지 못하고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16558463516474.png“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어, 애니. 네 예전의 과오는 모두 덮어주고 앞으로 내 사람으로서 움직이면 얻게 될 것들을 말해주기도 바빠.”

16558463516538.jpg“덮어, 덮어 주신다고요?”

기름칠을 미처 못 한 나무문처럼 삐걱대는 목소리였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는 차게 내려다보는 내 눈을 흘끔 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내 눈이 지금 어떤지 안다. 너무나도 쉽게 로아드네스를 이 개싸움에 끌어들이려는 도리스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웅웅거리고 있는데 내 눈빛이 정상적일 리 없었다.

16558463516538.jpg“저는, 저는…….”

16558463516474.png“변명하지 말고, 그저 주면 된단다. 아니면 이대로 또 전서국으로 달려가 카스타냐로 편지를 보내렴.”

거칠게 숨을 들이쉬던 흉곽이 움직임을 멈추고, 애니가 제 앞치마 자락을 쥐어뜯었다. 그럼에도 한 손은 계속 제 가슴을 누르고 있기에 나는 그곳에 손을 뻗었다.

16558463516474.png“여기 있니?”

내 손아래 그녀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안하무인이긴 해도 능숙하게 거짓말하는 데는 서툰 듯했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퍽 곱게 자랐을 귀족 아가씨였을 테니 바닥에서 기어본 경험은 없으리라.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한참 멈추어 있던 애니가 큰 결심을 한 듯 품 안에 손을 넣더니 곧이어 나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16558463516538.jpg“제가 부인의 사람이 되면…… 부인을 위해 일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16558463516474.png“원하는 게 있니?”

애니는 한참 망설였다. 탁한 보랏빛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다 멈추었을 무렵, 그녀가 품에서 인장을 꺼내며 답했다.

16558463516538.jpg“대공 전하의 정부로라도,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정부가 아니라면 그저 전담 시녀로라도 좋아요.”

16558463516474.png“…….”

나는 대답 없이 애니를 응시했다. 얻어맞을 각오라도 한 듯 눈을 꼭 감은 모양새는 퍽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차게 식은 손을 그녀의 뺨에 갖다 댔다. 크게 움찔하던 애니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16558463516538.jpg“언감생심…… 대공비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가질 수도 없고요. 그저, 그저 곁에 있을 수만 있게 해주세요. 그분을 모실 수 있게…… 이 인장을 드리면, 저는 이제 서부와의 연이 끊기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제발…….”

나는 때리기는커녕, 그녀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16558463516474.png“얼마든지.”

나는 귀엽다는 듯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고는 힘이 풀린 그녀의 손에서 인장을 받았다. 몇 번 찍어본 적도 없는 인장은 본래 내 것이었지만 낯설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려는데, 애니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미약한 힘이었다.

16558463516538.jpg“정말, 정말 대공 전하를…….”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16558463516474.png“그래, 네가 가지렴. 대공비 자리만 가질 수 있다면 나는 그분께서 누구와 만나든 상관없으니까.”

나락으로 떨어질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안고 너도 같이 떨어지는 거야. 내 속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애니는 진심으로 감격한 낯짝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서 본 가장 공손한 모습일지도 몰랐다. 고작 그 하찮은 자리를 위해 카스타냐 공작을 등에 업고 날 괴롭혔다니 조소도 나오지 않았다. 애니가 나가고, 적막해진 집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와 노에비안에게 자랑스러운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늘 쓸고 닦아 말끔하던 대공비의 침실과는 달리, 이곳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마 내가 아드리엔으로 살아 있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이 집무실에 나와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아플 때부터 줄곧 이 상태였을 것이다. 검지로 먼지를 닦아 생각 없이 후 불어본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애니가 불려오기 전부터 계속 생각하던 것을 마저 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고급 편지지. 노에비안의 집무실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지만 연한 미색을 띠는 색은 대공과 대공비의 업무를 분리해놓는 장치였다. 도리스가 노에비안의 편지지를 알아보고 내가 허튼소리를 한 게 아닌 걸 알아채 한달음에 내게 달려왔듯, 이 편지지를 알아보고 한달음에 달려올 사람은 뻔했다. ‘비앙카 피레타.’ 하나뿐인 내 오빠, 그레고리 피레타의 아내이자 내게는 친자매나 다름없던 새언니.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여자를 대공저로 들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오빠인 그레고리보다 분노할 내 가족. [친애하는 피레타 소공작 부인께.] 첫 문장을 적었을 뿐인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장례 첫날, 그레고리와 함께 오열하던 비앙카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모든 걸 해결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트로비카 대공께서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차기 대공비를 내정한 사실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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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공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수도경비대의 천막 앞. 나는 가스팔에게는 당장 천막을 철거하라고 말하고 오겠다며 이곳으로 왔다. 실상은 이곳의 전서구를 빌리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대공저에서는 전서구나 전서국을 통해 오는 모든 서신을 검열받아야 했다. 노에비안이 날 대공저로 가둬둔 것 자체가 황태자비나 카스타냐 공작과의 연줄을 없애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곳은 닐이나 빈센토가 지키고 있었기에 나는 가끔 이곳에 항의를 한다는 명목으로 나와 이렇게 몰래 전서구를 빌릴 수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떠난 전서구가 날아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공비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드디어 내 고향인 동부 피레타로 날아갔다. 이 서신을 받고 절망할 가족들을 알면서도 내 손으로 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 하는 현실이 차갑게 와닿았다. 되도록 그들을 마주치지 않는 게 제일 좋겠지만 힘들겠지. 그때만이라도 잠시 도망가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노에비안의 정부이자 아드리엔과 똑같이 생긴 차기 대공비로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기라도 하면 그들이나 나, 둘 중 하나는 분명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겨울바람에 서서히 얼어가는 게 느껴졌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돌아가려는데, 언제 왔는지 로아드네스가 그 꼴을 다 보고 있었다.

16558463516474.png“로…… 황자 전하.”

16558463546179.png“왜 울어.”

인사는 받아주지도 않고. 로아드네스는 내 우는 모습에 깜짝 놀란 닐을 멀리 보내버리고 황급히 작은 천막 안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는 내 양어깨를 가볍게 잡고 내 몸의 상처를 찾듯 샅샅이 훑어보았다.

16558463516474.png“할 말이 있어요, 전하.”

사나운 기색을 띠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겠지. 그의 두 손에서 힘이 풀리자 이번에는 내가 그의 두 팔을 꼭 잡았다. 전장처럼 갑옷을 갖춰 입은 로아드네스의 팔은 내 작은 손으로 감싸기엔 너무 두꺼워 거의 손을 대고만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손 아래 철제 갑옷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를 달라 황제에게 청하겠다며 맡고 싶지도 않았던 사건을 떠맡아 구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추운 날 얼마나 오래 바깥을 돌아다녔을까. 지난 2년간 이름만 들어도 살이 떨리는 반란군과 마물을 맞이하며 그는 무엇으로 그 전장을 견뎌왔을까. 첫사랑과 숙부에게 뒤통수를 맞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차가운 팔을 지나, 상처 많은 큰 손을 잡자, 로아드네스가 움찔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탓이었다.

16558463546179.png“……포기하겠다고 하지 마.”

16558463516474.png“전하……?”

16558463546179.png“그렇게 불쌍한 사람 보듯이 보고. 날 떠날 것처럼, 그렇게 보지 마.”

널따랗고 차가운 품에 빨려 들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너무 차가워 깜짝 놀라 떨어지려는 걸, 로아드네스가 꽉 붙들어 안았다.

16558463546179.png“너 힘든 거 아니까. 네가 원하는 그 친구 해주겠다잖아. 일이 끝날 때건 언제건 내가 기다리겠다잖아. 그런데 왜 울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일견 사나웠지만, 몹시 낮고 애처로웠다.

16558463516474.png“그게 아니에요, 전하. 전하가 꼭 알아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겨우 품에서 벗어나 주위를 살폈다. 천막 입구를 지키는 이도, 주변에 그림자도 없었다.

16558463516474.png“아무 데도 안 떠나요.”

16558463546179.png“도망가고 싶은 얼굴 했잖아.”

16558463516474.png“제가요?”

16558463546179.png“했어. 힘들어서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는 얼굴.”

나는 잠깐 아연해져서 불안해 보이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망가고 싶어 하던 내 마음을 정확히 읽어놓고 그게 자신에게서라고 생각하는 얼굴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16558463516474.png“도망 안 가요.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전하가 행복해지기 전에는.”

16558463546179.png“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보이는 데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당연하게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버린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는 악역. 그 악역을 맡고 싶지 않아 고민했던 며칠이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급히 오느라 흐트러진 로아드네스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움찔하던 로아드네스는 키를 낮춰 내 쪽으로 몸을 굽혀주었다. 쓰다듬는 게 아니라, 머리를 정리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는 내게 쓰다듬을 받는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코완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처럼, 잠시간 벌렁거렸던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진실을 알아도 로아드네스라면 나처럼 비통하게 절망하거나 도망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것 같은 키 때문일까. 나를 향해 잔뜩 구부러진 상체가 남들보다 월등히 두터워 보여서일까. 아니면 나만 제 눈앞에 보인다면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절대 명제처럼 말하는 무모함 때문일까. 복잡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다 정리해준 나는 그가 허전함을 느끼고 반짝, 눈을 떴을 때 무거운 추를 매단 것 같은 입을 열었다.

16558463516474.png“전하가 근 2년간 굴렀던 전장 속 마물과 반란군들…… 본래 서부에서 생긴 게 아니래요.”

16558463546179.png“…….”

16558463516474.png“모두, 노에비안이 전하를 붙들어 놓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들이래요. 로아드네스 2황자를 수도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라. 그리 명한 증거를 찾았어요. 그리고 그건 아마도…….”

16558463546179.png“너 때문이 아니야.”

16558463516474.png“황태자 전하의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전하를, 굳이 사지로 몰아넣었어요. 그게 어떻게 저 때문이 아니에요? 심지어 황태자 전하께서도 모르셨던 일이에요.”

16558463546179.png“너 때문이 아니야.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 개…… 때문이지. 달라지는 건 없어.”

16558463516474.png“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요. 전하의 소중한 시간이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덤덤하기 그지없는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괴로움도 비치지 않아 오히려 내가 초조했다. 화를 내고 억울하다 소리치면 위로라도 해줄 텐데 오히려 나 때문이 아니라고 위로해주는 얼굴을 보자 내가 답답해졌다.

16558463546179.png“그깟 마물 수천 마리 죽인 걸로 징징거리기에는…….”

그의 뜨거운 손이 분노를 삭이는 내 차가운 손을 끌어당겼다.

16558463546179.png“아드리엔 피레타가 나 아닌 다른 사내와 혼인한 현실이 내게는 더 지옥이었으니까.”

16558463516474.png“……!”

16558463546179.png“그러니까 네가 곁에 없었던 시간 몇 년쯤, 내 인생에서 없다 해서 문제 될 것 없어.”

전혀 나를 탓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너무 당연하다는 그 말투,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해 나는 뻔뻔하게 죄책감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언젠가 나를 질식시킬 것 같던 그의 거대한 마음이 복잡하게 끓어 넘치던 머리를 되려 차게 식혀주었다.

16558463516474.png“……저도.”

나는 강하게 쥐어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16558463516474.png“저도, 이 정도 상황에 도망가겠다 징징거리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고통이 당연하다 말하는 로아드네스에게 나는 확신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58463516474.png“동부에 서신을 보낸 참이에요.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제 부인의 장례식도 끝내기 전에 다른 여자를 집안에 들였다고요.”

제 아픔에는 무감하던 로아드네스가 고작 그 한마디에 자신이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그제야 내 눈물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거둬갔다.

16558463516474.png“도망가지 않으려고요.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 생각했으니 저를 향한 비난까지 모조리 노에비안의 것이 되도록 해보려고요. 노에비안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전하가 아무도 없는 전장에서 외로웠던 것만큼. 내가 대공저에서 홀로 괴로웠던 것만큼.”

진실을 알아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로아드네스의 말이 맞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굳이 노에비안이 얼마나 더 개새끼인지 곱씹을 필요가 있나? 두려웠던 건 사랑하는 가족들이 상처받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미 지쳐 있는 나를 상처입히는 것이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16558463546179.png“세상 모두가 널 욕하고 비난한다 해도, 내가 다 막아줄 테니 그저 원하는 대로 해. 그렇게 네 손으로 다 끝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아드리엔.”

내 손으로 다 끝내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가족들의 절망까지 다 끌어안은 노에비안을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이 지옥 같은 몇 달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좀 없어진다 한들 뭐가 대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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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3516474.png“아…….”

로아드네스가 어미 새처럼 나를 품어 안았다. 뜨겁고, 단단하고, 커다란 기둥 같은 품에 끌어 안겨 나는 이 바보 같은 남자의 시간을 보상해 줄 수 있다면,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속죄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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