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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지지를 모두 철회한다 (71/171)

71. 지지를 모두 철회한다2022.01.05.

아드리엔의 눈물을 보고 온 후, 로아드네스는 들끓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곁에 있겠다. 지켜주겠다. 그런 말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베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드리엔의 얼굴은 그를 한없이 절망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결혼,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홀연히 그를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붙잡은 끈인데. 어떻게 되찾은 사람인데. 적어도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 개새끼보다는 훨씬 잘해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는데. 속절없이 떨어지는 눈물, 자신을 향한 죄책감 어린 얼굴을 보자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부터 들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는 친구 사이어도 좋다는 얄팍한 거짓말이 빚어낸 감정일까? 로아드네스는 자신의 광증이 아드리엔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예전부터 알았다. 알에서 깬 새끼오리가 오직 어미만을 따르듯,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어린 날부터 자신의 눈은 오로지 아드리엔에게로만 향했으니까. ‘아드리엔, 네게만 착하면 된다.’ 했던 말은 장난이 아니다. 아드리엔 자체가 곧 그의 인성이었다. 좋은 친구 사이라는 허울로만 남는다면 그는 평생을 그 망할 광증에 휩싸여 살 것이다. 항상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상태로. 마물이든 무엇이든 끊임없이 베어내 몸을 넝마로 만들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밤들. 그녀가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듯, 그 역시 더 이상 아드리엔이 없는 상태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혼자인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이미 어린 날 잠깐의 행복을 맛봤으니 잊는 건 불가능했다. 아드리엔이 없는 세상에서 그를 움직이게 했던 유일한 이유, 형님인 바르데날도가 더 이상 노에비안에게 휘둘리는 꼴은 그 역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둘. 아드리엔과 바르데날도를 모두 지키기 위해서는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없애야 할 마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16558463713278.jpg“전하, 괜찮으십니까?”

요즘 열심히 일한다 싶던 로아드네스의 낯빛이 굳어 있자 닐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래저래 참 신경 쓰이는 황자였다. 로아드네스는 미동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쌓여 있는 조사 보고서만 노려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대공저 앞에 천막을 세워두고 사용인들을 조사하라 지시한 로아드네스는 틈만 나면 대공저의 동태를 보고받았다. 닐은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 때문일 테니까. 그 부인도 참 대단하지. 그 미모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론타에서 제일 무너뜨리기 힘든 사내들만 골라서 무너뜨리고 한자리씩 차지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개황자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 부인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은데, 가끔 보이는 그 부인의 슬픈 미소나 다정한 인사를 생각하면 제 가슴도 찌르르 한 것이 닐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오늘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둘이 만나지 않았나. 울고 있던 귀부인의 얼굴은 지나가던 행인이 보아도 감싸 안아주고 싶을 만큼 처연했다.

16558463713278.jpg‘사연이 많은 여인은 이래서 위험해.’

닐은 그리 생각하며 지난 몇 달간 열심히 조사한 보고서를 책상에 올려놓고 책상을 두드렸다. 빈센토에게 여러 번 지적받았던 행동이지만 그리하지 않으면 주군은 누가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16558463713278.jpg“전하.”

16558463713293.png“언제 왔지?”

16558463713278.jpg“한 5분은 여기 계속 이러고 서 있었는데 말입니다.”

로아드네스가 예민해진 눈으로 보고서를 훑었다.

16558463713293.png“!”

블리에 아카시아와 노에비안 트로비카에 대한 관계를 살인 사건처럼 생각하고 조사하라 닦달했던 그 보고서인 듯했다.

16558463713278.jpg“보시는 것처럼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다만 이번에 단서를 잡은 건 부인의 행적이 엘라콘 쪽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트로비카 영지와 엘라콘은 인접한 곳이니 분명히 그쪽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엘라콘에서 론타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비슷한 용모의 여인을 봤다는 증언도 있고요.”

로아드네스는 닐의 보고를 들으며, 언젠가 아드리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엘라콘 사신을 맞이할 때, 엘라콘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던 말. 블리에가 엘라콘 출신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더 커졌다.

16558463713278.jpg“그리고 그렇게 북쪽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이런 걸 또 발견했습니다.”

닐이 이번에는 대충 그려온 무언가를 내밀었다. 울창한 나무숲 속에 있는 오두막이었다.

16558463713278.jpg“이 오두막 아래로 지하감옥이 있었는데, 최근 수도에서 또 다른 실종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실종 사건의 피해자인 로터스 남작 부인이 이 감옥에 갇혀 있는 걸 발견하고 오늘 데려왔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16558463713293.png“나라 꼴이 아주 개판이군. 이 땅의 주인이 누구지?”

16558463713278.jpg“……죽은 아카시아 백작입니다.”

근처에 앉아 조용히 일을 하던 빈센토가 고개를 번쩍 들어 그들을 보았다. 잠시, 아주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로아드네스의 눈은 마물을 죽이기 직전의 빛깔처럼 날카롭고 서늘하게 빛났다.

16558463713293.png“……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짓이군.”

16558463713278.jpg“예? 갑자기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16558463713293.png“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짓이어야 한다. 알겠나?”

16558463713278.jpg“!”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나 로터스 남작 부인에게로 사라졌다. 닐과 빈센토가 동시에 함께 뛰쳐나갔다. 저런 눈을 한 황자가 사고 치는 걸 자주 봐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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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터스 남작 부인이 하는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이 ‘대공’을 연신 언급하며 그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느니 말아야 한다느니 하는 말 따위를 했다는 것이다. 남작 부인은 그들이 자신을 곧 죽을 사람 취급을 했으며, 그랬기에 제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잘도 떠들어댔다고 말했다. 빈센토 역시 불길함을 느낀 듯 닐과 그는 눈을 맞추었다.

16558463713278.jpg“어쩌면…….”

16558463713278.jpg“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이미 죽었을 수도 있겠어.”

16558463713278.jpg“그리고 그게…….”

16558463713278.jpg“트로비카 대공의 짓일 수도 있겠고.”

닐이 말을 아끼면 빈센토가 추측을 완성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로터스 남작 부인이면 몰라도,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라면 대공이 건들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 황후 그레이스 론타는 황비들 중 가장 어리고 세력이 미미하여 황태자가 직접 추천한 인물이었다. 황태자가 하는 일들에 노에비안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는 건 없었으니 당연히 그레이스의 황후 승격은 노에비안의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는 사이에서 자식까지 본 어린 황후보다 죽은 레티나 황후를 닮은 쿠로세다 남작 부인을 총애했다. 자기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현 황후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 당연히 황제의 정부가 눈엣가시일 만했고.

16558463713293.png“노에비안 트로비카라고 했잖아.”

건조한 음성이 집무실에 울려 퍼지자 그들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로터스 부인과 마지막까지 대화를 나누고 정복으로 갈아입고 온 로아드네스였다.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로아드네스는 꽤 침착하게 로터스 남작 부인을 만났다. 그게 그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긴 했지만.

16558463713278.jpg“그,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전하?”

16558463713293.png“어쩌긴.”

날카롭게 웃고 있던 로아드네스가 약간 충혈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16558463713293.png“형님께 알려야지.”

16558463713278.jpg“황제 폐하께 먼저 알리는 게 아니라요?”

16558463713293.png“폐하께 아뢰도, 형님께서 직접 나서서 말리면 도루묵일지도 몰라.”

로아드네스가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황태자파의 중심인물이 이렇게 내쳐지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바르데날도에게 노에비안은 언젠가는 치워야 할 독이다. 아드리엔을 저버리고, 제 가신까지 가차 없이 죽인 노에비안이 또 어떤 계략으로 누구를 해칠지 모르는 일 아닌가.

16558463713293.png“형님께서 선택하시도록 하는 수밖에.”

로아드네스가 옆구리에 찬 묵직한 검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낮게 읊조렸다. 바르데날도의 선택에 따라 자신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바르데날도가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버린다면, 그는 아드리엔이 원하던 대로 그녀가 노에비안을 절벽으로 최대한 빨리 떠밀 수 있도록 지켜봐 줄 것이다. 반대로 바르데날도가 끝까지 노에비안을 버리지 못한다면…….

16558463713293.png‘죽여서 사라지게 만드는 수밖에.’

기회를 포착한 로아드네스의 눈은, 누군가 전장귀라며 울부짖었을 때 보다 더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 로아드네스는 이미 제 형님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꼈다. 그를 반긴 바르데날도는 평소에 좋아하는 차도 한잔 대접하지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바르데날도는 로아드네스를 보자마자 담담한 척하던 표정이 무너져 내리더니 그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16558463769727.jpg“로안. 내가 어떻게 이 말을 꺼내야 할지…….”

16558463713293.png“제가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머뭇거리던 바르데날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에 이유 모를 두려움이 들어차는 바르데날도를 보며 로아드네스는 준비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바르데날도는 아주 느릿하게 그 보고서를 읽었다. 길지도 않은 내용을 한참 반복해서 읽어내리던 바르데날도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16558463769727.jpg“로안.”

16558463713293.png“형님.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위험합니다.”

16558463769727.jpg“……로안.”

바르데날도가 거의 흐느끼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16558463769727.jpg“어제, 충격적인 제보를 들었다.”

16558463713293.png“……무엇입니까?”

황태자는 한참 뜸을 들였다. 로아드네스는 참을성 있게 그가 떨리는 입술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16558463769727.jpg“이 나라에 사실…… 반란군이 없다는 사실을 들었다.”

16558463713293.png“그게 무슨 뜻입니까?”

로아드네스가 모르는 척 되물었다.

16558463769727.jpg“대공이, 대공이 네 발을 서부에 묶어두기 위해 없는 반란군을 만들어 보냈다고…… 게다가 금기인 마나석을 서부에 심어 주기적으로 마물이 출몰하게 했다고…….”

16558463713293.png“그 새끼가 자기 입으로 그리 지껄였습니까?”

16558463769727.jpg“아니,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그러더구나.”

이미 형님에게까지 말을 했구나. 로아드네스는 혹시나 아드리엔에게 불똥이 튈까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했다. 자신이 전장에서 몇 년을 굴렀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16558463713293.png“어찌하실 겁니까?”

오히려 자신이 그리 의미 없이 구르는 바람에 형님이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손에서 놓을 수만 있다면 좋았다. 생각보다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로아드네스를 보는 바르데날도의 얼굴은 아주 슬퍼 보였다. 아드리엔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16558463769727.jpg“어찌 그리 담담한 것이냐. 로안. 나는 내가 그리 믿었던 숙부가, 너를 그리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잠도 자지 못했는데……!”

16558463713293.png“그래서 그 위험한 인물에게서 형님을 벗어나게만 할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바르데날도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16558463713293.png“형님의 말대로라면,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이미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황실에서 그토록 골머리를 앓던 반란군은 물론이고 마물을 불러내다니. 게다가 마나석처럼 마법과 관련된 것들은 이 나라에서 금지된 것이 아닙니까. 계속 안고 가시다가는 형님이 다칩니다.”

16558463769727.jpg“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공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지 않느냐. 어찌 내가 내 손으로 그를 놓는단 말이냐. 로안, 내게는 너와 숙부밖에는…….”

16558463713278.jpg“전하! 전하!!”

황태자가 절망 어린 목소리로 흐느끼자마자 시종 하나가 허락도 없이 들이닥쳤다. 얼마나 큰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는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16558463713278.jpg“도, 동부에서, 동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 서신을 받아들었다. 뛰쳐 들어온 시종은 그가 매번 편지 분류를 맡긴 시종이었기에 그가 저리 급히 반응하는 내용이라면 분명 중요한 내용일 터였다. 동부라는 말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깜짝 놀란 황태자가 정신없이 서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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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레타를 포함한 동부 연합은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에 대한 지지를 모두 철회한다.] 믿을 수 없는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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