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배은망덕한 천하의 잡놈2022.01.08.
“형님!”
황태자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결국 쓰러지기 직전인 바르데날도를 단단히 잡은 로아드네스가 그를 품에 안고 서신을 읽었다. 피레타라는 글자에 가슴이 뛰었다. 어제 아드리엔이 절망하는 얼굴로 날린 전서구가 제대로 먹힌 게 분명했다. 노에비안은 이제 더 이상 쥘 수 없는 패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알기에 바르데날도가 이리 반응하는 것이었다. 로아드네스가 제 형님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 자리까지 부축해 앉혔다. 황태자는 1인용 소파에 등을 완전히 묻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형님.”
“로안, 로안, 내 어찌 내 입으로 숙부를…… 숙부를…….”
결정은 났다. 다만 황태자는 차마 제 입으로 숙부를 놓겠다 말을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아무런 말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로안?”
황태자가 창백한 얼굴로 여전히 서 있는 로아드네스를 올려다보았다. 비장하게 검집에 손을 올린 로아드네스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부든 서부든, 형님을 계속 지지하게 만들 방법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
“황실 제1기사단을 보내, 그를 형님이 직접 잡아들이시면 됩니다.”
“로안……!”
과격한 내용에 벌떡 일어난 바르데날도는 희게 질린 입술로 파르르 떨더니 결국 다시 소파 위로 주저앉았다. 로아드네스는 제 형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눈높이가 낮아진 덕분에 황태자의 흔들리는 눈이 더 잘 들어왔다.
“그래야 형님이 다치지 않고, 완전무결하게 황제가 되실 수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로안, 로안 나는…….”
“형님이 명만 내려 주신다면, 형님 대신 제가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부황께도 제가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습니다. 형님께선 그저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 개새끼를 버리겠다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황태자는 정치에 일절 참견하지 않던 아우의 강력한 요청에 결국 고개를 떨궜다. 겨우겨우 끄덕이는 그의 얼굴 아래, 군청색 바지가 눈물방울로 짙어졌다. 로아드네스는 말없이 황태자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잘하셨습니다, 전하.”
전하가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제 손으로 숙부를 죽일 뻔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바닥에 낮게 깔리자 젖은 무릎을 쥐고 있던 황태자의 손이 머리와 함께 덜덜 떨렸다. 로아드네스는 그의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 완전무결할 바르데날도의 앞길에, 노에비안이라는 오물을 치워 버릴 때가 온 것이었다.
*** 아드리엔의 마지막 장례식이 코앞이었다. 아드리엔의 시신을 발아래에 두고 있는 대공저. 그곳에서 밀려드는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노에비안은 신사들을 위한 사교클럽에 틀어박혔다. 자신이 가진 이 허울뿐인 자리가 이토록 실감 났던 적은 참 오랜만이었다. 공국으로 승격되어 온전한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수도,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정사에 관여할 수도 없는 대공의 옆자리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탐을 내는 것도 우스웠다. 그는 힐끔거리며 다가올 기회를 노리는 자들을 피해 VIP룸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서 펼쳐진 서신들은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의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빌어먹을 카스타냐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내비치는 레일론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죽은 레티나 황후의 친정인 윈스턴 후작가까지 설명을 요구했다. 같은 배를 타고 있지만 하나같이 거슬리는 작자들이었다.
“……설명.”
무슨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카스타냐의 요구를 핑계로 블리에를 대공저로 들였지만, 스스로도 도대체 왜 위험부담을 계속 안은 채 해명조차 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대공저 앞에서 임시 천막까지 올려 버티고 있는 미친 로아드네스까지. 노에비안은 로아드네스의 만행을 자신을 향한 도전이자, 블리에를 향한 어필이라 생각했다. 언제든 제게로 오라는 은밀한 신호 말이다. 쨍그랑-! 기분이 아주 더러워져, 그는 마시던 술잔을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손쉽게 깨져버린 유리 파편들이 대리석 바닥에 흩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대용품에 불과했던 여자였다. 얼굴이 아무리 똑같다 한들 이렇게 이성을 잃을 만큼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대용품을 곁에 두고 하찮은 행복이나마 찾으려 노력해봐.’
‘블리에 아카시아와 새 삶을 살아.’
‘가질 수 없었던 나는 잠시 잊고, 새로운 사람과 당신의 행복을 찾아.’
약을 먹고. 술을 마시고.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고. 미친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아드리엔의 영혼 한 조각과 닿을 수 있는 짓이라 생각하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을 그는 반쯤 미친 상태에서 느꼈다. 어차피 제 것이 될 여자였지만 그동안의 전적을 생각하면 묶어서 가둬놓지 않는 이상 통제될 것 같지 않았다. 강제로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유일하게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손이 떨렸다. 어쩌면 지금도 계속 마시고 있는 술기운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의 이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아드리엔의 말처럼 어쩌면 그 하찮은 행복이나마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황태자는 자신을 버릴 수 없다. 황태자비를 서부에서 들이는 바람에 잃었던 동부의 마음을 자신으로 인해 얻지 않았던가. 균형. 포용. 황태자 바르데날도를 성군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모두 자신으로부터 나왔는데. 황후가 바뀌면 황태자도 바뀌었던 대부분의 전례를 생각해보면,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9황자와의 후계 경쟁에서 매우 자유로운 편이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자신이 단단히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다. 노에비안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 곱씹으면서도, 가끔 제 것처럼 굴지 않는 블리에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장례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 트로비카의 공동묘지에는 전례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젊은 대공비 아드리엔 트로비카의 장례가 정확히 100일을 채우는 날이었다. 대신관을 비롯한 신전 사람들은 물론이고 황실의 주요 대신들까지 모여 있는 자리였다. 주신을 향한 찬송가를 제외하고 슬픈 정적만이 흘러야 하는 공간에는 왠지 모를 싸늘함이 감돌았다. 한겨울이라 날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장례 막바지쯤에서야 등장한 무리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옷차림만 보아도 수도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대공비 아드리엔의 친정인 동부 피레타 사람들이었다. 소공작 그레고리를 위시한 동부 피레타 사람들은 비탄에 잠겨 있는 표정이 아니라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장례 내내 저들끼리 모여 있었다. 장례식의 1부가 끝나고, 대부분의 손님이 돌아가자 묘지에는 오로지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과 신전 사람들, 그리고 직계 가족인 대공 노에비안만 남았다. 잠자코 있던 소공작 부부가 노에비안에게로 다가온 건 바로 대공비 아드리엔의 유리관이 검은 천에 덮인 채 깊은 땅속으로 들어갈 때쯤이었다. 상주로서 삽으로 흙을 퍼 그곳에 한 번 흩뿌린 노에비안이 잠시,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멈추었을 때였다.
“지랄하네. 개 같은 새끼.”
낭랑하지만 약간 거친 여자의 목소리가 엄숙한 장례식에 울려 퍼졌다. 당황한 대신관이 함께 온 신관들에게 찬송가를 더 크게 부르라 수신호를 주었지만 터져 나온 여자의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더럽고 뻔뻔한 놈. 감히, 피레타의 딸을 데려간 도둑놈 주제에 뒤에서 몰래 딴 여자를 만들어?”
은은하게 흐르던 오르간 연주 소리가 뚝, 멈추었다. 황실에서 파견을 나온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동작을 멈춘 노에비안의 눈치를 살폈다. 오랫동안 땅속에 들어간 관을 응시하던 노에비안이 시선을 돌렸다. 검은 망사를 드리운 모자를 쓰고 있던 소공작 부인, 비앙카 피레타가 성큼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희번덕이고 충혈된 눈은 그녀가 더 이상의 욕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음에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충분히 전달되었다.
“네가 감히, 아드리엔을 배신해?”
“부, 부인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러시면……!”
“네 상전한테 물어봐. 내가 왜 이러는지.”
그녀를 말리려던 짐스커가 노에비안의 눈치를 살폈다. 짐스커 역시 상황 파악이 끝났다. 비앙카 피레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녀가 왜 분노하는지 노에비안 외에 짐스커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여기에 없을 테니까.
“평소에는 말만 잘하더니, 왜. 말해보라니까?”
“무엄하군.”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노에비안의 차가운 시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진 비앙카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올 것 같은 그레고리에게로 향했다. 그레고리의 얼굴에서 잠깐 아드리엔을 본 노에비안의 눈썹이 아주 잠시지만 꿈틀거렸다.
“짐스커. 사병들에게 동부의 조문객들을 대공저로 모시라 일러라.”
“예, 예……! 부인, 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동부에서 온 무리에게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그대로 큰소리를 치려던 그레고리의 입이 누군가에게 틀어막히고,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던 비앙카 역시 짐스커와 다른 기사들에 의해 거의 끌려가듯이 마차에 태워졌다. 저 뻔뻔한. 미친 새끼. 배은망덕한 천하의 잡놈. 틀어막힌 입에서 대충 그런 말들이 뭉개져 노에비안의 귀에 틀어박혔다.
“계속하시지요, 대신관 예하.”
“아, 아예.”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보듯 불안한 얼굴의 대신관이 다시 손을 움직이자 야외에 내놓은 오르간에서 다시 신성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노에비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삽으로 흙을 퍼서 아드리엔의 관이 들어간 구덩이를 채웠다. 오르간 소리. 신관들의 찬송가 소리. 대신관의 기도 소리. 남아 있는 몇몇 황실 사람들의 의례적인 흐느낌. 아무 의미 없는, 그런 소리. 삽으로 흙을 퍼서 구덩이에 흩뿌리는 내내, 노에비안은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긁어모아 함께 묻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옥 같았던 장례 기간이 끝났다. 아드리엔, 가질 수 없었던 당신을 향한 열망도,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당신을 향한 집착도 이렇게 묻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신관이 내미는 성수를 흩뿌리며, 노에비안은 저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을 그대로 뒀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이 아득하던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 다가와 차가운 땅속에 기어코 묻히고야 마는 아드리엔을 보자, 이성의 어디 한군데가 뚝, 끊어진 듯한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천 번 상상하고, 대비했던 슬픔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 제 손으로 흙을 덮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주신의 이름으로, 대공비 아드리엔 트로비카가 아바델리아에서 영면하였음을 선포하노라!”
대신관의 외침과 함께 황제가 하사한 하얀 비석에 마침내 아드리엔 트로비카의 이름이 정식으로 새겨졌다. 《북부 트로비카의 안주인이자 동부 피레타의 딸이었던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 이곳에 잠들다.》
묻히는 것은 아드리엔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다. 노에비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더럽고 뻔뻔한 놈. 감히, 피레타의 딸을 데려간 도둑놈 주제에 뒤에서 몰래 딴 여자를 만들어?’
‘네가 감히, 아드리엔을 배신해?’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