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비앙카의 절규2022.01.12.
나는 전날부터 밤을 지새웠다. 노에비안은 어제 별관에서 하루를 보냈고, 그대로 내 시신이 담긴 관과 함께 묘지로 향했다. 나는 상복을 입었지만 결국 그를 뒤따르지 않았다. 차마 땅속에 묻히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저택을 지키게 된 가스팔이 노에비안이 가지고 다니던 비상용 열쇠 꾸러미를 내게 전했다. 대공비의 집무실은 물론, 침실 사용 모두를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대공비 아드리엔의 시신을 실은 꽃마차와 상주 노에비안이 이끄는 행렬이 대공저를 벗어나는 동안 나는 대공비의 침실 창문을 통해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저택을 벗어나고도 얼마나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만큼 꽤 오래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가스팔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는지 오래 머뭇거리다가 내 시선이 바깥에서 떨어지지 않자 한숨을 푹 쉬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가스팔이 나가자마자 품에서 찢어낸 신문 한 장을 펼쳤다.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내 장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늘 새벽. 먼동이 트는 창문을 보며 뒤척이던 나는 요나가 조용히 들어와 머리맡에 신문을 놓고 사라지자마자 그것을 펼쳐보았다. 황제 페하의 탄신일을 앞두고, 수도 전역에서 며칠 동안이나 전야제가 펼쳐진다는 내용의 기사에 짤막한 쪽지가 붙었다. [붉은 불꽃이 하늘을 수 놓으면, 푸른 별 하나가 떨어진다.] 론타의 상징은 푸른색. 예법상 황제 폐하의 탄신일과 관련된 행사에서는 푸른 불꽃을 쏘며 제국의 번영을 바랄 텐데. 붉은 불꽃을 쏘는 날이라도 있는 걸까. 게다가 푸른 별이라면……. ‘노에비안 트로비카.’ 로아드네스가 암시할 만한 제국의 푸른 별은 노에비안뿐이다. 나는 신문과 함께 놓여 있던 하얀 동백꽃가지를 보며 여전히 뛰는 가슴을 눌렀다. 분명 신호였다. 로아드네스가 황태자와 상의 없이 단독적으로 행동할 리는 만무했다. 분명, 황태자가 동의한 일이다.
“부인! 부인!”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그때였다.
“도,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의 친정에서 조문객들이……!”
나는 잠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문을 통과해 들이닥치는 거대한 마차에 아주 분명하게 피레타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리가 불안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대공비의 침실에서 그들을 맞이한다면 화를 더 돋울 수는 있겠지만 비앙카의 충격은 상당할 것이다. 그들의 화를 돋우면서도 최대한 비앙카가 덜 충격을 받으려면, 내가 아드리엔의 방에서 나가 밖에서 맞이하는 게 최선이었다.
*** 비앙카와 그레고리가 대공저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었는데, 조금 마르고 상한 그들의 얼굴이 내가 죽은 지 이제 갓 100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큰소리로 알려주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소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들어온 그레고리와 비앙카는 내가 그들을 맞이하듯 입구로 다가오자 우뚝 멈춰 섰다. 내 얼굴을 본 그들의 반응은 솔직했다. 그레고리의 얼굴은 경악으로, 비앙카의 얼굴에는 경멸이 휘몰아쳤다.
“부인, 부인…….”
“마님?”
마리와 요나가 나를 말리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트로비카 대공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피레타 소공작 내외…….”
짝-! 두근대는 마음을 다잡고 그들에게 걸어간 내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허공을 가로질러 뺨을 내려치는 소리는 꽤나 앙칼지고 날카로웠다. 내 멱살이라도 잡아 올릴 기세로 다가오던 그레고리의 발걸음이 뚝 멈출 만큼 강력한 한 방이었다. 짜아아악-! 목이 뻐근할 만큼 오른쪽으로 돌아갔던 고개가 정확히 반대편으로 다시 돌아갔다. 두 뺨이 불이라도 붙인 듯 화끈했다. 입안이 찢어진 듯 피비린 맛이 났다. 양쪽 뺨을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비앙카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끝났나요?”
나는 무너지려는 마음을 꼭 붙들고 목소리를 냈다. 내 말에, 모여 있던 사용인이며 오빠 부부를 데려왔던 기사들까지 무겁게 침묵했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하녀장 소피에게 눈짓하자, 노련한 하녀장은 재빨리 사용인들을 멀찍이 물리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 꼴마저 보기 싫었는지, 인상을 왈칵 찌푸린 비앙카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이미 다 알아보고 온 길이니 내 말에 똑바로 답해. 확인하고자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 뻔뻔한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 하는 말이니까!”
“……비앙카.”
“당신은 빠져 있어요.”
그레고리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비앙카를 말리려 했지만, 나는 저 정도로 흥분한 비앙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야? 도대체 언제부터 그 개자식이랑 뒤에서 작당을 한 거야? 도대체……!”
비앙카는 말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내 얼굴을 보며 헛숨을 들이 삼켰다. 나를 찢어 죽이기라도 하려는 듯 내 팔이며 어깨 부분의 프릴을 쥐어뜯으면서도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와 만난 지는 1년 정도일까요. 어쩌면 더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대공 전하와 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예요.”
잘 틀어 올린 내 머리카락이 비앙카의의 작고 야무진 손에 곧바로 틀어 잡혔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비앙카!”
“부인! 그만 하세요! 부인!”
노에비안과 만난 지 1년이 넘었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커멓게 빛나던 비앙카의 눈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피레타에 소식을 전했을 때부터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오히려 동부에서 군사라도 끌고 오지는 않을까 기대까지 했던 참이니까. 하지만 그럴 수 있었다면 비앙카가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을 테다.
“그만 하세요, 부인!”
“비앙카!”
마리와 요나, 그레고리가 비앙카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두피가 뜯겨나갈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비앙카와 그레고리의 얼굴을 보고 울컥 치솟아 오르는 눈물을 핑계 삼을 게 생기는 것이니까.
“망할 년. 이 천박한 년! 감히 동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도 네가 멀쩡할 줄 알아! 아드리엔도 네가 죽였지? 리엔을 살려내! 살려내고 네가 죽어!”
절규에 가까운 비앙카의 목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비앙카가 부르는 내 애칭이 무척 그리웠었다.
“감히, 감히 정부 따위가 대공비 자리를 넘봐! 감히 우리 리엔의 자리를 넘봐! 아픈 리엔을 두고 노에비안 그 개 같은 놈이랑 붙어먹을 생각을 해! 그 애가 누군 줄 알고! 그 애가 얼마나 귀한 아이인 줄 알고!!”
머리 장식은 이미 다 바닥에 줄줄이 뜯어져 있고, 요나와 마리가 비앙카의 양팔에 거의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곧 가까이에서 입구 문이 열리더니, 겨우 뜯어 말려진 비앙카와 내 사이로 거대한 인영이 들어왔다.
“그만하시지요.”
로아드네스였다.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었다. 갑작스러운 황자의 등장에, 동부의 모든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고 그레고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가슴을 들썩이던 비앙카마저 참담한 얼굴로 씩씩대다가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오늘은 대공비의 장례가 끝나는 날이 아닙니까. 소란은 그 이후에 있어도 될 일입니다.”
나 역시 아마 몰래 흘린 눈물로 화장이 번져 있을 터였다. 로아드네스의 널찍한 등 뒤에 숨어, 나는 비앙카가 낮게 흐느끼는 소리를 몰래 들으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하나만, 하나만 물을게요.”
차마 황자 앞에서 더 추태를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지 비앙카가 억지로 말을 높였다. 로아드네스가 나서지 말라는 듯 뒷짐 진 손으로 떨리는 내 팔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의 단단하고 너른 등에 이마를 기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비앙카의 무너지는 얼굴을 나 역시 볼 자신이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끅끅대며 넘어가는 숨을 겨우 삼킨 비앙카의 목소리가 대공저 바닥에 낮게 깔렸다.
“당신의 존재를…… 우리 리엔이 알고 죽었나요?”
팽팽하게 당겨진 로아드네스의 옷자락을 꾹 말아쥐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우리 리엔이…… 리엔이 당신의 존재를 알고 죽었냐고요.”
나는 결국 무너졌다. 휘청하는 나를 느끼고, 로아드네스가 바로 뒤돌아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졸도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언뜻 스친 비앙카의 얼굴이 너무 슬픈 분노로 가득 차 있어서,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언니.’
바보 같은 아드리엔은 모르고 죽었어. 그래서 더 괴로웠어. 로아드네스의 단단한 품에 얼굴을 묻은 나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오랜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비앙카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입구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이번엔 노에비안이 로비로 들어섰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로아드네스의 품에서 흐트러진 내 꼴. 절규하는 비앙카를 보고 상황 파악이 끝난 듯한 노에비안의 걸음이 뚝 멈췄다. 얼굴이 흠뻑 젖은 나는 노에비안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노에비안의 눈도 정상은 아니었다.
“아니요. 제 존재를, 대공비께서는 모르셨어요. 정말이지 꿈에도 모르셨을 거예요.”
나는 로아드네스의 품에서, 노에비안을 빤히 쳐다보며 입술을 뗐다. 넘치는 울음과 비명을 가슴속에 꾹 밀어 넣은 목소리였다.
“으으으-. 으으으으윽-!”
“하지만 지금은 아시겠죠.”
“으으으흑! 흐윽! 흐으으윽!”
“장례 기간 내내 그분은 지하에서, 저는 이곳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했으니까요.”
비앙카의 목 안에서 울분이 끓어 넘치는 소리와 함께 절규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노에비안의 반쯤 돌아 있는 눈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내게 향했다. 비앙카가 차가운 로비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그레고리가 격분에 소리치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로아드네스의 몸이 거세게 흔들리는 걸로 보아, 나를 보호하는 그를 향해 몇몇 사람들이 달려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그 순간만큼은 비앙카도. 그레고리도. 로아드네스도 없었다. 나는 오로지 노에비안의 번들거리고 기이한 시선을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 노에비안의 사병들이 동부의 사람들을 별관으로 데려갔다. 그레고리는 로아드네스 앞에서 이성을 잃을 수는 없는지, 내일 두고 보자며 우리를 노려보고 사라졌다. 로아드네스는 빈센토가 급히 불러 대공저를 나서야 했다. 대공저를 나서기 전, 로아드네스의 번뜩이는 눈이 노에비안을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빛났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미간을 구긴 로아드네스가 곧 다시 오겠다는 수신호와 함께 무거운 걸음을 뗐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나는 속절없이 노에비안의 손에 붙들려 거의 질질 끌려가듯이 계단을 올랐다.
“꼼짝 말고 여기서 기다려.”
차갑게 일갈한 노에비안이 침실문을 부서져라 닫고 멀어졌다. 대공비의 침실에 거의 던져지다시피 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흐느꼈다. 그레고리의 탄식과 비앙카의 절규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보다 괴로웠다. 그들의 화를 돋워, 노에비안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않게 하려 했을 뿐인데. 내 욕심 때문에 가뜩이나 괴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노에비안이 나간 침실 문을 노려보았다. 내가 죽었던 이 공간에서 노에비안은 결국 자신의 정부를 가지려는 게 분명했다. 온갖 욕망이 뒤섞인 미쳐 있는 눈동자만 다시 떠올려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만큼 선명했다. 그가 뭘 원하는지. 내 장례식의 마지막 날. 절규하는 내 가족을 곁에 두고, 아드리엔을 차가운 땅에 밀어 넣고. 기어코 블리에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 역시 이성의 끈 어디 한군데가 뚝 끊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괜찮다고. 계획대로 다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분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서 나는 미친 여자처럼 다시 침실문을 박차고 나가 아드리엔의 드레스 룸을 향해 내달렸다. 잠가 놓지도 않은 방문은 쉽사리 열렸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드레스 하나를 빼 들었다.
“마님!”
침실을 뛰쳐나올 때부터 함께 따라온 하녀들이 기함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요나는 나가.”
“마, 마님?”
“애니, 마리. 이리 와서 나를 꾸며.”
“예?”
나는 멍청하게 서 있는 애니를 향해 드레스를 집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애니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마리까지 움찔했다.
“죽은 아드리엔과 똑같이 만들어, 당장.”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