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가족도 아닌데2022.01.26.
유령이라도 나올 것처럼 싸늘하고 음습한 겨울 숲길. 살기를 벽처럼 쌓아가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엔 그들이 내뿜는 입김만 존재했다. 균열이 일었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던 노에비안이 이죽였다.
“그러니 네 놈의 사랑을 앗아간 것도. 아드리엔이 대공저에서 죽은 것도. 모조리 네가 그토록 지키려는 네 형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로아드네스는 점점 숨이 찼다.
‘아드리엔이 이 말을 들었구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불행.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의 형님, 바르데날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진실을 들어서. 그래서 그토록 아연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아드리엔과 이루어져? 나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나고 행복할 것 같으냐? 아니.”
진실을 알면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일 뿐. 로아드네스의 머릿속에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독처럼 스며들었다. 이제 죽음을 선사할 사신 같은 얼굴은 로아드네스가 아닌, 다 죽어가던 얼굴의 노에비안이 하고 있었다.
“진실을 모른 체하고 아드리엔을 갖거나. 진실을 받아들이고 아드리엔을 놓아주거나. 둘 중 하나밖엔 없다.”
로아드네스를 향해 ‘너야말로 절대로 아드리엔을 가질 수 없다’며 속삭이는 악마. 빌어먹을 그의 반쪽짜리 숙부는 분명 그런 얼굴이었다. 자신이 노에비안에게 속아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눈물을 떨구던 아드리엔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로아드네스의 숨통이 조여들었다. 절대로 아드리엔을 가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악마 새끼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고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번뜩 일었다. 그의 눈빛이 변하는 걸 알았는지, 노에비안 역시 가지고 있던 검을 꽉 쥐었다. 챙-! 검이 맞붙은 건 순식간이었다. 첨예하게 맞붙은 검은 허무하리만치 로아드네스의 것만 주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온몸이 무기나 다름없는 로아드네스에게, 전장에서 활약한 지 수년이 흐른 노에비안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컥-!”
“그냥 죽어. 이 개새끼야.”
로아드네스가 노에비안의 멱살을 한 손으로 사납게 틀어쥐곤 검으로 단번에 어깨를 꿰뚫었다. 바르데날도에 대한 이야기로 머릿속이 아무리 어지럽다 해도, 눈앞의 악마를 죽이겠다는 집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런, 미…… 친…….”
“미친 건 너지. 아드리엔을 두고 정부나 두는 더러운 새끼.”
“컥-!”
“왜. 형님이 네게 정부를 두라 시켰다고도 하지 그래.”
어깨를 꿰뚫은 장검의 날이 로아드네스가 사납게 웃는 얼굴로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점점 아래로 향했다.
“감히, 형님을 팔아? 형님이 네 놈을 버린 이유를 모르겠나? 그런 작당 모의까지 한 사이라면 왜 형님이 네놈을 내치셨겠느냐.”
몸이 꿰뚫린 채 검날이 심장으로 향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던 노에비안이 급히 손으로 검을 쥐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죽이고 말겠다는 로아드네스의 번뜩이는 적안에 자비는 단 한자락도 비치지 않았다. 마물을 죽이는 전장귀, 그 자체였다.
“말해봐, 응? 네 놈 말이 맞다면 왜 형님이 너를 구하지 않느냔 말이다.”
검날이 심장을 베어낼 것처럼 내려오다 멈춘 것은 그때였다.
“로안! 로안! 멈춰라!”
가장 고통스럽게 악마를 죽이려던 로아드네스의 귀에, 그제야 말 투레질 소리와 기사들의 병장기 소리, 숨이 넘어갈 듯 달려오는 바르데날도의 쌕쌕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납게 웃으며 손에 힘을 주던 로아드네스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갈급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바르데날도의 희고 다정한 손이 로아드네스의 팔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통에 신음하는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마치 비웃음 소리처럼 로아드네스의 머리를 울렸다.
“로안! 로안! 괜찮으냐? 숙부, 괜찮습니까?”
끈 달린 인형처럼 억지로 몸을 세운 로아드네스가 제 형님을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로안! 내가 부탁한 건 이런 게 아니지 않느냐?”
바르데날도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쉴 새 없이 제 숙부를 향해 괜찮냐고 속삭였다. 동시에 함께 달려온 기사들에게 의사를 불러오라 명했다.
“너 역시 직접 나서지 말고, 1기사단에 맡기라 하지 않았어! 네 손으로 직접 숙부를 끌어내리는 모양새가 되면…….”
“형님.”
낮게 혼을 내던 바르데날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음산했다.
“형님이 저 새끼에게 아드리엔과 맺어져라 종용하셨습니까?”
엄한 빛이 서려 있던 바르데날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멈칫하던 그의 시선이 어깨에서 쏟아지는 피를 막으며 쌕쌕대는 노에비안에게로 향했다.
“저 놈 말이 사실입니까?”
“로안, 그게…….”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황태자의 눈이 더 커졌다. 로아드네스가 그에게 그토록 분노하는 것을 본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황태자의 눈이 침잠했다. 그때 기사 몇몇이 노에비안의 치료를 위해 그를 부축하려 다가왔다.
“내 사냥감에 손대는 놈은 처참하게 죽여주마.”
로아드네스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기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로안, 보는 눈이 많아. 일단은 숙부를 치료하고 내 차차…….”
“지금. 당장 듣지 못하면 형님은 숙부의 잘린 모가지만 들고 환궁하실 겁니다.”
로아드네스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자마자 바르데날도의 순한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인내는 길지 않았다. 로아드네스가 망설임 없이 노에비안을 향해 단검을 조준해 던졌다.
“전하!”
“전하! 전하!”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목으로 향했던 단검은 바르데날도의 어깨에 정확히 꽂혔다. 바르데날도가 몸을 던져 막은 것이었다. 로아드네스는 몸속을 빠르게 돌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벼락같은 고통에 신음하며 어깨를 부여잡은 바르데날도가 기사들을 뿌리치고 로아드네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로아드네스는 굳은 채 그 장면을 환상을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 이 나라의 작은 태양이 제국 최고의 문제아인 아우에게 무릎 꿇는 참담한 장면을 말이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제발. 숙부의 목숨만은 살려다오. 이 형님의 소원이다. 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들을 알려줄 테니. 제발…….”
바르데날도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도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아니라고. 억울하다 한마디만 했었다면 미련 없이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베어버리고 덮을 수 있었을 텐데. 바르데날도의 애원과 부탁이 로아드네스의 심장을 새카맣게 불태웠다.
*** 어색한 침묵만이 고여 있는 마차 안. 죄인처럼 고개 숙인 바르데날도의 입이 열린 건 멀리서 수도의 입구가 보일 때쯤이었다.
“다 내 탓이다, 로안.”
바르데날도가 두 손에 묻어둔 얼굴을 들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젖은 얼굴, 창백해진 입술. 대충 옷 위에 붕대를 감아둔 어깻죽지까지 연달아 보던 로아드네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네 첫사랑이, 그렇게 간절한 것인 줄 몰랐다. 그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어. 서부에서는 황후 폐하를 들쑤셔 에페로를 황태자로 세우려 하지, 동부에서는 서부에게 밀리는 걸 참을 수 없어 했고.”
떨리는 황태자의 목소리가 마차 안을 맴돌았지만, 로아드네스는 반응 없이 변명하는 바르데날도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고만 있었다.
“네가 그저 공녀가 어여뻐, 어린 마음에 가지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다.”
참담한 변명에 로아드네스가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꼭 감았다.
“……가족도 아닌데.”
감은 눈 밑으로 조소와 한숨이 섞인 쉰 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가족도 아닌데, 그토록 위로를 받았던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여뻐서. 어린 마음에. 고작 그런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만남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형님을 제외하고 그토록 제게 위로가 된 건…… 곁에 있고 싶었던 건 그 아이가 처음이었습니다.”
*** 어린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을 처음 본 건, 10살 무렵이었다. 그날은 로아드네스의 생애 가장 슬픈 날 중 하나였다.
“망자에게 영화를! 론타에는 영광을!”
“망자에게 영화를! 론타에는 영광을!”
아름다운 꽃에 둘러싸인 어머니, 레티나 황후의 시신이 유리관에 안치되었다. 벌써 이 화려한 장례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게 흘렀지만 로아드네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하, 절대 울면 안 되십니다.”
유모가 뒤에서 조용히, 그리고 엄하게 말했다. 어린 로아드네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르데날도를 포함해 멀리서 온 황족들까지 입을 꾹 다문 채 덤덤히 장례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간간히 조문객 중에 눈물을 찍어내는 귀부인도 있었지만, 엉엉 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겨우 참아내다가 바르데날도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무렵 정신없이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거대한 조각상 하나에 작은 몸을 숨기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불길한 눈을 한 황자를 낳았다며 비난받던 어머니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해주셨다. 바르데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궁 담 너머에서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는 사랑받는 막내아들이자 동생이었다.
“흐어어어어엉-!”
아랫입술을 피가 날 만큼 깨물며 한참 굵은 눈물을 쏟아내던 그는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서러운 울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드리엔……!”
“허어어엉!”
서럽게 울어 재끼는 목소리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로아드네스는 자신의 소리가 새어 나간 줄 알고 굳어 있다가 곧이어 들리는 여자아이와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조각상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지독히 원망하던 밝은 태양 아래 그보다 더 밝게 반짝이는 금발의 여자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검은색 보닛을 쓴 작은 머리가 떨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녀는 계속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오라비로 보이는 소년이 급히 손수건을 건네며 품에 안아 달래도 소용없었다. 누가 보면 소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황족의 위엄을 보여야 하니 절대 울지 말라 신신당부하던 시종들마저 소녀가 서럽게 울자 밉지 않은 듯 곤란하게 웃고 있었다.
“아드리엔, 황후 폐하 앞에서 무슨 무례냐.”
“그, 흡…… 그치만…… 끄윽…….”
아비로 보이는 자가 당황해서 엄히 말하자 소녀가 울지 않으려 애쓰며 웅얼거렸다. 작은 손에 얼굴을 묻고 소녀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결국 오라비의 품에 안긴 채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로아드네스는 바르데날도가 다시 자리를 지키러 돌아왔을 때까지 장례식장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사라진 소녀의 잔상을 눈으로 좆았다. 누군가 대신 실컷 울어주었기 때문일까, 로아드네스는 자신이 너무 놀라 어느새 울지 않고 있다는 걸 한참이나 자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