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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도와줄까? (78/171)

78. 도와줄까?2022.01.29.

재회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로열 아카데미에 머무는 시간 동안, 슬픔에 잠겨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던 로아드네스는 홀로 도서관을 찾았다. 구석에서 조용히 책만 읽고 있는데도, 가끔 지나다 그를 발견한 일반 아카데미 학생들은 흠칫흠칫 놀랐다. 그가 가면을 쓰고 있는 로열 아카데미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한 건물이었지만 각국의 황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로열 아카데미와 귀족들을 위한 일반 아카데미로 나누어져 있었다. 로열 아카데미는 예기치 못한 암살을 막기 위해 학생 전체에게 가면을 쓰도록 했다. 마나석으로 만든 가면은 사용자가 원하면 일시적으로 머리카락은 물론 눈동자 색깔까지 변형이 가능한 귀중한 것이었다. 마나석 사용이 금지된 론타에서 예외를 둔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로열 아카데미 학생들은 이런 가면을 답답하거나 불편하다 했지만, 로아드네스는 오히려 좋았다. 짙푸른 눈동자는 론타 황족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에 돌연변이 같은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감춰주기까지 하니 아주 요긴했다.

16558465168407.jpg“아드리엔, 여기서 뭐 해?”

수업이 끝나면 다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을 무렵, 로아드네스는 익숙한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16558465168407.jpg“내일이 재시험이라.”

16558465168407.jpg“아하하-. 맞아, 너 이번에도 엘라콘어 시험에서 낙제지? 어떻게 매번 그렇게 낙제를 받을 수 있지? D 정도만 받아도 통과일 텐데 너도 참…….”

16558465168407.jpg“도와줄 게 아니라면 저리 가, 소피아.”

16558465168407.jpg“도와주고 싶은데, 나도 시간이 없어서-. 다들 다른 과목 시험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테니 어쩌니 아드리엔?”

로아드네스는 벌떡 일어나 가지런히 꽂힌 책 하나를 빼 얼굴을 드밀었다. 책의 빈틈 사이로 반짝이는 금발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소녀가 보였다. 테이블에 마구잡이로 어질러져 있는 엘라콘어 교재들. 붉은색 비가 내리는 시험지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엘라콘어는 로아드네스가 가장 잘하는 과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말을 걸어볼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러다 로아드네스는 시선이 마주치기 직전에 빠르게 주저앉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가면을 움켜쥐었다. 붉은 눈을 보고 도망가던 또래 아이들이 떠오르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시에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그날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라고. 곱씹어보면 그날 저 애는 일부러 저 대신 울어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게 분명한데 말이다. 가면 안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 혼자 괜한 망상을 해 친한 척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로아드네스는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아드리엔에게 말을 걸어볼까 말까 하는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 매년 열리는 신년 가면무도회 철이 돌아왔다. 그날은 어머니, 레티나 황후의 장례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늘 로아드네스와 함께 시신을 지키며 조문객을 맞이하던 바르데날도는 시종들에게 떠밀려 무도회 준비를 하러 갔다. 늘 붐비던 장례식장은 휑했다. 황후궁 외부에 마련된 거대한 장례식장은 오전을 마지막으로 썰물처럼 조문객들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제 이 황후궁은 비워지게 될까, 혹은 다른 주인이 들어오게 될까. 어머니가 거닐던 정원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걷는다는 상상을 하자 가슴이 터질 것같이 아팠다. 아버지는, 형님은 전혀 아무렇지 않을까? 멀찍이 들리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다. 차가운 땅에 묻히는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돌아와서도 한참 미아처럼 황후궁을 돌아다니던 로아드네스는 자신을 찾아 쫓아온 시종들에게 이끌려 강제로 치장을 해야 했다. 황자인 그가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인 신년제에 불참할 순 없었으니까. 인형처럼 멍하니 치장을 받던 로아드네스의 우울한 기운에, 그의 유모는 화려한 가면을 건네는 시종들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가뜩이나 우울한 그에게 기름을 들이부을 순 없었다.

16558465168407.jpg“전하, 우울하신 마음은 이해 가지만…… 그래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늘 엄하기만 하던 유모도 레티나 황후의 장례 마지막 날 열리는 무도회가 그리 반갑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유모는 화려한 가면 대신, 로아드네스에게 익숙한 로열 아카데미 가면을 씌워주었다. 아직 데뷔하지 않은 어린 영식들은 그 가면을 쓰고 뽐내듯 등장했다. 유모의 배웅은 황자궁 입구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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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아틸차드홀로 향하던 로아드네스의 발걸음은 다시 황후궁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자, 망자의 공간은 아득한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결국 적막한 황후궁에도,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아틸차드 홀에도 가지 못한 채 회랑 끄트머리에서 방황했다. 그가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곳은 레티나 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16558465168407.jpg“어머니.”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황자궁에서도 참았던 울음을 그 초상화 아래에서 토해냈다. 이만하면 많이 참았다. 장례식장에서도 숨어서 눈물만 뚝뚝 떨구고, 아카데미에서도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홀로 숨어 있었으니까. 모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죽은 어머니를 잊고 웃으며 떠드는 공간에 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목놓아 울기에 이만큼 좋은 장소도 없었다. 망자의 공간으로 가는 길에 누가 밤에 몰래 들어올 리도 없었고. 싸늘한 겨울바람이 드러난 피부를 갈기갈기 찢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로아드네스는 한참을 울었다.

16558465168407.jpg“리엔! 내가 뭐랬어? 시신은 이미 오전 중에…….”

16558465168407.jpg“오빠가 그날 내가 너무 무례했다며? 그래서 다시 인사를 드리려는 것뿐이야!”

16558465168407.jpg“시신이 없는데 무슨 수로?”

16558465168407.jpg“내가 저번에 여기서 황후 폐하의 초상을 봤다니까. 거기서 묵념이라도 할 거야.”

16558465168407.jpg“그냥 했다고 쳐. 저기 황후궁 앞에서라도 묵념해. 잠깐 산책 다녀오겠다 해놓고 이렇게 늦게까지 나와 있었으니 아버지가 엄청 화나셨을 거야.”

16558465168407.jpg“길을 잃었다고 하면 되잖아. 오빠가 괜히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시간을 낭비했어.”

16558465168407.jpg“나는 그쪽인줄 알았지! 나, 참…… 근데 아까부터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려. 유령인가?”

16558465168407.jpg“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사람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하지만 가슴을 뒤흔드는 울음은 재채기처럼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끅끅대며 몸을 떨던 로아드네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꼴로는, 황자궁에도 아틸차드홀로도 들어갈 수 없다. 로아드네스는 제게로 곧장 쏟아질 사람들의 시선들을 상상하자 질식할 것 같았다. 가면을 쓰고, 정체를 감추고 있어도 그는 늘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살았다. 황실의 돌연변이. 레티나 황후의 오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유모가 식사를 권할 때 조금이라도 먹을 걸 그랬나. 장례 기간 내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는 자신도 선명히 느낄 만큼 말라가고 있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한심하게 울고 있는 모습, 황족이라면 누군가에게 절대 보이지 말라 했는데.

16558465168407.jpg‘누가, 누가 좀…….’

누가 손을 잡아주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간절한 생각을 하는데, 뚝 끊겼던 인기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남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16558465168407.jpg“얘, 괜찮니?”

그보다 더 가까이에서 밀가루처럼 하얗고 작은 여자아이의 손이 내밀어졌다.

16558465168407.jpg‘말도 안 돼.’

아드리엔이었다. 앙증맞은 가면으로 얼굴 반을 가렸다지만, 그는 단번에 소녀를 알아보았다.

16558465168407.jpg“무도회장은 저쪽인데?”

16558465168407.jpg“아드리엔, 그냥 가자.”

16558465168407.jpg“무슨 일 있니?”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의 오빠와는 달리 아드리엔의 음성은 또랑또랑하고 다정했다. 로아드네스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켜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6558465168407.jpg“……너, 괜찮은 거야?”

아니, 그는 괜찮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나머지 고작 그 한마디에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마음껏 울지도 못한 채 100일을 버텼다. 그에게 따스한 눈길과 품을 내어줄 사람은 이제 바르데날도나 아버지뿐이었다. 가장 소중한 존재가 셋에서 둘이 되는 기분은, 그리고 그 기분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이 절망은 갓 10살을 넘긴 그가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이었다.

16558465168407.jpg“도와줄까?”

괜찮니. 도와줄까. 별것 없는 말인데. 아직 어린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안 누구도 건네지 않았던 말이기도 했다. 소녀의 작고 하얀 손이 유혹하듯 그의 코앞에서 팔랑였다. 로아드네스는 그 말 한마디에 온 세상이 밝아지고, 그 몸짓 한 번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위로받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는 그를 기묘한 혼란에 빠뜨렸다. 평범한 가면 속에서 반짝이는 연녹빛 눈은 걱정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가족도 아닌 소녀가 자신에 대해 깊게 알수록 겁에 질려 도망갈 것이란 새로운 공포가 솟아났다. 로아드네스는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일어나 달렸다.

16558465168407.jpg‘도와줘. 도와줘, 제발. 누가 날 좀……!’

마음속 외침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 결국 로아드네스는 그날 열병을 앓았다. 밤새 그의 곁을 지키던 바르데날도의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걸 느끼고, 로아드네스는 눈을 반짝 떴다. 아침 햇살이 작은 얼굴에 고였다. 밤새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해서 피곤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16558465168407.jpg“전하, 오늘은 아카데미에 가지 않으셔도…….”

16558465168407.jpg“갈래.”

100일 내내 아카데미에 가지 않고 어머니의 시신을 지키겠다 드러눕던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의욕을 보이자 유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거르던 아침 식사마저 거뜬히 비워낸 로아드네스가 유모를 재촉했다.

16558465168407.jpg“가면 줘. 얼른.”

소년의 비장한 얼굴이 단번에 까만 가면에 가려졌다. *** 로아드네스는 도서관 구석에서 계속 아드리엔을 기다렸다.  

16558465168407.jpg‘도와줄까?’

  하얀 꽃잎같이 귀여운 손으로 자신을 도우려 했던 소녀를 떠올리자 부끄러움이 일었다. 도움을 줘야 할 사람은 황자이자, 소녀보다 몸집이 더 커질 사내이며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을 뻔했던 자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하면서도 로아드네스는 며칠이고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에서 아드리엔을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삼 일……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아드리엔이 나타난 건 해의 위치가 바뀔 때쯤이었다. 자리에 앉은 아드리엔이 어김없이 엘라콘어 교재를 꺼내며 한숨을 쉬자, 로아드네스가 빠르게 다가갔다. 툭-. 벌써 오래전에 써두었던 쪽지가 엘라콘어 교재 위에 올려졌다. 깜짝 놀란 얼굴이 그에게로 향했다. 로아드네스는 가면이 얼굴에 잘 붙어 있는지 손으로 확인했다. 평범한 흑발. 평범한 검은 눈. 자신은 그런 모습으로 보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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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눈을 느리게 몇 번 끔뻑이던 아드리엔은 더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쪽지를 펼쳤다. 작은 손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이자 심장은 물론이고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엘라콘어, 내가 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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