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네 소원을 내가 이루어주려는데2022.02.02.
도와준다는 말에 환하게 웃던 그날의 아드리엔. 불과 몇 시간 전에 먹먹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아드리엔. 연달아 솟아오르는 기억에 가슴이 아팠다. 로아드네스는 회상을 멈추고 바르데날도를 응시했다. 아드리엔에 대한 감정이 끌림에서 우정으로,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해 깊어질 만큼 깊어졌을 때.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던 영애들의 이름 중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라는 이름을 보고 불안함을 느꼈을 때. 기민하게 그것을 눈치채고 자신의 고백을 들어준 것 역시 눈앞의 제 형님, 바르데날도였다.
‘아드리엔은 안 돼요.’
‘흠? 왤까?’
장난스럽게, 하지만 다정하게 웃던 바르데날도.
‘제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다른 영애도 많잖아요. 아드리엔은 안 돼요.’
‘첫사랑이니?’
생애 단 한 번의 욕심. 태어나 처음 드러낸 소망이었다.
‘네. 다른 건 몰라도 아드리엔은 절대 양보 못 해요.’
‘……공녀도 네 마음을 아니?’
‘그, 그건…… 곧 말할 거예요. 그러니 안 돼요.’
그를 지긋이 응시하던 바르데날도가 뭐라 했더라. 귀엽다는 듯 제 키만 한 아우의 머리를 꾹 누르듯 쓰다듬어주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었지.
‘이 형님이 도와주랴?’
“로안.”
바르데날도의 변명이 이어질수록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점점 더 참담하게 무너져갔다. 그 어떤 말로도 그를 진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바르데날도의 목소리는 더 간절해졌다.
“내가 어찌하면 네가 날 용서해주겠니?”
로아드네스가 낮게 신음했다. 땅속에 묻힌 아드리엔의 시신을 되살리면? 블리에가 사실은 아드리엔이니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목숨을 끊어 사죄하라고? 과거로 시간을 돌려, 자신의 마음을 짓밟고 노에비안을 종용했던 것을 되돌리라고? 생각할수록 절망적인 감정만 들었다. 아드리엔의 절망은 누가 보상하는가. 자신이 그것을 보상해줄 수 있을 거라 자만하던 과거를 조소하고 싶었다. 지금 그는, 단번에 아드리엔의 죽음에 일조한 인물의 동생이 되어버렸다. 바르데날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지난날들이 고스란히 아드리엔에게로 향하는 화살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일도 모조리 아드리엔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마구잡이로 튀었다.
‘이제 어떡하나.’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한 아드리엔의 상황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던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새카맣게 불탔다. 그녀가 하찮은 미물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던 그런 마음은 바르데날도의 죄를 아드리엔에게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공포로 변질되었다. 사랑했다던 노에비안마저 가차 없이 버린 아드리엔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토록 여리고 상처 깊은 사람이 자신을 보며 바르데날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로안, 제발…….”
바르데날도가 애원할수록, 번뇌와 절망만 더 깊어졌다. 왜 아니라고는 변명하지 않는지. 어째서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말이 맞는다는 듯 용서만 구하는지 소리쳐 묻고 싶었다.
“도대체.”
침묵하던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열리자 바르데날도의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로아드네스는 웃음 한 자락 걸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 죄를, 어찌 다 갚으시렵니까.”
하지만 와르르 무너지려는 마음은 차마 다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방금도 내내 장례 마무리를 돕고 오던 길이다.”
성실하게 답하는 바르데날도의 순해 빠진 얼굴이 로아드네스를 더 절망하게 했다.
“공녀는 원래 몸이 약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들었다. 공녀에게는 내 죽음 이후에 용서를 구하고 살아가는 동안은 네게 용서를 구하마. 네 마음을 위로할 수만 있다면, 공녀와 닮은 그 귀부인이 황자비가 되는 것도 내 반대하지 않겠다. 내가 도우마.”
‘형님.’
두 입술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다 내 탓이니…… 부디 네 손에 혈육의 피를 묻혀 다른 이들이 너를 공격할 구실을 만들지 말거라. 이 형님을 원망해.”
‘형님, 아드리엔은…… 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셨어도,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게다.”
‘죽지 않고 살아, 형님이 종용하고 숙부가 저지른 일을 모조리 보고 느꼈습니다.’
아바델리아로 가지도 못한 아드리엔의 영혼이 이 더러운 꼴을 다 보고 내내 상처받았으며, 지금도 상처받고 있으리라는 말이 토기처럼 치솟았다. 아드리엔이 아바델리아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그런 기적이 자신에게 축복이라 여겼던 지난날을 저주했다. 축복이 아니구나, 그 애에게. 그 애에게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그리고 그의 혈육인 나는 절망이겠구나. 로아드네스는 점점 다가오는 성문을 보자마자 숨이 막혔다. 아드리엔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지 너무 두려워 손이 떨렸다.
*** 대공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황태자의 명으로 변방에 구금된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한 동부 사람들은 곧장 대공저를 들쑤셨다. 좀 말려달라는 가스팔의 간절한 시선에도, 나는 그들을 그저 두었다. 노에비안과 내게 상처받은 동부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속이 시원할 수만 있다면 손에 몽둥이나 불을 붙일 수 있는 횃불이라도 들려주고 싶었다. 활활 타서 재만 남은 이곳을 상상하자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때, 대공비의 침실 문이 사납게 열렸다. 비웃음을 머금은 비앙카였다.
“네 팔자도 더럽게 사납구나. 남의 자리를 탐내더니 참 꼴도 좋지.”
비난을 퍼붓던 얼굴은 내 차림새를 보자마자 확연히 굳어졌다. 아까와 같은 상복이 아닌, 화려한 대공비의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비앙카는 저항할 새도 없이 내 앞섶을 힘으로 잡아 뜯었다.
“감히 아드리엔이 땅에 묻히는 날. 이런 거나 주워 입고. 도대체 어디까지 천박해질 작정이야?”
나는 말없이 그리운 비앙카를 응시했다. 비앙카는 사나운 목소리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흔들리는 눈이었다.
“이제 보니 아드리엔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끌려나간 노에비안, 그 개잡놈이 왜 네게 그랬는지 이해가 가네. 껍데기 하나만은 소름 끼칠 만큼 우리 리엔을 닮았구나.”
비앙카는 내 몸에서 아드리엔의 흔적을 벗겨내며 뇌까렸다.
“……제가 아드리엔이라면 믿으실래요?”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비앙카는 큰 모욕이라도 받은 듯 얼굴빛이 변했다. 검 하나를 쥐여주면 그대로 내 심장을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은 살기였다.
“감히…….”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비앙카의 눈은 실핏줄이 터질 것처럼 붉게 올라왔다. 그녀가 분을 이기지 못해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뺨이 아프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뺨을 부여잡고 쓰러진 요나와 열린 침실 문 앞의 마지가 보였다. 대공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듯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요, 요나야!”
마지가 낮게 소리치며 요나에게 달려왔다. 이번엔 비앙카 역시 움찔했다. 비앙카는 여전히 들고 있는 손으로 주먹을 꾹 쥐고는 요나를 외면하고 나를 쏘아보았다.
“믿겠냐고? 아니. 네가 내 사돈의 팔촌의 이름을 줄줄 읊는다고 해도, 절대.”
즉답이었다.
“감히, 더러운 입에 다시는 그 귀한 이름 담지 마. 용서해서가 아니라 그따위로밖에 살지 못해 결국엔 바닥에 추락할 것을 아니까 그냥 두고 가는 것도 잊지 말고.”
요나가 비척비척 기어와 다시 내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다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마.”
비앙카는 요나와 나를 번갈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침실을 나가버렸다. 마지가 얼른 와서 내게 외투를 걸쳐주었다. 나를 경멸하는 비앙카의 얼굴이라도, 나는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그녀의 말처럼 블리에의 몸으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날 일은 아마 다신 없을지도 모르니까.
“……요나, 괜찮니?”
“네, 마님. 다치지 않으셨어요?”
요나는 뺨이 시뻘겋게 부어있으면서도 내 걱정만 했다. 별달리 잘해준 것도 없는 하녀가 날 위해 몸을 던졌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꺄아아악! 이거 놓지 못해? 이거 놔! 도대체 뭐야?!”
걱정스레 손을 뻗자마자, 귓전으로 갑작스러운 비명이 떨어졌다. 나는 마지에게 요나부터 챙기라 이르고 조용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대공비 아드리엔의 물건을 동부로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된 동부 사람들과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대공 노에비안을 위해 보낼 물건을 챙기는 가스팔. 어수선한 가운데 가장 시끄러운 곳은 바로 내가 나온 침실의 옆방인, 노에비안의 침실이었다. *** 애니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귀부인 중에선 제 하녀나 시녀를 남편의 침실로 밀어 넣고 알아서 처신하게 한다는 말도 들어본 적 있었다. 이런 게 그런 걸까? 카스타냐 공작이 2년 전 제게 약속한 차기 대공비 자리는 이미 물 건너갔다. 가신 가문 중 하나의 양녀로 입적 시켜, 귀족 신분을 회복시켜주겠다던 달콤한 제안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 어찌어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던 일들도 모조리 보류되고,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복병이 나타나 저택을 헤집었다. 애니 역시 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곁에 끼고 지내던 하녀들을 다 물리고 제게만 죽은 대공비의 드레스룸을 마음껏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한 블리에를 생각하자 감사한 마음마저 일었다. 하지만 애니는 그 여자의 바람대로 호락호락하게 순종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대공 노에비안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주인을 침실에서 위로해드릴 생각에 애니는 넓은 욕실에서 정성껏 몸을 씻고 있었다. 불행히도, 욕실은 지나치게 방음이 잘 되어 있는 곳이라 그녀는 대공저 내의 소란을 전혀 듣지 못했다. 몸단장을 끝내고, 옷을 혼자 낑낑대며 꿰어입자마자 화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꺄아아악! 이거 놓지 못해? 이거 놔! 도대체 뭐야?!”
제멋대로 열린 대공의 침실로 우르르 들어온 사람들이 우악스럽게 자신을 끌고 나가 패대기쳤다.
“……무슨 일이죠?”
“부, 부인! 부인!”
“맙소사.”
애니는 바로 옆 침실에서 나오는 블리에를 향해 기어갔다. 블리에는 언더드레스 차림에, 외투만 어깨에 걸친 상태였지만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가,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분들이 아니에요,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의 친인척분들이시죠.”
사람들의 서슬 퍼런 시선이 애니에게 쏟아졌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저 여자에게 꽂혔던 싸늘한 시선이었다. 애니는 그제야 어수선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제집처럼 들쑤시고 다니는 동부 사람들과 중무장을 하고 온 기사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여자는 또 뭔가? 도대체 집안 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 아드리엔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대공의 침실에!”
동부 귀족들의 소란에 애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블리에 아카시아를 보았다. 간절히 두 손을 모으고서.
“애니, 장례식 마무리를 도우라 명했더니 도대체 왜 대공 전하의 침실에서 나오는 거니?”
“……부인?”
“그 차림은 또 뭐고…….”
“그, 그게 무슨! 분명 부인이 제게…….”
“설마, 대공비 전하의 장례 마지막 날…… 대공 전하를 유혹하기라도 하려는 거였니?”
경악하는 여자의 얼굴은 악마나 다름없었다.
“집사, 이 아이가 대공 전하를 모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원대로 해주게나.”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는 가스팔이 뭐라 하기도 전에, 대공저를 점거해 들쑤시던 기사들이 애니의 양팔을 붙잡았다.
“말도 안 돼! 이거 놔! 도대체 뭐야! 대,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죠? 감히 대공 전하의 저택에서……!”
“애니, 이 가엾은 것. 대공께서는 지금 죄를 지어 북방 어느 구석으로 향하고 계시단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숙덕대는 동부 사람들의 말소리가 그제야 귓전을 괴롭혔다.
‘죄인 노에비안 트로비카.’
‘황태자께서도 그를 버리실 수밖에…….’
‘침실에 도대체 몇 명의 여자를 들인…….’
애니는 제게 걸어오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것을 보듯 두 눈 가득 동정을 담은 여자가 양팔이 붙들린 애니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대공의 곁에 있고 싶다며?”
“!”
“네 소원을 내가 이루어주려는데, 뭐가 불만이니?”
소름 끼칠 만큼 낮게 속삭이곤 제 귀에서 떨어져 나간 여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애니는 떨리는 눈으로 제게서 멀어지는 여자를 서서히 올려다보았다. 언더드레스만 입고, 흐트러진 매무새로 겨우겨우 외투만 걸쳐 입은 여자는 얼핏 보면 가련해 보였다. 하지만…….
‘……미친 여자.’
애니를 지옥 불에 처넣고 말겠다는 의지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는 여자의 연녹빛눈에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