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마님은 원래…….2022.02.05.
손에 들린 보고서를 읽을수록 황제는 황당했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했다.
“로안, 네가 말해봐라.”
황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황태자와 달리, 빳빳이 고개를 들고 넋이 나가 있는 로아드네스를 불렀다.
“아버지, 제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 대공을 치자고 말했을 리 없다. 분명 로아드네스가 뭔가 수틀리는 일이 있었겠지.”
황제는 보고서를 빠른 시선으로 죽 훑어내리며 혀를 쯧 찼다. 하지만 그도 잠시,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대한 보고를 읽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인을 찾았느냐?!”
“아마 죽었을 겁니다.”
“로안!!”
황제가 경악했다.
“보고서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근거지 비슷한 곳을 찾았고 대공 노에비안의 가신, 아카시아 백작 소유의 땅에서 지하 감옥이 발견됐습니다. 그곳의 간수들은 이미 모두 도망간 상태이고 납치당했던 로터스 남작 부인의 증언이 일관적입니다.”
황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시신…… 시신은 찾았나.”
“근방을 수색 중입니다. 이 사건은 부인의 시신을 찾으면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진정 대공이 그랬단 말인가. 어째서?”
“황실에 충성하는 자이니, 아버지의 부정이 알려진 순간부터 황실의 위신을 생각해 부인을 제거한 게 아니겠습니까.”
“로안!”
황제의 충격 어린 눈이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함과 동시에, 잠자코 있던 황태자가 말리듯 소리쳤다. 황제는 굳은 채 입만 벙긋거리며 연달은 충격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처리한 겁니다. 대공의 명예 하나만 더럽히면 아버지께서는 깨끗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재판을 열고, 시간을 끌면 아버지의 정부에 대한 소문만 더 무성해질 겁니다.”
“로안, 로안 그만해라.”
황태자가 로아드네스를 말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표정이 지나치게 창백했기 때문이다.
“……네 이토록 아비의 가슴에 못을 박고, 원하는 게 무엇이냐. 네가 원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냐? 오냐, 허락하마. 네가 누구와 맺어지길 원하든 이 아비는 관여치 않겠다.”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대로 시신을 찾으면 사건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로아드네스가 그 말을 끝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황제를 두고 알현실을 나가버렸다. 갈팡질팡하던 바르데날도가 급히 로아드네스를 따라 나왔다.
“로안……!”
로아드네스가 어두운 복도 한가운데 우뚝 섰다.
“……고맙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인사였다. 로아드네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올린 보고서에 대공 노에비안을 구금시킨 이유를 쿠로세다 남작 부인 사건에 혐의점이 보여서라고 뭉뚱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서부로 반란군을 보낸 사실이 보고서로 남겨지면, 서부에서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다.
“네가 나를 위해 모든 비난을 받고 있는데, 나는 너를…….”
“아무 말씀 하지 마십시오.”
울먹이는 황태자를 보며, 로아드네스가 차게 말했다.
“형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머니를 위해서지.”
레티나 황후의 유일한 오점. 황실의 돌연변이. 모든 비난을 지우고 레티나 황후를 황제의 어머니로 빛나게 만들어줄 사람이 로아드네스의 앞에 있었다.
“……로안.”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드리엔이 살아 있다고 바르데날도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은 자신이 아드리엔에게 용서를 빌며 사는 수밖엔 없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물음에도, 감히 아드리엔을 달라 청할 수 없었다. 아드리엔이 여전히 저를 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로아드네스는 바르데날도에게 등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갔다.
*** 욕탕에 받아진 뜨거운 물 위로 김이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나는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욕탕에 몸을 담갔다. 백작저로 먼저 돌아가 있으라 등을 떠밀어도 마지와 요나는 대공저에 남아 나를 돌보고자 했다.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조사를 위해 수도경비대로 가게 되었다.
“집사 표정 보셨어요, 마님? 10년은 늙어 보이던데요.”
“마님한테 치근덕거리지만 않으면 다행이에요.”
“맙소사, 그 능글거리는 놈이 감히 마님께?”
“몰라요, 느낌이 그래요.”
나는 잠자코 그들이 집사 가스팔을 씹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사 가스팔은 가장 먼저 조사를 받고 돌아온 사용인이었다. 그는 서슬 퍼런 내 기세에 얼떨결에 동조해 울부짖는 애니를 대공의 물건 몇 가지와 함께 북부로 보내버렸다. 말이 보내는 거지, 대공저에서 내쳐지는 것이었다. 애니가 카스타냐 공작의 사람인 것을 그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뒷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애니가 속절없이 끌려가자 가스팔은 창백하게 질려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처럼 있는 나를 그냥 두고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을 보니 겁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집사 가스팔은 황태자의 사람이겠지.’
금방 조사를 받고 나온 것이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이어도 애써 침착한 척을 하는 걸 보면 황태자 정도는 뒷배에 두고 있어야 가능했다. 게다가 그동안 너무 티 나게 황태자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의 시중을 들었으니. 아. 너무 많은 일이 있어 겨우 밀어두었던 이름이 떠오르자 두통이 찾아왔다.
‘내가 없는 이 대공저에서 당신을 죽였다면 분명…… 황태자 바르데날도.’
‘황태자 바르데날도뿐이야.’
촤아악-!
“마님!”
“……미안.”
물 위로 떠오르는 노에비안의 속삭이는 얼굴을 쳐버리자 온 사방에 물이 튀었다. 마지가 투덜대며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까 비앙카에게 얻어맞은 요나의 얼굴에 바를 약도 얻어오겠다며 욕실문을 나섰다. 마지가 나가자, 요나가 내 두피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나는 낮게 한숨 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그동안 수없이 나를 기만했고, 속여왔다. 그 남자가 한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어쩔 수 없었다. 아드리엔을 사랑한다. 블리에는 대용품일 뿐이다. 황태자가 당신과 결혼하라 종용했지만 결국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불편한 진실들이 내 마음을 꽉 채우고 생채기를 냈다.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이고 싶은 게 없었다. 불현듯, 이 제국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던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노에비안의 말대로 모든 원흉은 황태자이고, 그 역시 그 피해자일 뿐이라면 나는 대의에 의해 희생된 제물인 걸까. 어쩔 수 없었으니 노에비안의 말도 받아들이고, 황태자에게는 대의가 있으니 그의 결정도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내게는 형님이 한 분 계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자 내가 인생을 걸고 지켜야 할 사람.] 어릴 적 로아드네스의 편지에 늘 등장하던 다정하고 존경하는 형님. 로아드네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그는 황태자를 신뢰하니 노에비안의 말을 믿지 말라 하겠지만, 내 죽음에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내 불행의 시작이었던 결혼은 황태자가 원인인데. 노에비안만 벌을 받으면. 그 또한 나만큼 절망할 수 있다면. 그가 평생을 일궈놓은 명예를 무너뜨리면 그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검으로 심장을 몇 번을 찌른다 해도, 그 명예를 다 떠안고 죽는 노에비안은 절망하지 않을 테니까. 명예를 잃고, 수치스럽게, 황족답지 않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를 가장 비참하고 잔인하게 죽이는 길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가장 믿었던 모든 이들에게 배신당하게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찝찝할까. 어째서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을까. 정말 노에비안의 말대로…….
‘……황태자가 날 죽인 것이라면 어떡하지?’
노에비안과는 달리, 황태자에게는 배신감보다는 황당함이 느껴져서일까. 황태자에 대한 원망보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더 먼저 떠올랐다. 말해주고 싶었다. 저번에 타이밍이 맞지 않아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던 ‘보고 싶었다’는 말을. 노에비안에 의해 빼앗겼던 그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살아볼 날에 대입해 상상해보았다. 만약에 우리가 제대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내가 노에비안을 단 한 번이라도 의심했었더라면. 첫 춤을 추는 우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을 로아드네스의 눈과 단 한 번이라도 마주쳤더라면. 그런 상상을 들으면 로아드네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잠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오히려 내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조용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로아드네스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노에비안이, 날 죽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네 형님이래. 그래서 네 형님을 조사해보고 싶어. 도와줄래? 로아드네스가 도와주어도, 혹은 도와주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겠지. 로아드네스에게 그의 형님인지, 나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모양새가 될 테니까. 그에게 그런 부담을 지울 자격이 내게는 없다.
‘블리에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블리에가 내게 확인하라던 그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노에비안이 황태자의 사주를 받아 마음에도 없던 나와 혼인한 것? 아니면 황태자가 내 죽음에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알려줄 거라면 일기장에 계속 좀 써주지.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오늘은 쉬자. 오늘만 쉬자. 너무 힘겹게 달려왔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좀 쉬고 싶었다.
“마님, 고단하시죠?”
“……응. 요나 네게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예쁜 얼굴에…… 때가 되면 내가 불렀을 텐데 뭐 하러 왔어.”
“사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온 것도 있지만, 마님의 머리 손질을 해드리러 왔지요.”
요나가 부끄러운 듯 뺨을 긁적이더니 언제 준비해왔는지 늘 나를 관리해주던 것들을 섞기 시작했다.
“머리 손질은 언제든 할 수 있잖니.”
나는 부스스 웃으며 그녀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익숙한 손길이 나를 만져주니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보세요, 벌써 이렇게나 색깔이 올라온걸요. 정해진 날짜에서 하루가 지나면 뿌리에서 티가 나고, 이틀이면 물에 닿자마자 마법처럼 원래 색으로 돌아온다고 하셨잖아요. 오늘이 벌써 이틀 차라고요.”
요나에게서 묘한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자기 무슨 말이니?”
“마님께서 보내셔서 간 게 아니라, 대공저에는 재료가 없어서 언제고 백작저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생각했던 차였어요.”
“요나야?”
순진무구한 요나의 얼굴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묘한 오싹함에 벽면에 걸린 거울로 눈을 돌렸다.
“……!”
욕탕 안에 몸을 기대 몸을 살짝 뒤로 젖힌 내…… 아니 블리에의 모습.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요나야, 도대체…… 이게 뭐야?”
요나의 말대로,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끝까지 금발로 바뀌고 있었다. 마치 마법 같았다. 나는 머리털이 삐죽 솟을 만큼 소름이 돋았다. 욕탕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을 향해 정신없이 다가갔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블리에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본래 내 머리카락과 똑같은 금발로 반짝이고 있었다.
“요나야, 요나…… 요나야?”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 뒤쪽을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붙잡고 있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왜 그러세요, 마님?”
요나가 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꼭 붙들어 주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는 목덜미를 느끼며 느릿하게 요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님은 원래, 금발이시잖아요.”
해맑게 웃고 있는 요나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