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보고 싶었어2022.02.16.
도대체 나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길래, 그는 매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형님에 대한 의심을 다 털어내야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전력을 다해 도울게.”
도망치지 마. 버리지 마. 제발, 나를 버리지만 마. 돌고 돌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매번 내게 이런 식으로 애원하기에 급급했다. 그게 내 가슴을 사정없이 망가뜨렸다. 내가 죽어가던 이 침실에 로아드네스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루 같았다. 나는 잠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런 적막이 더 힘들다는 듯 로아드네스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블리에 아카시아와 털끝 하나라도 닿는 게 싫다고 하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게. 이 정도 거리여도 좋아.”
로아드네스는 겨우 한 발짝도 채 남지 않은 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친구로 지낸다고 해도, 나는 평생을 혼자 살 거야.”
일국의 황자로서는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을 서슴없이 하면서. 친구. 그 역시 우리 사이에서 미래를 그려보려면 풀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딱 이 정도 거리만큼 네게 다가갈 수 있는 거야. 널 지키고. 널 보면서.”
로아드네스는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나를 응시하다가 못 견디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정말 서슴없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너무 놀라 멈춰 있다가 황급히 그를 따라 꿇어앉았다. 로아드네스는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이미 울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말만은 하지 마.”
맙소사. 내가 어떻게 감히, 그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 도망가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던 남자에게 당당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더 없이 진심이었다. 나를 숨 쉬게 하는 모든 장기가 쥐어짜듯 아파왔다. 괴로웠다. 내가 그에게 고작 도망자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 같아서.
“안.”
“날…….”
“안, 이러지 마.”
“……날 버리지만 마.”
흥분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노에비안의 피가 식지도 않은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로아드네스가 말리려 뻗은 내 손을 잡아 제 뺨을 감쌌다. 손 아래 느껴지는 그의 여윈 뺨이 결국 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위고, 떨고 있는 가엾은 뺨이 내 손바닥을 찌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로아드네스의 시뻘게진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그토록 강하고, 거칠 것 없는 사람이. 내게 이럴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 죽어버린 여자의 가짜 껍데기에 애원하며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 울고 있었다. 끼이이이잉-! 낑! 낑!! 코완이 우리에게 달려오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 목줄이 묶인 침대 기둥이 뽑힐 만큼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에게 시선을 빼앗기기는커녕 로아드네스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흐느끼는 그를 향해 나는 여전히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뜨거운 눈물이 내 손을 흠뻑 적셨다. 그의 눈에서 쉼 없이 눈물이 쏟아질 때마다, 나는 심장이 검으로 얇게 저며지는 고통을 느꼈다. 아,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로아드네스가 안쓰러웠을까. 언제부터 그를 이토록 안고 싶었을까. 그에게 빼앗기지 않은 손을 꽉 쥐었다. 차마 내 눈도 보지 못하고 울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너 정말 바보구나.”
한참 만에 뗀 입에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에게 꽉 붙들린 손으로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왜 너 혼자 나를 원하고, 바라는 것처럼 이래.”
로아드네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 그쳤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 변화만으로,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에게 괜한 기대를 하게 해서, 훗날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순 없었다. 노에비안만 제거하면, 나 역시 너와의 미래를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말은 절대 해줄 수 없었다. 황태자를 조사해, 만에 하나라도 내 죽음과 관련이 있단 걸 밝히는 순간.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진실을 밝힐 수만 있다면, 블리에의 육체를 버릴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더 이상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쏟아지는 진실에 멍해져 있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황태자는 물론 도리스도 조사하고 싶었다.
‘우리 사이에 얽힌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나는 뺨을 어루만지는 내 손을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가엾게 보았다. 로아드네스는 내 입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나온 이후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방랑자처럼 집요하게 내 입을 응시했다. 방금 내뱉은 말이 형체를 가지고 허공에 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노에비안의 고백 이후, 나는 로아드네스와 내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내가 로아드네스에게 내 정체를 밝혔던 그때부터 미뤄두었던 고민이기도 했다. 지금의 내 상황에, 로아드네스와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가. 황태자와 엮이면서 그와의 미래는 더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로아드네스가 이토록 나를 붙잡는 이유는, 내가 그와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 일 것이다. 나는 비밀을 파헤치는 걸 멈추지 않을 거고, 틀림없이 로아드네스가 가장 사랑하는 형님을 건들 수밖에 없을 테다. 그리되면 그는 황태자와 내 사이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건 내게도 고통이겠지. 하지만, 로아드네스가 그것들을 다 제쳐놓고 이렇게 진심으로 애원하는데. 나만 비겁하게 이 관계를 뒤로 할 수 있나?
‘나는 겨우 가면 따위에 속아 너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너는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 있는 나를 결국 알아보았지.’
‘네가 좋아.’
‘내가 어떤 몸에 들어가 있어도, 아드리엔이라 상관없다는 네가, 나는 좋아.’
차마 고백할 수 없는 말들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거대한 진심을 나 역시 끌어안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에게 사랑을 말하기엔 이르더라도, 적어도 나 역시 떨어져 있는 내내 네가 그리웠다고. 네 곁에 있고 싶었고, 네게 의지하고 싶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책임지지 못할 말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하지만, 하지만 울고 있는 남자에게 이 정도 진심은 괜찮지 않을까?
“보고 싶었어, 로안.”
그게 뭐가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그의 이름까지 뱉어내는 동안, 단전은 무거운 추를 매단 듯 무거웠다. 하지만 머리는 이상하게 상쾌했다.
로아드네스는 한동안 멍하니 내 얼굴을 보다가, 짧게 탄식했다.
“친구, 친구라도…… 보고 싶을 수는 있잖아.”
친구라는 단어에 숨어 전하는 진심이었지만 내겐 그조차도 큰 용기였다. 하지만 비겁하게 꺼낸 내 변명 따윈 들리지 않는 듯.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의 젖은 눈이 오랫동안 기도했던 소원에 응답이라도 받은 듯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뜨거운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를 끌어안았다. 어깨가 너무 넓어도 문제였다. 등을 다 감싸 안지도 못해 바르작대다가 겨우 자세를 잡을 무렵, 나는 순식간에 로아드네스의 품에 빨려 들어갔다. 뒷목과 허리를 바짝 끌어당긴 로아드네스가 무릎을 세워 앉아 온 힘을 다해 나를 끌어안았다. 졸지에 그가 일어난 만큼 딸려 올라간 나는 속절없이 그의 품에 푹 파묻혔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로아드네스가 뜨겁게 울고 있었다.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남자는 이를 악물고 비명 같은 울음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나는 감히 밀어내지도 못하고, 터질 것 같이 두근대는 그의 심장에 손바닥을 올려놓은 채로 울음을 삼켰다. 낑-! 끼이이이잉-! 주인의 이상 행동에 함께 날뛰던 코완이 결국에는 목줄을 끊고 우리에게 달려와 앞발과 코로 사정없이 로아드네스를 퍽! 퍽! 쳐댔다. 그가 나를 압사시켜 죽일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헥헥대는 개가 신경 쓰일 법한 데도, 로아드네스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였다. 내 다리에서 슬슬 쥐가 나고, 목덜미가 너무 젖어 한기를 느낄 때쯤이었다. 단단한 가슴을 살짝 밀어내기가 무섭게 나는 다시 로아드네스의 품에 꽉 안겼다. 쥐어짜듯 나를 품에 안은 로아드네스는 젖은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조금 거칠게 내 목덜미에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너무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몸을 후드득 떨었다. 이상하게, 그는 더 이상 울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든 로아드네스는, 내 머리통을 제 가슴에 박아넣듯 꽉 누르고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구제 불능이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코완을 가볍게 무시한 로아드네스의 입이 열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 상황에…….”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가 내게 옮은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내 가슴 역시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때였다.
“네가 가장 괴로울 이 상황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전히 내 뒤통수를 꾹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이 벅차.”
새벽달을 품은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차가운 빛으로 빛났지만, 동시에 떠오르는 태양같이 밝았다.
“고작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단것을 먹은 것처럼 달아.”
나는 이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달아. 아드리엔.”
손끝을 타고 전달되는 그의 벅찬 심장 소리가 마른 풀밭에 붙어버린 들불처럼 내 온몸에 옮겨붙은 것 같았다. ***
“그리 처리되었습니다.”
황태자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던 도리스는 들어 올린 찻잔으로 입꼬리를 가렸다. 혀를 깨물지 않았다면 아마 황태자비 궁이 떠나가라 웃고 말았을 것이다. 주세타 자작 부인에게 들은 바로는, 노에비안 트로비카에 대한 평판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황제의 정부를 납치해, 살해한 책사라니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었다.
“나는 부인에게 충실할 겁니다. 우리의 앞길을 위해, 부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전하.”
도리스 역시, 괜스레 카스타냐 공작을 자극해 유난을 떨기보단 봐준다는 듯 넘어가는 게 좋았다. 대공이 바보도 아니고, 드넓은 서부에서 카스타냐 직할 영지에 마물이나 반란군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그 즉시 조사에 착수해 꼬리라도 밟히는 날엔 무슨 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가끔 마물 몇 마리가 넘어와 피해를 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카스타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지는 안전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가끔 고개를 쳐들던 몇몇 원로 가신들이 희생되었으니 어떤 부분에선 고맙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전하께서 제 남편이라는 게, 저는 이제야 실감이 나요.”
“…….”
“합방은 언제로 날을 잡을까요?”
내친김에 내뱉은 합방이라는 말에, 황태자의 눈이 잘게 떨렸다. 부모 잃은 아이처럼 가련한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제가 준비되는 대로, 좋은 날을 받아 전하를 모시지요.”
황태자의 대답은 더 이상 도리스에게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