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엘라콘 왕자2022.02.26.
장난기 어린 눈빛의 9황자 곁에는 그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사내가 있었다.
‘엘라콘에서 온 수행원인가?’
론타인들보다 짙은 피부색. 잿빛 눈동자. 건장한 몸.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분홍색의 짧은 머리카락은 군인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역시 에페로만큼이나 손이며 팔목에 장신구가 많았다. 보석이 돌처럼 굴러다니는 나라에서 온 사람다웠다. 잠깐 휘황찬란한 행색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는데, 그 눈 깜짝할 사이에 분홍 머리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황태자가 그를 소개하기 위해 입을 뗀 순간이었다.
“그분은 엘라콘의…….”
“여자. 당신. 유명하다. 엘라콘에서.”
엥. 서툰 제국어가 투박하게 내 앞에 툭, 던져졌다.
“……네?”
“여자. 당신. 좋아한다. 엘라콘. 사람들.”
“아……?”
당황해서 입만 뻐끔대는데, 분홍 머리에 곰처럼 거대한 남자는 스스럼없이 곧바로 내 어깨를 꽉 붙들고 양볼에 뺨을 연달아 맞대며 쪽 소리를 냈다.
“되고 싶다. 좋은 관계.”
분명 내 눈앞에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건 황태자인데. 로아드네스가 있는 뒤쪽에서 굳이 보지 않아도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빅토르. 론타에서 그런 인사는 친한 사이가 아니면 못한다니까.”
“안 몰랐다.”
안다는 건가, 몰랐다는 건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잠깐 뒤로 물러서자, 등 뒤로 뜨겁고 단단한 몸이 바로 느껴졌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로아드네스가 내 등에 몸을 딱 붙인 채 눈앞의 빅토르라 불린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누굽니까, 저 무례한 사람.”
“형님, 이 에페로는 보이지 않습니까?”
로아드네스는 황태자에게 물었는데, 에페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나치게 잘 보이는군. 옆에 달고 온 놈은 누구냐, 네가 데려온 애완견인가?”
애완견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분홍 머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페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실례했습니다, 귀부인께. 이놈은 엘라콘에서 온 빅토르 반셰이크라 합니다.”
반셰이크!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분홍 머리를 살폈다.
“엘라콘 왕자이자, 제가 유학하는 내내 친하게 지낸 친우이기도 합니다.”
9황자 에페로가 엘라콘 왕자를 데리고 귀국했단 말이었다.
“로아드네스 형님. 형님도 함께 오신 분을 소개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페로의 느물거리는 말투는 시정잡배 같기도 했는데, 내용만은 공손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제국 사정을 잘 아는 자들 말로는, 그 부인께서 형님의 이거라던데…….”
그가 살짝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손 마디마다 끼워진 알이 큰 보석 반지가 번쩍거렸다. 도저히 일국의 황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벼운 행동이었다. 로아드네스의 안면 근육이 불쾌함을 담아 일그러졌다.
“에페로, 너 이 새…….”
“죄송하지만, 2황자 전하와 저는 친구 사이랍니다. 9황자 전하.”
나는 말도 안 되게 무례한 에페로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나서자 에페로는 의외라는 듯 스크래치가 살짝 난 눈썹을 쑥 들어 보이더니 조소했다. 마치, 귀부인과 황자가 어찌 ‘친구’가 될 수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나?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가만히 있자 내내 대화에 끼고 싶어 하던 빅토르가 불쑥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는 거대한 몸을 구부려 내 얼굴에 바짝 제 얼굴을 들이대더니 보석을 감정하듯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해 못 한다. 여자. 아름다운. 어떻게 친구?”
-“로아드네스 2황자. 나. 우리. 친구.”
나는 빅토르의 잿빛 눈동자를 정확히 보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엘라콘어를 사용해 응수했다. 내 엘라콘어 회화 실력은 아직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 분홍 머리 곰 왕자와 놀랍도록 비슷한 수준이었다. 빅토르의 얇은 쌍꺼풀이 진 눈이 몇 번 느리게 끔뻑거렸다. 그는 이윽고 이 알현실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9황자는 그게 꽤 놀라운 일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당신. 마음에 들어온다. 나도. 친구.”
“싫은데.”
대답은 내 입이 아닌, 내 정수리 위에서 쏟아졌다. 내 팔을 꼭 붙든 로아드네스가 순식간에 나를 제 뒤로 감추다시피 끌어왔다. 휘청일 틈도 없이 단단한 힘이었다. 곰 같은 엘라콘 왕자만큼이나 거대한 몸이 곧바로 내 앞에 벽처럼 우뚝 섰다.
“론타에서는 친구,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거든. 왕자.”
뒷짐 진 채 내 팔을 붙든 로아드네스를 뿌리치고 앞을 보려 해도, 그가 힘을 꽉 주고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전하!”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낮게 소리쳤는데도, 로아드네스는 꿈쩍도 안 했다.
“오-. 형님께서 그런 얼굴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안 그렇습니까, 바르데날도 형님?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는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와서 느긋이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연락 한 통 안 하더니, 왜 갑자기 와서 행패지?”
황태자 대신 로아드네스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아버지의 탄신일이 코앞인데 어찌 얼굴 한 번 안 비추냐고 바르데날도 형님과 숙부께서 어찌나 성화이신지 못 이기는 척 와봤습니다.”
“……숙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로아드네스가 곧장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는 기가 완전히 빨린 얼굴이었다. 차마 에페로에게 왜 왔냐고 따질 수도, 북방에 처박힌 대공을 탓할 수도 없으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로아드네스의 널따란 등을 방패 삼아 슬쩍 웃었다. 황태자가 저리 나올 줄 알고 수를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에비안을 버림으로써 서부와 동부의 마음을 동시에 얻었지만, 귀족파의 희망인 에페로가 오게 되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9황자는 현 황후 그레이스의 적자이자, 친엘라콘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제국은 엘라콘을 제 아래로 깔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군사력 증강에 힘을 쓰는 엘라콘을 그저 작은 나라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몇 년 전 엘라콘과의 군사적 마찰에서도 한 번 대패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9황자 에페로는 그런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엘라콘은 제국에게 분쟁지역의 대형 보석 광산을, 제국에서는 현황후의 적자인 어린 9황자 에페로를 엘라콘으로 유학을 보내며 새로운 친선을 도모하고자 했다. 약간은 굴욕적이기까지 했던 교환은 9황자 에페로가 엘라콘에 생각보다 잘 적응해, 그쪽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버리며 상황이 바뀌었다. 론타와 엘라콘 사이의 친선은 더더욱 강화되었고, 그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린 에페로 황자가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황태자파는 그것을 빌미로 9황자가 황태자 자리를 노릴까 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조급해 보이는 순간 대공도 없는 지금, 황태자파가 동요할 게 뻔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이 힘든 시기. 완전한 제 사람을 에페로의 옆에 붙이면 주변에선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테고, 완전한 귀족파의 사람을 에페로의 옆에 붙여두면 황태자 본인이 불안할 테다. 빼꼼 고개만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로아드네스의 팔을 세게 꼬집고 그가 움찔하는 사이 겨우 몸을 밖으로 내보냈다.
“황태자 전하, 혹시 오늘 저를 이리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부인께 에페로의 수행을 좀 맡아달라 부탁하려 합니다.”
사내가 아닌 여인. 미혼이 아닌 기혼의 귀부인. 엘라콘 사신단을 맞이해 성공적으로 환영식을 열어 유명해진 사람. 황태자비의 시녀이자 동시에 황태자가 내친 대공의 아내가 될 뻔한 사람. 모호한 포지션에 있는 나만큼 적임자도 찾기 힘들었다. 에페로가 가뜩이나 대충 넘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씨익 웃었다.
“내가 특별히 부탁했어요. 같이 다녀야 하는 이 분홍색 곰 같은 인간이 꼭 부인을 만나보고 싶다고도 하고, 형님의 애인이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말이에요.”
그리고 대놓고 에페로를 지지한다 나설 만한 간 큰 귀족은 드물 테니 에페로 역시 엘라콘 사신들과 친분을 쌓은 나를 찾아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에페로. 엘라콘에서 엘라콘어는 안 배우고 짖는 법만 배웠느냐.”
에페로는 끼어드는 로아드네스의 서늘한 목소리를 가벼운 윙크로 응수했다. 하지만 그 상큼한 표정이 로아드네스의 화를 더 돋우었다.
“황궁에 널린 게 네 놈 새끼를 수행할 사람이다, 괜한 사람을…….”
나는 검이라도 빼어들 기세인 로아드네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거친 두 아우 사이에서 창백하게 질린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옮겨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전하의 보좌관으로서 부탁하시는 걸까요?”
나는 눈으로 정확히 내 의사를 전달했다. 내 도움이 필요할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던 그날의 그 눈빛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가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하게 한숨처럼 내뱉었다. 나는 내 안의 온갖 다정함을 끌어모아 미소 지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 되기 위해 불러들인 에페로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탁. 잘.”
곁에 딸려온 엘라콘 왕자는 예정에 없던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황태자궁을 나서기 전, 황태자는 직접 우리를 배웅하며 부디 에페로는 물론, 엘라콘 왕자에게 최대한 편의를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황태자의 부탁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로아드네스였다. 대공저로 함께 돌아가는 내내, 로아드네스는 말을 붙이기 어려울 만큼 굳은 표정이었다.
“……친구, 그거 아무하고나 하는 겁니까?”
한참 굳은 얼굴로 애꿎은 창밖만 바라보던 로아드네스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엘라콘의 왕자라면 친구로 두면 좋은 사람이지요. 지금 제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황태자의 보좌관이 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지만, 에페로가 데려온 빅토르 왕자는 내게 좋은 변수였다.
“어쩌면…… 블리에에 대해서 더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망설이다가 겨우 말했는데, 로아드네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불만이 많아 보이던 미간이 찌푸려질 듯 말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블리에가 엘라콘 출신의 주술사였대요. 여기서 전하와 제가 아무리 조사한다고 한들, 블리에에 대해서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겠죠. 빅토르 반셰이크와 친하게 지내면 엘라콘 쪽을 좀 더 조사할 수 있을지 몰라요. 게다가 황태자 전하 역시 지금은 제 도움이 필요하신 듯 보이니 황태자 전하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맡기신 일을 수행하려고요.”
황태자는 바로 이틀 뒤에 열리는 그들의 환영식을 내게 맡겼다. 본래 이런 일은 내궁을 살피는 황후와 황태자비의 소관이었지만, 워낙 갑작스러워 큰 규모로 준비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그들은 이미 코앞에 둔 황제 폐하의 탄신연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도리스가 열 좀 받겠네.’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장은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 환영식을 내가 꾸몄다는 걸 아는 순간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제 시녀가 아닌,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말이지.’
바삐 돌아가는 머리만큼 나는 침묵했는데, 얼마나 집중했는지 마차가 멈추고도 한참을 있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바빠 보입니다.”
“아, 언제 도착했어요? 맙소사, 할 일이 태산인데 오늘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로아드네스는 내가 정신을 차린 걸 인지했으면서도 마차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 전하께서도 바로 환궁하셔야겠지요?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지만, 환영식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요.”
마음이 급해져서 하는 변명에도 로아드네스는 턱을 들고 나를 가만히 보고 있기만 했다. 조용하니 더 불안하네.
“……하실, 말씀이라도?”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날씨는 분명 추운데, 그의 시선은 무척 집요하고 뜨거웠다. 나는 괜스레 긴장해서 두르고 있던 털 망토 앞을 꼭 여몄다. 로아드네스의 짙은 시선이 곧바로 그곳에 따라붙었다.
“무, 무슨 할 말이요……?”
“나한테 몰래 뽀…… 그거하고 도망간 거.”
아. 수면 아래에서 끓는 물처럼, 고요하고 뜨거운 시선이 내 입술을 핥듯이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