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그래서 했어요, 뽀뽀2022.03.02.
꼭 듣고야 말겠다는 진득한 의지가 이상하리만치 야릇하게 느껴졌다. 내가 미쳤나. 뽀뽀라는 단어 하나조차 제대로 내뱉지도 못한 남자를 상대로…….
“맞아요. 전하가 저한테 엘라콘어를 따라 쓰라고 시켜놓곤 잠들었을 때…… 그때 가면이 살짝 비뚤어진 사이로 입술이 보였어요.”
꾹 다물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내 눈 가득 박혀 들어왔다. 쿵-. 쿵-. 쿵-. 쿵-.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심장 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꿈결처럼 느릿하게 묻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심장 소리와 함께 내 귀를 갉작였다.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뱉어내는 입술은 도톰하고 예쁜 색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햇살 아래 반짝이던 입술은 내 또래의 소년이 가졌다기엔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다. 나는 괜스레 입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했는데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자. 어린 날의 충동으로 한 가벼운 실수처럼. 어찌 보면 실수가 맞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작은 접촉 사고였다. 그냥 입술이 너무 예뻐서. 항상 꽁꽁 감싸고 있던 가면이 삐뚤어져서 보인 그 입술이 너무 예뻐서. 홀린 듯이 가까이 붙어 앉았는데, 턱 끝에 내려앉은 내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는지 그가 뒤척였고 그러다 코앞에서 보던 내 입술에 깃털처럼 아주, 아주 잠깐 닿았던 것뿐이니까. 왜 이유 없이 코앞에 그렇게 있었느냐고 물으면, ‘네 입술이 너무 예뻐서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하는 게 더 부끄러우니 나는 설명을 생략했다.
“그래서 했어요, 뽀뽀.”
뽀뽀. 뽀…… 그거가 아닌 뽀뽀를 정확히 발음하자마자 불만 많던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따귀 수십 대는 올려붙인 것 같이.
“……아까.”
로아드네스의 굵은 목울대가 눈에 띄게 한 번 꿀렁였다. 시간이 미친 듯이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숨이 막혔다.
“아까, 그 분홍 머리랑도 했잖아.”
“네, 그게 왜요? 친근한 사이에 하는 인사잖아요.”
나는 최대한 여상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나도 친구라며.”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닫았다. 집요한 시선이 계속해서 온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망토 앞섶을 더 힘 있게 모아 잡았다. 이유도 모른 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에 눌리고, 단숨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원초적인 위기감 때문일까. 내가 문에 바짝 붙어 찌그러진 만큼, 로아드네스가 일어나 다가왔다. 조용히 타는 불같은 눈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나랑도 인사해, 그럼.”
“!”
“어릴 때도 그리 잘했고, 처음 본 친구랑도 잘했잖아. 나랑도 해.”
새카맣게 타버린 것 같은 눈이 느리게 깜빡인다 싶더니, 그의 얼굴이 내 귓불 쪽에 완전히 붙었다.
“뭐, 뭐,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보기보다 단단한 그의 뺨과 내 뺨이 닿자 나는 온몸이 뜨거운 물에 퐁당 담긴 것처럼 뜨거워졌다.
“인사.”
“으아아아악-!”
느릿하고, 뜨거운 숨결이 귓속에 들어오자 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짝 다가온 그를 밀었다. 아드리엔의 몸이었다면 그에게 간지럽지도 않은 힘이었겠지만, 건강함이 남다른 블리에의 힘은 달랐다. 로아드네스가 순간 너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뜰 만큼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성공한 건 좋은데…….
“아드리엔!”
억! 하고 소리칠 틈도 없이, 나는 마차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누군가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문제는 등 뒤로 소름 끼치는 겨울바람이 몰아닥침과 동시에 내가 반사적으로 로아드네스의 멱살을 두 손으로 꽉 그러잡고 함께 떨어져 버린 것이다.
“부, 부인!!”
망할 가스팔의 목소리가 귀를 찌르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감았는데?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널브러질 줄 알았던 몸이 바닥과는 다른 느낌의 딱딱한 무언가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윽.”
터지는 신음은 내 것이 아닌 굵직한 목소리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아래에 짚고 눈을 번쩍 떴다. 살짝 어지러웠지만 나는 하늘이나 다른 사람들의 다리가 아닌, 똑바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겐 더 재앙이었다. 마차 문을 열어젖힌 장본인인 가스팔은 딱딱하게 굳은 채 입만 떡 벌리고 있었고. 멀찍이서 마차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요나와 닐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부인.”
억눌린 듯한 거친 음성이 밑에서 불쑥 올라왔다.
“전하!”
내가 로아드네스의 몸에 올라타 앉아있었던 것이다. 내가 떨어지려는 순간, 멱살이 잡혔던 로아드네스가 나를 꽉 잡고 필사적으로 제 몸이 먼저 떨어지게 한 것이다.
“맙소사! 드디어 한 판 붙으신 겁니까, 두 분?!”
닐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펄떡이며 뛰어왔다.
“마님, 마님 설마 힘을 쓰셨어요?!”
블리에의 남다른 건강함이 익숙한 요나는 나무라듯 소리치며 달려왔다. 나는 곧바로 로아드네스의 몸에서 내려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말문이 막힌 집사를 지팡이 삼아 부여잡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로아드네스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몸은 멀쩡해 보였다. 그 역시 약간 고개를 흔들다가 벌떡 일어났는데, 어느새 우리 사이에 끼어든 닐이 그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와우! 화끈하시네요. 부인! 멱살부터 잡으시다니!”
“멱살 잡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닐은 제 주군이 다쳤는데도 상기된 목소리였고, 요나는 조용히 혼잣말로 키득댔다. 위기의 순간에 나도 모르게 손부터 나간 것은 블리에의 평소 버릇이었나 보다. 그런데 잠깐, 내가 멱살을 잡은 건 어떻게 알고? 닐이 바닥에서 음각으로 장미가 조각된 금장 단추 두 개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여주었다.
“아!”
“솜씨 좋으신데요, 부인. 튼튼한 정복 단추를 두 개나 뜯어버리시고 말입니다…… 으억!”
턱,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닐이 아킬레스건을 부여잡고 한발로 통통 뛰었다. 로아드네스가 뒤에서 발로 깐 게 분명했다. 자연스레 닐의 손에서 단추를 받아든 로아드네스가 곧바로 겉에 두른 모피는 물론이고 정복 재킷을 벗어 내게 건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추가 떨어진 재킷은 내 손에 들려주고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검은 모피는 내 어깨에 툭 걸쳐서 이음새를 꼭꼭 잠가주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루어진 일이라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살피지 못했다. 한참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던 그는 곧장 내 양어깨를 그러쥐고 몸을 낮췄다. 긴장감에 몸을 뒤로 빼려고 해도, 잡힌 어깨에 닿은 힘이 지나치게 단단하고 강해서 몸을 물리지 못했다.
“또 올게, 친구.”
차가운 내 뺨에, 불처럼 뜨거운 그의 뺨이 살짝 맞닿았다. 햇살이 고이는 그의 올라간 입꼬리며, 느른하게 풀어진 아름다운 눈동자며. 밝은 날에도 별처럼 반짝이는 그의 옅은 금발이 살짝 헝클어지는 것까지 보았을 땐 이미 시간이 내게만 너무 느리게 흘러, 그가 마차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멍하니 있는 내 귀에 뭐라 뭐라 줄곧 쏟아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불만도 스치듯 귀에 닿았지만,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의 체온이 훑고 지나간 내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가스팔과 즐거워 보이는 닐. 내게 잔소리를 시작하는 요나의 목소리는 어느새 흑백으로 변하고 그가 주고 간 재킷의 색만 눈에 선명하게 박혀 들어왔다.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졌을 무렵에야, 나는 물속을 빠져나온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모습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것인지도 그제야 깨달았다.
“멱살이 잡히고도, 재킷을 주고 가시다니 전하가 저러시는 건 처음 봅니다.”
“마님 너무 걱정 마세요. 마님이 멱살 좀 잡았다고 화내실 분은 아닌 것 같아요.”
결투하는 기사는, 싸우기 전에 자신의 옷을 벗어 사랑하는 연인에게 넘겨준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론타에서 흔히 하는 애정행각인데. 내가 단추를 두 개나 뜯어버려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기에 준 것일 뿐인데. 그는 결투하는 기사도 아닌데. 그가 직접 여며주고 간 검은 모피에서 그의 가까이에 있을 때마다 풍기던 라벤더 향이 났다. 나는 마치 큰 이불에 파묻힌 것처럼 모피에 양 뺨을 파묻고, 그가 주고 간 재킷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아. 간지럽다. 괴로울 만큼 간지러웠다. 어디가 간지러운지 내 입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간지러움이었다.
*** 마차에 오른 로아드네스 역시 방금까지 아드리엔과 닿아 있던 뺨을 감싸 쥐었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는 황가의 것이라 그다지 덜컹거리지도 않았건만, 그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느라 가슴이 널을 뛰는 것 같았다. 뜨겁게 열이 올랐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조심스럽게 뺨을 감싸 쥔 손은 이제 주인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황태자 궁에서 만난 놈들을 떠올리자, 그는 가차 없이 미간을 좁혔다. 불안함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아드리엔의 곁에 서고자 했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보여도 그 안은 절절 끓고 있었는데, 자신도 친구라며 거침없이 아드리엔에게 다가가는 놈을 보자 타오르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애새끼 같은 짓을 했군.”
그녀에게 자신을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던 게 몇 분 전 일처럼 선명한데. 친구라도 좋다며 곁에만 있게 해달라던 놈이 고작 그 인사 한 번을 제게도 해달라며 생억지를 썼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그는 이제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자괴감에 빠졌다. 어릴 적부터 아드리엔을 대할 때면 그는 어른스러운 척을 했다. 지금만큼 거대한 몸도 아니었고, 지금만큼 낮게 깔리는 사내다운 목소리도 아니었다. 목소리 정도는 그녀에게 허락했을 법도 했는데, 끝까지 필담으로만 이어진 관계였던 것도 사실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맑게 웃는 아드리엔의 순수한 눈망울에 가슴이 떨리면서도, 그를 사내로 보지 않는 듯 할 때마다 절망에 빠져들었고 그럴수록 자신을 더 감추었다. 날쌔기만 하던 몸을 단련하고,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키가 커지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면 아드리엔이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보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라고 생각했던 것도 당연했다.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여 몸이 쑥쑥 커지고, 목소리마저 그녀가 꿈꾸던 사내처럼 되었을 그 시기에 그들은 가면을 쓰고서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드리엔은 점점 몸이 나빠져 아카데미를 그만두었고, 그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아드리엔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아드리엔의 ‘기대한다’는 말에 기뻐 어쩔 줄 모르던 과거를 떠올리자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했어요, 뽀뽀.’
얼굴이 누가 불을 붙인 듯 뜨거워졌다. 그다지 사내답지 않던 시절에, 아드리엔이 입을 맞추었다니! 그녀가 입을 맞췄다고 직접 말한 건 아니었지만, 잠결에 벗겨진 가면 아래의 입술을 훔치고 도망갔다니. 로아드네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얼굴에 붙은 불이 입술로 옮겨 붙어 제 손까지 타는 듯 뜨거웠다.
“……미치겠네.”
미치겠다.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아드리엔의 첫 입맞춤만은 자신이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비겁하고 옹졸한 환희도. 로아드네스는 제 입술을 계속 쓰다듬으며, 마차 벽에 머리를 쿵, 쿵 박았다.
‘그래서 했는데요.’
‘그래서 했어요, 뽀뽀.’
쿵! 마지막으로 크게 한 번 머리를 박은 로아드네스가 제 머리를 미친 듯이 헝클어뜨렸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간단해?”
투정, 혹은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마차 바닥에 낮게 깔렸다.
“……나는 지금 미치겠는데.”
친구로라도 곁에 있겠다며 관계를 먼저 정의한 건 자신인데, 로아드네스는 어쩐지 제가 만든 함정에 자신이 빠진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