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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환영식 (88/171)

88. 환영식2022.03.05.

아틸차드 홀의 분위기는 한겨울 같지 않게 화사했다. 동부의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초록의 덩굴 잎들이 홀의 거대한 기둥마다 감겨 있었고, 천장을 빼곡하게 메우고 늘어졌다. 한밤중에 시작하는 무도회와는 달리, 저녁 시간이 되기 전 시작된 환영식은 파티홀 높은 곳의 창문만 활짝 열어놓아 노을이 그대로 아래층까지 쏟아지도록 두었다. 군데군데 놓인 여름 장미는 생화처럼 싱그러웠지만 사실 최고급 실크로 만든 조화였다. 파티 장식을 굳이 만져보던 사람들마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생화 향기에 깜빡 속아, 꽃잎을 슬쩍 떼어내 볼 때까지 조화인지 모를 정도였다. 가장 특별한 곳은 황제 부부와 황태자 부부가 앉을 상석, 그리고 환영식의 주인공인 9황자 에페로와 엘라콘 왕자 빅토르가 잠시 앉아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의 의자 손잡이에 장식된 붉은 장미만 유독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파티홀에 먼저 들어서자마자 꿈결을 걷는 것 같은 기분에 황후 그레이스와 황태자비 도리스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그 반짝이는 장미를 보자마자 낮은 신음을 흘렸다.

16558467221503.jpg“맙소사, 이건 루비로 만든 장미인가?”

16558467221509.jpg“예, 이번에 빅토르 왕자께서 황태자께 드린 선물을 이렇게 활용했습니다.”

16558467221503.jpg“황태자의 미적 감각이 이렇게 뛰어난 줄 몰랐네. 환영식을 저녁에 시작하지 않은 것도 배려가 돋보이고 말이네.”

실제로 황후와 도리스는 성대하게 열릴 황제의 탄신연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환영식이 지나치게 화려하게 열린다면 세워놓은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파티인 데다가, 사실 보수적인 황실의 파티 구성이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르데날도가 준비한 이 환영식은 밤이 되기도 전에 하는 데다가 술을 마시고 떠드는 것이 아닌, 다과를 먹고 가벼운 음악과 경쾌한 춤만 추는 산뜻한 환영식이 될 예정이란다. 그래도 아들의 환영식이라 지나치게 소박하면 서운할 것 같아 긴장했었는데, 이렇게 싱그러운 분위기일 줄은 몰랐던 황후 그레이스는 드물게 양손을 꼭 모아쥐곤 풀향기를 만끽했다.

16558467221503.jpg“엘라콘 왕자도 내내 이곳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던데요. 에페로의 가장 친한 친우이기도 하니 그쪽에서도 좋아할 만한 환영식이길 바랐는데 정말 잘 꾸몄어. 안 그런가요, 도리스?”

16558467221509.jpg“그러게 말이에요,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에페로 황자 전하는 물론 엘라콘에도 충분히 성의를 다하신 게 느껴져요.”

도리스 역시 황태자의 수완에 놀랐지만 대충 대답했다. 이 초록의 향연보다 신경을 거스르는 게 하나 있었다.

16558467221509.jpg‘……저게 왜 여기 있지?’

자신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 블리에 아카시아가 엘라콘 왕자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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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우라의 시선은 상석에 장식된 루비 장미에 박혀 있었다.

16558467221503.jpg‘저걸 우리 보석점에서 팔 수만 있다면…….’

그녀의 시선은 빠르게 도리스를 따라, 파티홀 구석에 서서 엘라콘 왕자와 대화를 나누는 블리에에게로 향했다. 둘이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니, 블리에의 엘라콘어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것임이 분명했다. 블리에는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긋 웃으며 눈인사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노우라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요 몇 달, 보석점의 매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지금 블리에가 입고 있는 드레스에 알알이 박힌 보석들 때문이었다. 오늘도 일부러 저런 드레스를 입고 온 게 분명했다. 도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주는 대가치고는 남는 장사였다. 황태자비의 시녀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저러는 걸 보면, 도리스와의 연이 끊어져도 노우라와의 관계는 지속하겠다는 신호였다. 아파서 누워 있는 자작을 대신해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노우라는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도리스가 움직였다. 경쾌한 환영식 음악에 맞춰 사뿐사뿐 블리에에게로 다가간 도리스는 고개를 치켜들고 여유롭게 웃었다.

16558467221509.jpg“즐거워 보이네요, 블리에.”

16558467221543.png“아, 비 전하!”

블리에가 속없이 해맑게 웃으며 예를 갖추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노우라는 도리스가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싸늘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차가운 빛은 블리에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로아드네스임을 확인했을 때 더 빛났기 때문이다.

16558467221509.jpg“내가 미안해서요, 블리에. 블리에라면 분명 슬픔에 잠겨 이런 환영식 파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해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기우였군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칼날과도 같았다. 네가 지금 여기서 웃고 떠들 상황인가, 하는. 하지만 블리에는 언제나 그랬듯 눈만 깜빡이며 눈치 없이 참 아름답게도 웃어 보였다.

16558467221543.png“아! 그런 깊은 뜻이…… 하지만 걱정 마세요, 비 전하. 저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답니다. 사실, 서운할 틈도 없었어요!”

제발. 제발 말하지 마, 이 눈치 없는 여자야! 노우라는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며 블리에에게 열심히 눈빛을 쏘았다.

16558467221503.jpg‘비 전하, 기분 안 좋음. 앞에서 그렇게 웃는 거. 금지.’

16558467221509.jpg“……서운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16558467221543.png“네, 정말 감사하게도,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이런 영광스러운 환영식 자리를 꾸밀 수 있도록 해주셔서요-. 슬픈 나날들이었지만 바빠서 며칠간 그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었답니다.”

16558467221509.jpg“네?”

노우라가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싱그럽고 아름다운 파티홀을 블리에가 꾸몄다고? 도리스 역시 놀랐는지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16558467221509.jpg“황태자…… 전하께서요?”

16558467221543.png“예, 모르셨나요? 부끄럽지만 이번에 제가…… 여기 계신 빅토르 님과 에페로 황자 전하를 수행하게 되었어요.”

블리에는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이들에게 슬쩍 눈짓하며 말했다. 노우라는 금세 다른 귀족들과 대화 중인 오늘의 주인공들을 곁눈질했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물론, 도리스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 노우라는 그 짧은 순간, 도리스의 녹빛 눈에서 수만 가지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이 멀찍이 있는 황태자에게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도. 아, 이 망할 블리에 아카시아. 제발 해맑은 입을 좀 다물면 좋으련만! 언젠가 블리에에게 황태자비 전하에 대해서 심도 있게 조언을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블리에가 더 폭탄 같은 말을 내던졌다.

16558467221543.png“제가,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으로서 맡은 첫 임무라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 말에 도리스가, 허파에 바람이 빠진 사람처럼 헛웃었다. 하지만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가까이 붙어선 노우라에게는 그게 뼈에 사무칠 만큼 진한 살기로 느껴졌다.

16558467221509.jpg“보좌관? 블리에가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 될 수 있나요?”

16558467221543.png“왜 될 수 없나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던 블리에가 돌연 얌전한 미소와 함께 반문했다. 노우라는 맹하던 블리에의 눈이 차차 가라앉는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정함을 머금은 입술은 분명 평소와 다름없이 따뜻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16558467221543.png“저는 지금,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아니라. 아카시아 백작인데요, 비 전하.”

깊게 침잠한 그 눈만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라는 말과 함께 노우라의 가슴에 쿡 박혀 들었다. *** 나는 약간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구석에서 샴페인만 홀짝였다. 뒷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도리스의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6558467221543.png‘그러게 날 왜 버려.’

곁에 두었다면, 제 공으로 밀어주었을 텐데. 한참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던 도리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자,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불안한 얼굴에 대고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도리스에게 비밀로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곤란한 건 황태자지 내가 아니었다. 그때, 도리스 뒤를 따르던 노우라가 내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에게도 황태자에게 보낸 것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랍게도 노우라는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호의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필요를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도발적이긴 했지만, 워낙 쌓아둔 이미지가 맹추 같았기 때문에 발칙하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그뿐이겠지. 그보다는 그녀의 곁에서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노우라를 훨씬 신경 써야 했다. 내가 도리스 곁에 붙어 있지 않는 동안, 내 눈이 되어줄 여자이니 노우라 앞에서 나는 결코 도리스에게 버려질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고. 연신 감탄하며 파티홀을 둘러보던 빅토르가 에페로와 함께 방금 도착한 황제에게 불려간 사이 나는 샴페인 한 병을 싹 비웠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블리에의 몸을 이만큼이나 주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술을 한 잔, 두 잔씩 마시며 노에비안에 대한 분노를 달랬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을 탈탈 털었더니 어쩐지 머리가 빙 도는 듯해 벽을 짚었는데 손 아래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16558467281285.png“부인.”

16558467221543.png“……전하?”

손에 닿는 건 벽이 아니라 로아드네스의 손이었다. 우리 둘 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술을 마셔 열이 오른 탓일까, 잠깐 닿은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로아드네스의 눈이 순식간에 짙게 가라앉았다. 뭔가를 참고 있는 눈이었다.

16558467221543.png“아, 너무 놀라서요. 죄송해요, 전하.”

16558467281285.png“……아까 그 곰 같은 놈이 바짝 붙어설 땐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16558467221543.png“네?”

내가 그랬었나?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던 황태자에게 보이기 위해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는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아 픽 웃었는데, 동시에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16558467221543.png“아니요. 그다지…… 즐거운 이야기라기보단, 우스운 이야기들이었어요.”

빅토르와 내가 나눈 대화는 태반이 외국어 초보자들의 말장난 같은 헛소리였다.  

16558467281353.jpg‘보석 장미. 최고.’

16558467221543.png-‘내가. 지시한 것. 만들라고.’

16558467281353.jpg‘역시. 아름다운 여자는. 만든다. 아름다운 것.’

16558467221543.png-‘감사.’

16558467281353.jpg‘여자. 당신. 재밌다. 말하는 것.’

16558467221543.png-‘재밌다. 네가 더. 아, 이건 반말인가.’

16558467281353.jpg‘그런 거냐. 일부러.’

16558467221543.png-‘모르겠음. 뭐라고 하는지.’

  어쩐지 어릴 적 로아드네스에게 엘라콘어를 배울 때 그런 식으로 함께 종이에 끄적이며 놀았던 게 생각나 더 미소가 번졌다. 빅토르에게서 어린 시절의 로아드네스를 떠올리자 순간 푸스스 웃음이 났는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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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아드네스가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로 예의상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을 모두 비우는 게 보였다. 내 눈을 똑바로 주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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