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부인 얼굴. 딱 내 타입이거든2022.03.09.
로아드네스는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전하?”
“아닙니다.”
아니기는. 다과나 음료만 준비된 환영식 한쪽에 자그마하게 마련된 샴페인 테이블. 이 테이블에서 줄곧 샴페인만 들이켜고 있는 건 그와 나, 둘뿐이었다.
“목마르시면, 제가 물을 가져올까요?”
“진심입니까?”
로아드네스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내뿜더니, 시종을 불러 물을 가져오라 명했다. 목이 마르긴 했나 보다.
“당신은 내 시녀가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싸늘한 목소리였다. 술을 마셔서인가. 어쩐지 마음이 두둥실 떠올라, 나는 그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가요? 수행이라고는 하지만, 뭐 거의 에페로 황자 전하나 빅토르 님의 전담 시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봐요.”
미소 짓는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로아드네스는 파티 주인공들의 전담 시녀를 자처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는 시종이 얼음까지 동동 띄워온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머리 아플 텐데.’
역시.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잠깐 찌푸렸던 로아드네스는 아까보다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나를 다시 응시했다.
“……답답하지 않습니까?”
답답해 보이는 건 오히려 로아드네스였다. 그가 이미 약간 풀어헤쳐진 크라바트를 더 느슨하게 푸는 게 보였다. 그가 그럴 때마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그의 움푹 팬 쇄골뼈로 향했기에 나는 부러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답답하세요? 답답하지 않게 천장 쪽 창문을 뻥 뚫었는데도요? 이제 슬슬 어두워지니 불을 밝히라고 해야겠어요.”
로아드네스는 내가 바삐 시종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나랑 둘이 있는 게 불편합니까?”
내 용건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물어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평소와 다르게, 군청색 벨벳 정복을 입고 나타난 로아드네스는 등장할 때부터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틀 전 그에게 닿았던 뺨이 달아오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 내 에스코트를 맡아주었던 빅토르의 팔을 꽉 부여잡지 않았다면 조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정도로.
“아니요, 제가 왜 전하가 불편한가요?”
“그럼 왜 내내 눈을 피하고, 내 쪽으론 눈길도 안 줍니까?”
“제가요?”
“내내 그 곰 새……. 곰 같은 자식이랑만 속닥였습니다.”
로아드네스는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거기서 멈췄다. 나는 일렁이는 눈으로 로아드네스의 굵은 목울대가 눈에 띄게 꿀렁이는 걸 지켜보았다.
‘너랑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져. 막 간지럽고…….’
그런 말을 쉽게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나는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내게 미안합니까?”
“네?”
미안해야 할 일인가? 내가 빅토르를 수행한 일이?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미 손을 내밀고 있는 로아드네스에게 미안하지 않은데 뭐가 불만이냐고 캐물을 순 없었다. 그가 뭔지 모를 이유로 내게 불만이 쌓인 것 같은 눈치인데, 물어봐도 절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이 나가겠습니까?”
“네? 곧 빅토르 님과 에페로 황자께서 돌아오실 텐데…….”
“에페로 역시 이 아틸차드 홀 정도는 혼자서도 돌아다닐 수 있는 놈입니다.”
“하지만…….”
“싫습니까?”
무섭게 굳은 얼굴이긴 했지만, 은근히 묻는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눈을 또르르 굴리는데, 멀리서 도리스는 물론이고 노우라의 시선까지 강렬히 느껴진다.
“알겠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로아드네스가 제 팔을 더 깊게 내밀었다. 얼마 전, 마차에서 그의 위에 올라타고 재킷을 받아든 이후로…… 어쩐지 그의 몸에 접촉하는 게 더 어려웠다. 이전에도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지만, 심장이 귀에 달린 것처럼 뛰어대는 건 당황스럽기도 했고. 단단한 그의 팔이 몇 번 움찔대는 것 외에 로아드네스의 표정은 꽤 담담했다. 파티홀을 나와 거대한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테라스 하나에 들어가자,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
“와아-.”
“……어떻습니까?”
아드리엔이 로아드네스의 팔을 놓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이 떨어진 팔이 허전해 잠깐 응시하던 로아드네스는 별처럼 반짝이는 아드리엔의 눈을 지나, 테라스 바로 아래 펼쳐진 정원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을 응시했다. 초저녁에는 쉽사리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이 정원은 다른 곳보다 어둡기도 하고, 이 반딧불이는 노을 지는 시간부터, 초저녁까지만 반짝이는 놈들입니다.”
로아드네스는 눈앞의 반딧불보다, 그 불빛이 반짝이는 아드리엔의 눈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뻐근했다. 아름다운 파티홀에서도 시궁창에 있는 것 같던 마음이 조금은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한 번 시작한 질투는 잠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그를 괴롭혔다. 그는 수십 번, 수백 번을 고민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을 다른 놈이 서슴없이 닿는 것을 보자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아드리엔에게 닿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친밀하게 닿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닿을 수만 있다면, 아드리엔의 영혼이 아무리 하찮은 미물에 있더라도 그는 괜찮았으리라. 아드리엔이 아무렇지 않게 다른 놈들에게 친하게 지내고 싶다느니, 친구가 되고 싶다느니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 그런 거에 질투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현실이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손 한 번 잡는 것에도 화들짝 놀라 제 손을 빼버리는 아드리엔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득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엘라콘 왕자는 물론이고, 어린 에페로까지 아드리엔을 보며 흥미롭게 눈을 반짝일 때마다 불타는 마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너무…… 예뻐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당신의 데뷔탕트 때. 나는 이곳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도망갈까. 로아드네스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충동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 ***
“하고 싶은 말이요?”
나는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지만, 점점 내 뒤로 바짝 붙어서는 로아드네스의 움직임에 숨을 들이켰다. 내게 다가오는 로아드네스에게 밀리듯 주춤주춤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섰다. 다가오는 기운에 몸을 움찔, 움츠리니 로아드네스는 나를 사이에 두고 테라스 난간을 꽉 그러잡았다. 내 정수리 바로 위에서, 그의 들숨이며 날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통이었다. 깃털같이 가벼운 숨소리였지만, 드나드는 입김이 정수리며, 훤히 드러난 뒷덜미에 쏟아질 때마다 온 신경이 그곳으로 쏠렸다.
‘아, 어떡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로아드네스가 자신의 재킷을 주고 간 그날, 그 재킷에서 풍기던 유혹적인 라벤더 향이 내 뒤에서부터 코끝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냐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목이 꽉 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밟혀 죽는 개구리보다도 못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는 한참 뜸을 들였다. 난간을 어찌나 꽉 부여잡았는지 손등에 굵은 힘줄이 몇 개나 솟아오를 정도였다.
“아드리엔, 나는…….”
로아드네스가 무거운 입을 떼는 순간 다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어라? 여기 있었네?”
“찾았다! 한참을!”
소란스러운 이들이 우리를 찾아 정원을 쏘다니다가 결국 발견한 듯 앞쪽에서 팔을 붕붕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해맑은 미청년 둘이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며 빠르게 테라스 아래로 다가왔다.
“와! 이 반딧불이 놈들 아직도 살아 있네. 이리 내려오세요. 부인! 같이 봐요!”
“아름다운 것 있다. 여기에도.”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탁, 풀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로아드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턱을 치켜든 채, 깊게 침잠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로아드네스의 분위기는 서늘하다 못해 싸늘했다.
“좀 더 정원 깊이 들어가면 더 많은데! 얼른 와요! 형님! 부인!”
“와라. 얼른.”
“저…… 전하?”
한참 아래를 응시하던 로아드네스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갈 겁니까?”
“네? 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일단 저분들의 수행을 맡기도 했고…… 파티도 아직…….”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고, 솔직히 더 안으로 가면 이 아름다운 광경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쉬운 눈을 했다. 로아드네스는 아쉬운 눈을 한 나를 한참 보다가 테라스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내게 팔을 뻗은 두 남자 앞에서 대놓고 더 넓게 팔을 뻗어 뒤이어 내려오는 나를 받아주었다. 우리는 조금 더 정원 속으로 깊게 들어갔다. 빅토르의 다음 타깃은 내가 아니라 로아드네스였던지 쉴 새 없이 반딧불이를 보며 궁금한 점을 쏟아냈다. 로아드네스는 거의 대꾸하지 않았지만, 빅토르가 이상한 헛소리를 할 때마다 단호하고 날카롭게 받아쳤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에페로와 함께 반딧불이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건강한 몸으로 황궁에서 이런 반딧불이를 보고 있는 게 꿈만 같았다.
“당신이죠?”
아까 꽤 해맑은 청년 행세를 하던 에페로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 건, 내가 잠시 감상에 젖어 반딧불이들이 맴도는 것에 집중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묘한 질문에 나는 약간 한기를 느끼고 두 팔을 감쌌다.
“……네?”
“내게 편지한 거.”
작은 보조개를 뺨 한쪽에 두 개나 달고 웃고 있는 에페로는 분명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반딧불이 빛들이 까맣게 차오르는 무언가에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다. 이 황자가, 알고 있었구나. 성년을 코앞에 둔 에페로의 저돌적인 눈빛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반딧불에 감동하고 있던 마음을 그러잡고 가까스로 입꼬리를 늘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론타 황실을 잘 아는데, 나한테 아들 역할을 운운하며 불러들일 만한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거든.”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잖아요?”
내가 여상하게 말하자 에페로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가 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이 심증만으로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절대 말려들어선 안 된다.
“대공이야말로 내가 엘라콘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인데. 그보다는 대공의 이거였다던 부인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리 여기는데?”
에페로가 또 새끼손가락을 들며 히죽 웃었다.
“어차피 싫으셔도 얼마간 얼굴 봐야 하는 사이인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나는 어른처럼 그를 달랬다. 에페로는 새끼손가락을 보란 듯이 흔들다가 거둬들이고 낮게 속삭였다.
“글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로안 형님을 꽤 좋아해요. 그러니 경고하는 거야 부인.”
경고. 경고라는 단어에 몸을 굳힌 내게 에페로가 한걸음 더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야 얼마든지 갖고 놀아요. 하지만 로안 형님께는 선 넘지 마요. 장단 맞춰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뭐라고요?”
“부인한테 스캔들 하나 더 나는 게 큰일은 아니잖아요?”
번뜩이는 푸른 눈이 야살스럽게 내 입술이며 목덜미를 훑어보았다. 이 머리에 피도…….
“부인 얼굴. 딱 내 타입이거든.”
……안 마른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