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너. 양아치. 네 형님. 미친놈. (90/171)

90. 너. 양아치. 네 형님. 미친놈.2022.03.12.

16558467616588.jpg

  한겨울임에도 풀벌레가 찌르르하고 우는 소리만 정원을 맴돌았다. 에페로는 수치를 꾹 눌러 참는 듯한 내 얼굴을 보고 놀리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더니 비죽 웃었다.

16558467616595.jpg“안 들리나요? 부인 얼굴이…….”

16558467616599.png“전하.”

나는 조금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마치 가정교사라도 된 듯한 얼굴일 것이다.

16558467616599.png“제가 전하의 무례를 가만히 두고 볼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16558467616595.jpg“뭐?”

나는 반딧불이를 살피느라 잠시 굽혔던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16558467616595.jpg“부인이 뭘 어쩔 수 있다고?”

그가 해맑게 나를 조롱했다. 나는 곧장 눈을 치켜뜨고 입을 열었다.

16558467616599.png“물론, 지금 당장은 어찌할 수 없겠지요. 전하, 저는 전하와 친해지고 싶어요.”

16558467616595.jpg“그래서?”

16558467616599.png“그래서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16558467616595.jpg“허, 기회?”

16558467616599.png“사실은 론타에 남고 싶으시잖아요.”

늘 자신만만하게 빙글거리던 말간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에페로는 기다란 속눈썹을 바르르 떨더니 아까보다 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16558467616599.png“사실 엘라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죠?”

황후 폐하와 에페로의 애틋한 모자 관계는 유명했다. 게다가 노에비안의 편지 한 통에 기다렸다는 듯 이리 빨리 올 수 있었던 것도 본인의 의지가 아니면 불가하다.

16558467616595.jpg“론타에 누가 있다고? 론타에 남아서 내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에페로의 얼굴빛이 살짝 붉어졌다.

16558467616599.png“왜 없으세요? 전하는 이 나라 계승서열 3위가 아니신가요? 황후 폐하께서 저리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데, 전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얻지 못하실 게 뭐가 있죠?”

16558467616595.jpg“보기보다 순진하시네, 부인.”

그리 말하면서도 에페로의 얼굴은 내가 황위 계승을 입에 담자마자 공포에 질린 듯 보였다.

16558467616595.jpg“아니, 정말 순진할지도 모르겠네. 생각해보면 부인과 엮이고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황위 계승권자들이지. 손바닥만 한 아카시아 영지를 담보로 여기저기서 새 출발을 해보려 기웃거리는 것 같은데, 꿈 깨요.”

16558467616599.png“손바닥만 한 아카시아 영지로 제가 뭘 한다고요?”

16558467616595.jpg“그 땅에 마나석 광산이 있다는 걸 내가 모를까 봐. 그러니 당신은 노에비안 트로비카도 사로잡지 못한 거야. 그가 단순히 누굴 침대에 끌어들였다고 해서 대공비 자리에 올려 세운다? 말도 안 되지.”

약간 횡설수설하는 에페로의 귀에 주렁주렁 달린 귀걸이가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할 때마다 짤랑거렸다. 나는 반짝이는 귀걸이들로 시선을 옮기다가 순간 헉, 소리가 나려던 입을 꽉 다물었다. 무언가…… 얼떨결에, 놀랄 만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 귀한 마나석 광산이 아카시아 영지에 있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광산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엘라콘의 힘은 마나석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자재로 마법을 쓰는 이는 전설 속에서나 내려오지만, 마나석을 에너지원으로 여러 가지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인 론타마저도 이 넓은 땅에 마나석 광산이 가뭄에 콩 나듯 있어서, 황족이나 로열 아카데미에서나 쓸 수 있는 귀한 것이고.

16558467616599.png“……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나는 마나석 광산에 대한 정보를 더 듣기 위해 알고 있었던 척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16558467616595.jpg“당신 같은 사람들 생각이야 뻔하지. 늙은이와 결혼해 신분을 세탁하고 그가 죽으면 작위를 훔쳐 그것을 빌미로 더 괜찮은 사내를 찾는, 뭐 그런 부류. 론타는 지금 그런 짓을 하기 좋은 나라니까. 공교롭게도 처음엔 대공, 두 번째는 로안 형님, 세 번째는…… 언감생심 황태자 전하겠군. 맙소사.”

에페로는 보석 반지를 주렁주렁 낀 길쭉한 손으로 제 이마를 보란 듯 탁! 쳤다.

16558467616595.jpg“설마 네 번째는 난가? 낚싯대를 여러 개 던져놓고 한 놈만 걸려라 기도라도 하는가 봐요. 편지를 보내서 내가 부인을 추측하게끔 한 다음에 꼬여낼 생각이었나? 그런데 내가 부인이 편지를 보내 나를 불러들였다고 황태자 전하께 아뢰면 어찌할 생각이죠?”

실실 웃고 있는 에페로를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었다. 참자. 나는 어른이고, 에페로는 이제 갓 성인이 될 미성년이니까.

16558467616599.png“그러면 저는 그레이스 황후 폐하께서 시키셨다고 아뢸 거예요.”

제대로 먹혔다. 피실피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리던 에페로의 입가가 돌처럼 굳었다.

16558467616599.png“가만히 계시는 무고한 분을 언급하니 화가 나시나요? 그렇다면 지금 제 기분을 정확하게 이해하셨어요. 제가 뭐 하러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에페로 황자 전하를 굳이 불러오겠어요?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굳이 전하가 아니어도 아카시아 영지를 갖고자 저를 가까이하실 분은 넘치는데요. 그리고 저를 수행원으로 두게 해달라 부탁하신 건 전하시잖아요.”

본디 사내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건 참지 못한다고 비앙카가 그랬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내 움직이는 입만 바라보던 에페로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내가 다음 말을 잇고 나서부터였다.

16558467616599.png“헛다리 짚으시며 저를 모욕하시는 것보다, 차라리 저를 유혹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전하의 말대로라면 아카시아 영지를 얻게 되는 자에게 남들은 모르는 큰 이득이라도 생길 것 같은데요.”

16558467616595.jpg“하.”

패기 있는 젊은 황자의 얼굴이 이상한 빛으로 상기되었다. 감히 내게 무례하다 탓을 하진 못할 것이다. 먼저 무례하게 군 것은 에페로 자신이니까. 그는 나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두 눈에 담긴 감정은 경멸이 아닌 흥미였다. 나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카시아 백작령에 마나석 광산이 있다니. 그렇다면 노에비안이 그토록 아카시아 백작의 유언장을 찾아 헤맸던 것도 이해가 간다. 유언장을 찾아서 가스팔을 시켜 필체를 조작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소름이 쫙 돋아났지만, 나는 에페로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턱을 더 들고 웃었다. 그가 내게 흥미가 생겨, 아카시아 백작령에 대해 한마디라도 더 나불거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16558467616599.png“전하께서 제게 했던 무례를 사과하시고, 진정한 친구가 되길 청해주신다면 혹시 모르죠.”

16558467616595.jpg“…….”

16558467616599.png“제가 아카시아 백작령의 이권을 전하께 좀 나눠 드릴지도요.”

네가 황태자를 압박해, 황태자가 나를 더 이용하고자 곁에 두려 하면 금상첨화고.

16558467616599.png“이제 이국이 아닌, 론타에서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고요.”

아예 세력을 키워서, 황태자가 내 원수라는 게 밝혀졌을 때 널 이용해 황태자를 찍어낼 수도 있겠지.

16558467616599.png“아까 제가 뭘 어찌할 수 있느냐고 하셨나요? 제가 보기엔 이래 보여도 만만하지 않으실 거예요.”

내 목소리가 점점 더 은밀해질수록, 에페로가 귀를 기울이며 점점 내게 가까워졌다.

16558467616599.png“노에비안 트로비카. 전하를 론타에 들이고 싶지 않아 하던 그 사람을 제가 꾀어 대공비 자리를 노렸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가 내 키에 맞춰 몸을 살짝 굽히고 얼굴 사이의 거리가 한 뼘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다가왔을 때 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16558467616599.png“천만에요. 그 사람을 북부에 처박아버린 게 바로 저랍니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반딧불이가 사라져 동시에 빛이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황태자 바르데날도와 정확히 똑같은 빛깔의 것들이 내 앞에서 일렁거렸다.

16558467616599.png“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은 드시나요?”

나는 그 푸르른 빛깔의 눈동자 안에서, 억지로 감춰두고 있던 욕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자신을 과하게 꾸미고 밝게 행동하는 자들은 그만큼 어두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16558467616595.jpg“……당신이 원하는 게 뭐예요?”

이제야 조금은 예의 있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원반을 물어온 개를 칭찬하는 것처럼 시선으로 그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자비롭게 미소 지었다.

16558467616599.png“간단해요.”

그리고 겨우 두 뼘 거리의 얼굴을 바짝 좁혀 그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붙이고 속삭였다.

16558467616599.png“저는 제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싶을 뿐이에요.”

16558467616595.jpg“……목적이 뭔데요?”

아. 목적이 무엇일까. 원하는 것은 내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이지만 그리 구분해서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로아드네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 로아드네스는 물론 빅토르도 없었다.

16558467616599.png“?”

대신 나는 내 머리 위에 이미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걸 인식했다. 반딧불이가 없는 깊은 밤의 정원. 빛이 사라진 눈을 한 사람은 에페로뿐만이 아니라 로아드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침잠한 눈으로, 나와 에페로의 지척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로아드네스를 보자 나는 잠깐 멈칫했다.

16558467706336.jpg“언제. 친해진. 둘이?”

빅토르의 짧은 제국어가 싸늘한 정적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에페로를 힐끔 보았다.

16558467616595.jpg“아, 이리 어두운 곳에서 아름다운 귀부인과 나누는 대화야 뻔하지.”

에페로는 방금까지 우리가 나누던 대화들을 검은 천으로 휙 덮어버리듯 은폐했다.

16558467616595.jpg“부인의 얼굴이 지극히 내 취향이라 그렇게…….”

일렁이던 푸른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른하게 풀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뱉어냈다. 밤에 보는 귀부인의 얼굴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느니 뭐니. 그런 깜찍한 말들을 잘도 술술 지껄였던 것이다.

16558467736702.png“에페로”

하지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에페로의 기지는 거기서 끝이었다.

16558467736702.png“입 닥쳐라.”

평소처럼 툭, 툭 던지는 독설이 아니었다. 로아드네스는 지극히 진심으로 에페로에게 입을 닫으라 ‘명령’하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아드리엔을 욕하던 ‘블리에’에게나 보였던 얼굴이었다. 에페로는 얼떨떨한 얼굴로 로아드네스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느물느물 넘어가려던 그는 생각보다 진지하고 엄중한 경고에 입만 달싹였다.

16558467736702.png“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자, 어엿한 아카시아 백작의 대리다. 그리고…….”

에페로를 뚫어버릴 듯 강렬히 내려다보던 로아드네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조용히 그 시선을 받았다. 조금 버거웠다.

16558467736702.png“내 둘도 없는…… 친우다. 같잖은 희롱이나 해대고 또 내 귀에 방금과 같은 말이 들리면.”

16558467616595.jpg“형님?”

16558467736702.png“경고 없이 머리통을 박살 내줄 테니까.”

친우를 위한 경고라기엔 지나치게 살벌했다. 누가 검으로 푹 찔러도 생채기 하나 안 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겉으로나마 훈기를 유지하던 이곳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되어버렸다. 말이 너무 빨라 따라오지 못하고 상황을 파악하던 빅토르가 그나마 만만한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16558467736702.png“부인.”

하지만 로아드네스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먼저였다.

16558467736702.png“늦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아뢰고, 퇴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빅토르의 팔이 내게 에스코트를 권하며 뻗어지기 직전에 나온 말이었다. *** 결국 정원에 덩그러니 남은 건 에페로와 빅토르 단둘이었다. 빅토르는 빠르게 이곳에서 사라지는 로아드네스와 거의 끌려가듯 붙어가는 귀부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에페로 역시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빅토르는 평소 에페로가 로아드네스라는 제 이복 형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동경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이해했다. 허탈하고, 어이없는 뭐 그런 종류의 표정 말이다.

16558467706336.jpg“너보다. 성질. 지랄맞음.”

빅토르의 위로가 담긴 뒷말에 에페로가 픽 웃었다. 제 형님이지만 무섭긴 더럽게 무서웠다.

16558467706336.jpg“네가 속닥댈 때. 아까 부인이랑. 네 형님. 돌았음. 눈깔.”

16558467616595.jpg“그렇겠지.”

에페로는 제 형님의 관심을 그토록 끈 사람을 보지 못했다. 대체로 로아드네스는 황태자 바르데날도나 죽은 레티나 황후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에페로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16558467616599.png‘그러면 저는 그레이스 황후 폐하께서 시키셨다고 아뢸 거예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먹거리는, 황태자 같은 여자. 에페로는 로아드네스가 관심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곤 허탈함을 담아 구불대는 앞머리를 입으로 후, 불었다.

16558467706336.jpg“그 여자. 반했나?”

16558467616595.jpg“그랬다면 어쩔 건데?”

16558467768703.jpg

전혀 반하지 않았지만, 에페로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이 바보 같은 제 친구가 그 여자에게 쓸데없는 정을 주기 전에 떼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새 정을 줬는지 에페로의 말에 빅토르의 짙은 눈썹이 왈칵 구겨졌다.

16558467706336.jpg“너. 양아치. 네 형님. 미친놈.”

16558467616595.jpg“그러는 넌 또라이야, 이 새끼야.”

친구 생각하는 제 마음도 모르는 멍청한 분홍 곰에게 에페로는 망설임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