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질투, 그 잔인한 감정2022.03.16.
블리에 아카시아도, 에페로도 없었지만, 도리스의 심장은 딱딱히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파티홀에 감탄하며 웃고 떠들며 춤을 추는 동안 그녀의 기분은 내내 시궁창이었다.
“술은 아니지만, 건배할까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간 얼굴로 술잔 대신 찻잔을 드는 바르데날도의 친근한 행동도 그녀의 눈에는 가증스러운 아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 시녀를 잘도 빼가셨더군요. 이러니 제가 전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
“무슨 말입니까?”
“제 시녀가 전하의 보좌관이 되었다는데, 어째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죠?”
“아, 그 얘기 말이로군요. 며칠 되지 않은 사안입니다. 에페로가 그리 갑자기 귀국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 그 얘기 말이로군요?’
도리스는 한바탕 소리라도 지를 듯 입을 벙긋 거렸다가 음악 소리가 점점 줄어들자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빌어먹을 에페로 황자가 오지만 않았더라도 자신의 궁으로 황태자를 불러들여 화병 몇 개는 깨부수었을 것이다. 도리스가 대공의 반란군에 대해 입을 다문 대가로 황태자를 주무르고 있듯, 카스타냐 공작 역시 에페로가 귀국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대가로 수시로 영지를 벗어나 황태자 궁을 들락거리곤 했으니까. 에페로를 잠깐 막지 못했다곤 하지만, 블리에를 보좌관으로 두는 것과 그것을 자신에게 단 한 번의 상의도 없이 결정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저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대공과 관련된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않습니까.”
도리스는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화를 참기 위해 애썼다. 대공이 가지고 있던 권한들의 일부를 카스타냐 공작에게로 옮기고, 대공가의 기존 몇몇 가신들과도 자리를 마련했다. 남은 대공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딴마음 먹지 못하게 말이다. 물론 대공가의 가신들은 황태자의 외할머니인 윈스터 후작의 가신이었던 자들이거나 원로 황태자파의 중신들이니 그들이 먹는 ‘딴마음’이라 해봤자 소소한 것이겠지만.
‘누가 황태자파의 수장이 되느냐.’
그 선두에 카스타냐 공작이 버티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자리들이 늘었다. 카스타냐 공작이 수도에서 그들을 초대해 회의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황태자는 묵묵히 공작을 따라 그 자리를 지키고, 남은 황태자파의 세력들은 암묵적으로 카스타냐 공작을 인정하고. 블리에는 치워지고, 오늘은 고대하던 바르데날도와의 합방일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은 도리스의 기분이 아주 좋았어야 하는 날이란 뜻이었다.
“에페로의 일은 유감입니다.”
제 형제의 환영식임에도 바르데날도가 망설임 없이 유감을 표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이 환영식을 보시고 황태자 전하의 배려에 감동하신 것 같은데. 참 매정하시군요.”
“아우를 위하는 마음과는 다른 문제이니까요.”
그러니 네 아비가 일을 똑바로 하지 못해 참 곤란하다는 뜻이렷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도 제겐 다른 문제예요.”
“마침 비를 모시는 일을 잠시 쉰다고 하지 뭡니까.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이 궁에서 또 누가 있습니까? 비의 사람이니 믿고 맡긴 겁니다.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이니 에페로를 향해 세간에서 정치적으로 떠드는 것보다 다른 쪽으로 떠드는 게 낫다 판단했을 뿐이고요.”
“저와 상의를 하고 안 하시고는 또 다른 문제이고요.”
도리스가 지지 않고 응수했다.
“에페로가 귀국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도 않을 마찰이었으니, 이쯤 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당신이 내게 상의하기만 했어도 이만큼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리스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쯤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는 건 바르데날도가 할 수 있는 최고치의 반항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그녀 역시 알았다. 하지만 이 분노는 어쩐단 말인가? 완전히 버려져야 할, 자신은 물론 이제 로아드네스의 근처에서 그 낯짝을 비추지 말아야 할 여자가 떡하니 눈앞에 있었는데. 그것도 어울리지 말아야 인물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건 물론이고. 로아드네스의 시선. 그리고 그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면서 얻는 시선들까지 죄다 독차지하고! 노우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황태자 부부의 대화를 얼핏 들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도리스가 잘 정리된 검지 손톱으로 엄지손톱의 거스러미를 바득바득 긁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 터지겠구나.’
주변을 의식해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두 눈은 전혀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분노를 삭이는 저런 모습을 하면 꼭, 일이 터졌다. ***
“전하…… 전하!”
가느다란 팔을 힘주어 끌어가는 손길은 아프진 않았지만 거칠었다. 널따란 등은 긴장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솟아 있었고. 아드리엔은 처음 보는 로아드네스의 모습에 당황해 속절없이 휘둘렸다. 겨우 인적이 드문 회랑에 들어서자 로아드네스가 빠르게 걷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드리엔은 잠시 고민했다. 에페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로아드네스에게도 공유해도 되나? 조금 더 확실해진 다음에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에페로가 버르장머리 없이 군 것까지 시시콜콜 다 이야기했다간, 그의 성격상 당장 돌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머리통을 부셔버리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몰라요. 나중에 생각을 정리하고 조용한 곳에서 둘만 있을 때 이야기해요.”
아드리엔은 에페로의 무례보다는 나중에 핵심만 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답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답을 듣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조소에 가까운 소리에 아드리엔은 멍하니 그의 입술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언젭니까?”
비웃음 섞인 답에 아드리엔은 잠시 당황했던 감정을 추슬렀다.
“우선은…… 며칠간은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해요. 아시잖아요.”
“……나는 당신에게 몇 번째입니까?”
아드리엔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일기도 했다. 아까 에페로가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이유가 뭐냐, 목적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아드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미래였다. 로아드네스와 함께 그릴 수 있는 미래. 과거의 복수를 위해 현재를 살아가지만, 건강한 몸을 얻었으니 자신도 이제 좀 사람다운 미래를 꿈꾸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진실을 알고 죽는 것과 진실을 덮는 대신 살아가는 것 중에 택하자면 전자였다. 그만큼 바보 같았던 지난날들을 다 지워내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 그 일. 일 중요합니다.”
“…….”
“나도 당신의 친구인데. 멀쩡한 친구는 쓰지도 않고, 당신이 계속 다른 친구를 만드니까 화가 납니다.”
로아드네스의 자조가 담긴, 짙은 조소 섞인 목소리가 정적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아드리엔은 그 목소리가 자신이 아닌 로아드네스 자신에게로 향하는 혼잣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당신의 ‘친구’이기는 합니까?”
“……당연하죠.”
마음이 아팠다.
아드리엔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답했다.
“당연하죠, 전하께서도 둘도 없는 친우라고 아까…….”
“그럼 무슨 친구에게 그리 비밀이 많습니까.”
에페로와 나눈 이야기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 이러는 걸까. 평소와는 극명히 다른 분위기에 아드리엔은 황급히 답을 이었다.
“에페로 황자가 자신을 부른 게 저라는 걸 눈치챘길래,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어요.”
생각해보면 에페로를 부른 것도 로아드네스와 상의한 일은 아니라 뜨끔했다.
“얼마나 더 친하게 지낼 겁니까?”
“필요한 만큼이요.”
필요한 만큼 더 친하게 지내겠다는 대답에 로아드네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로는 안 됩니까? 아니, 애초에 에페로를 불러들이지 않아도 내게 부탁했다면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명분이 필요했어요.”
“명분은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굳이 다른 사람을 불러와서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낮은 울림이었고, 흥분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드리엔은 로아드네스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정도는 힘들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결정한 거고요.”
“……내게 기대는 게 그리 어렵습니까?”
아. 그런 이유였던가. 아드리엔은 긴장으로 뻣뻣해진 목을 잠시 풀고,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 공손하게 앞으로 모았다. 그의 말이 맞다. 그에게 부탁했다면 조금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드리엔은 그가 부탁해서 황태자가 자신을 곁에 두는 것 보다, 황태자의 필요에 의해 곁에 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혹시라도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혹시라도 계획이 잘못되면, 내가 잘못될까 봐 그럽니까?”
“…….”
무언의 긍정에 로아드네스가 거칠게 자신의 뺨을 쓸어 올렸다. 얼굴빛은 창백했지만, 목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그 정도 신뢰도 그대에게 못 주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맞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은 다 믿고 부탁하고, 이용해도, 나에게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전하.”
“그게 날 미치게 해, 아드리엔.”
차가운 입김과 함께 쏟아지는 말에, 아드리엔은 답하지 못했다.
“내가 아직도 네게, 그 어린 날의 ‘안’으로 머물러 있다는 게.”
아, 상처받은 눈. 일렁이는 붉은 눈을 보자, 아드리엔은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네게 제대로 된 친구조차도 될 수 없는 것 같아서.”
로아드네스도 알았다. 아드리엔을 원망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이 참았지 않나. 내내 자신과 마음을 나누다가 다른 사내와 혼인하고 그를 사랑하기까지 했던 여자다. 진실을 알고 싶다며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고 있었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완전히 배제된 느낌을 받았다.
“친구, 좋습니다. 진실을 아는 것도 다 좋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든지 지금은 그 빌어먹을 친구로 지내는 거 다 좋다고. 그런데…… 오늘은 조금 힘듭니다.”
“전하.”
“그냥 나도, 나도 이 정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로아드네스는 끌려오듯 다가오더니, 아드리엔의 어깨를 그러쥐고 고개를 떨궜다. 듬직한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걸 보고 아드리엔은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은 한 방울도 없는데, 그는 우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드리엔은 속박된 사람처럼 그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끝없는 정적 끝에, 마침내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질투 나.”
“!”
“빌어먹을 그 새끼들…… 미안, 욕하는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오늘만 봐줘. 그 새끼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속은 타들어 가는데, 네가 그 사람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목이 타서 미칠 것 같았어. 미안해. 이런 못난 말이나 해서.”
“전하.”
“응. 알아. 지금의 나는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것도. 친구일 뿐인데도 이 진상을 떠는데, 그 이상을 말하는 순간 내가 어떻게 널 괴롭힐지 내가 더 무서울 지경이거든.”
그가 씹어뱉듯 읊조렸다. 스스로를 향한 짙은 경멸을 담은 목소리였다.
“그걸 몰랐어. 내가 원래 그런 놈이라는 걸. 그래서 이전에도 네가 다른 사내 곁에 있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고…… 결국 수도 근처에도 못 오고 변방에서 피만 보고 돌아다닌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