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너구나2022.03.19.
자신이 노에비안과 함께했던 2년 동안의 로아드네스를 상상하면, 아드리엔은 감히 입 밖으로 변명조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놈을 사람 만들어 줬던 게 너란 걸 잠시 잊었어.”
안타까워 붙잡힌 어깨를 빼고 감싸 안아주고 싶어 몸을 비틀었는데, 오히려 로아드네스는 더 강하게 어깨를 붙들었다.
“오늘만, 오늘만 봐주라. 다시는 입 밖에도 안 낼 테니까. 내가…… 네가 의지할 수 있는 그 진짜 친구라는 거 돼줄 테니까 오늘만…….”
떠올려보면, 로아드네스는 술을 자신보다 훨씬 많이 마셨었다.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네게 충분히 의지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저…….”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는 그를 향해 아드리엔이 입을 떼자마자 멀찍이 있던 닐이 그들을 불렀다. 계속 끼어들 타이밍만 재다가 겨우 끼어든 듯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계속 찾으셔서 말입니다. 급히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아드네스가 아드리엔의 어깨를 한 번 더 꽉 그러쥔 채 고개를 올리고, 몸을 세웠다. 목은 여전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도 조금 충혈된 것 같았지만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닐, 부인을 댁에다 모셔다드려라.”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는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 아드리엔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닐과 함께 사라졌다. 로아드네스는 곧바로 회랑 기둥에 머리를 쿵. 박았다.
“미친놈.”
하나만 해라. 하나만. 친구로라도 곁에 남고 싶다고 무릎 꿇고 애원할 만큼 간절하면 앞에서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참아 넘기든지.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면 아드리엔이 뭐라고 생각하든지 곁에 붙어 떨어지지 말든지. 곁에 오는 놈들을 모조리 다…….
“하.”
자신이 영문 모를 이유로 죽었는데 속 편하게 사랑만 하는 사람은 없다. 그걸 머리로 알면서도 결국에 참지 못하고 터트려 부담을 주다니. 미친놈. 정신머리 빠진 놈. 피가 터지기 직전까지 머리를 기둥에 박던 로아드네스는 이제야 자신이 약간 술에 취해 있었음을 인식하고 탄식했다. 황태자 궁으로 가는 내내, 그는 후회했다. 혹시라도 아드리엔의 계획이 잘못되더라도, 그는 아무런 영향도 없단 걸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스스로 증명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불현듯 찾아오는 광증을 사람을 구하는 데 쓰는 것이라든지. 붉은 눈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다는 괴담에 보란 듯이 전공을 세워 보인다든지. 워낙에 미친놈이라 제 형님마저 이기려 들 것이라는 세간의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늘 로아드네스보다 자신이 못하는 게 있으면 시무룩해지던 바르데날도의 기색을 알아채고 눈치껏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와는 달리 단 한 번도 비뚤어지지 않고, 성정에 맞지도 않는 황제위를 계승하겠다, 아우를 지키고 어머니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바르데날도의 다짐을 로아드네스는 지켜주고 싶었다. 바르데날도가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그래서 아무런 찝찝함도 없이 아드리엔과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건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소망이었다.
“왔구나. 파티장에 얼굴만 비추고 어딜 갔다 왔니.”
말도 없이 즉각 열린 집무실 문으로 들어서자 바르데날도가 그를 반겼다.
“파티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내가 너무 눈치 없이 오래 있다가 왔나 보다.”
바르데날도가 힘없이 웃으며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로아드네스는 착석을 권하며 술을 따라주는 바르데날도의 흠결 없이 하얀 손을 묵묵히 응시했다.
“왜 술을 드십니까. 잘 드시지도 않으시면서.”
“술이 있지 않고서야, 잠들 수 없는 밤이란다.”
목욕을 했는지, 바르데날도의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었다.
“오늘이 합방일이거든.”
바르데날도가 종마였다면, 바로 버려졌을 만큼 연약하게 웃었다. 로아드네스는 순간이지만 가슴이 아팠다. 아드리엔과 생이별을 시킨 장본인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바르데날도에게 무르게 굴 수만은 없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그에게는 이제 어머니 레티나 황후, 형님인 바르데날도 외에 지켜야 할,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었다. 바르데날도는 제게도 술을 따르더니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에페로를 동생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한단다. 손이 귀한 황실이 아니냐.”
에페로가 9황자 임에도 황위 계승 서열이 3번째인 이유는, 그 전의 그레이스 황후 소생의 황자 6명이 줄줄이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에페로와 나를 동복형제로 볼 만큼 닮기도 했고.”
그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를 가졌으니까. 로아드네스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황태자로서 그 아이를 견제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어머니의 소원은 내가 황위를 잇는 것이었고 그것을 지키려면 최소한의 견제는 필요해.”
바르데날도의 목소리는 봄날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부드럽고 산뜻했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솔직히 그 아카시아 백작 부인에 대한 평판이 썩 좋지 않은 것 역시 내겐 도움이 되고.”
로아드네스의 시선에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친우라지? 네게 항상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에페로가 머무는 동안 그 부인이 감시 역할을 하고, 다른 세력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었으면 하기도 해.”
“형님.”
“응.”
다정히 답하는 바르데날도의 표정이 유독 지쳐 보이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곧 원치도 않는 합방을 하러 가는 길만 아니었더라도 로아드네스는 소리쳐 묻고 싶었다.
‘왜 꼭 아드리엔이어야만 했습니까?’
아드리엔의 죽음까지 형님이 관여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발, 형님이 무고하길 바랍니다. 그 바람조차 아드리엔과의 미래를 위한 자신의 욕심이라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높은 자리에 올라 있고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저 가련한 얼굴을 보면 그러했다. 평생을 지켜온 사람이니 이 정도 미련은 어쩔 수 없겠지. 마음이 불편했다. 아드리엔이 자신에게 모조리 털어놓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가 바르데날도를 굳게 믿는 마음은 주신에게 맹세코 진심이었으니까.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느냐.”
그래도 물어볼 수 있다면 묻고 싶다.
“아드리엔…….”
그때,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던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바르데날도까지 그 소리를 인식했을 때,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형제의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 빈센토가 코르크 마개를 연 포도주가 쏟아지듯 집무실 안으로 요란하게 들어왔다.
“전하!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무례냐. 아뢰지도 않고.”
용기를 내 말을 하기 전, 술을 한 잔 더 마셔버린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흔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 아카시아 백작 부인께서 귀갓길에…….”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났다.
“나, 납치되셨습니다!”
들고 있던 술잔이 대리석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 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도 않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빛이 새어드는 곳마다 등나무 그림자가 지는 걸 보면, 수도 주변의 등나무 숲속인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살찐 돼지 같은 사내 몇몇이 우리 주위를 에워쌌다. 그래, ‘우리’ 말이다. 나는 곁에서 벌벌 떨고 있는 마지와 요나를 보며 입속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 되었다고 말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주무르던 하녀들이었다. 팔뚝만 한 길이의 검을 쥔 살찐 사내들이 음험한 눈으로 우리를 훑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어찌 여기까지 끌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지막 기억은 황궁을 나오던 중, 닐이 누군가의 부름을 받아 잠시 일을 끝내고 합류하겠다 한 것. 그길로 나는 아카시아 백작저에 잠시 들러, 마나석 광산과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 집무실을 살피고 다시 마차에 탄 것. 그리고 대공저를 향해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엄청나게 큰 굉음과 함께 다른 마차와 부딪힌 것처럼 박살이 나고 몸이 기우뚱했던 것뿐이었다.
“으으윽-.”
입안이 터졌는지 피비린 맛이 났다. 호위로 달고 다니던 기사가 20명이나 됐다. 본래 백작저에서 닐을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려 했지만 마나석 광산에 대한 책들을 찾아서 들어가는 길이라 마음이 급했다.
“마님, 마님 괜찮으세요?”
“마, 마, 마, 마님……!”
내가 앓는 소리를 하자 팔만 결박당한 채 앉아 있던 마지와 요나가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야 하는데 입에 꽉 물린 재갈 때문에 혓바닥이 따갑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마차가 반쯤 박살이 났는데 몸이 성할 리 만무했다. 누굴까. 누가 초저녁에 귀가하는 귀부인의 마차를 습격했을까. 온갖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데, 팔다리가 모두 결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나는 꾸물꾸물 앉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동안 낄낄거리며 내가 꿈틀거리는 걸 지켜보는 사내들의 시선 때문에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껴야 했다.
“마, 마님께서 정신을 차리셨으니! 얼른, 얼른 보내주시오! 이게 무슨 짓이오! 이분이 누군지 알고……!”
마지가 갖은 용기를 끌어내어 낮게 울부짖자 달빛에 의지한 어두운 창고 안에서, 사내들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맙소사…… 이런, 이런……!”
“당신이 어떻게?!”
땅딸막한 키, 지팡이를 짚고 골골대며 걸어오는 미약한 걸음걸이. 불길한 기운만 감도는 이곳에서, 마지와 요나의 낮은 탄식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그러게…… 적당히 나대셨어야지요.”
작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 밑으로, 그 인영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노쇠하고 주름진 얼굴. 축 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가짜 보석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싸늘한 얼굴을 한 대공저의 하녀장, 소피였다. 하지만 그녀의 엄숙한 얼굴은 처참한 내 꼴을 보자마자 서서히 금이 갔다. 몸을 꿀렁이며 웃음소리를 흘리는 나 때문일 것이다.
‘……너구나.’
재갈을 입에 물고, 온몸이 묶여 눈물을 줄줄 흘리고서도…….
‘아무리 찾아도 단서 하나 없던. 대공저에 있던 도리스의 눈과 귀.’
내 눈은 공포는커녕, 환희만이 가득한 채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