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친구 안 해2022.03.23.
내가 노에비안도 없는 대공저에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에페로와 빅토르의 수행을 굳이 환영식까지 쫓아가서 한 것도. 굳이 도리스에게 황태자의 보좌관이 되었다며 쓸데없는 도발을 한 것도. 도리스의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사 가스팔은 황태자의 사람. 하녀 애니는 카스타냐 공작의 끄나풀. 도리스의 사람은? 도리스를 자극해야만 정체를 드러내겠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로써 대공저 악마들의 수장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웃어?”
가뜩이나 주름진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 왈칵 구겨졌다. 구부정하던 소피의 몸이 서서히 곧추세워지자, 요나의 낮은 비명이 울렸다. 내 얼굴을 확인한 소피는 더 이상 노쇠하고 죽기 직전 같아 보이는 약한 노파가 아니었다. 여전히 땅딸막했지만, 굽어 있던 등이 똑바로 펴지자 마지랑 비슷한 키가 되었다.
“에그머니나!”
마지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금발이 얼룩덜룩 섞인 묘한 갈색 머리카락에 빛이 서린 검은 눈동자. 주름진 얼굴은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병들어 보이지 않는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며 남자 중 하나에게 턱짓했다. 이가 몇 개 빠져 더 공포스러운 칼날이 내 발목과 드레스 자락을 포대 자루처럼 묶어두었던 밧줄을 단번에 끊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다리가 비명을 지르듯 찌릿찌릿했다. 내 발목을 살피던 음험한 시선들이 그곳에 머물자 요나가 황급히 치맛자락을 덮었다.
“블리에 님, 제가…… 밧줄을 풀게요.”
고통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낄낄대는 웃음소리들이 깔리자, 요나가 재빨리 속삭였다. 어떻게 푼다는 거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풀어서 뭘 어쩌려고……? 요나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내 뒤에 물러나 몸을 숨겼다. 동시에 소피가 낮게 웃으며 몸에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어던졌다. 허리춤에 단검이 몇 개나 꽂혀 있는 가죽띠를 매고, 손에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이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검이 들려 있었다.
“불여우 같은 것이, 감히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목숨으로 사죄하는 건 당연하다.”
익히 알던 쌕쌕대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깊은 산속, 그보다 더 깊은 동굴 안에서 음산하게 지껄이는 마녀 같은 목소리였다. 근처에 있던 사내 하나가 내 뒤통수에 있는 재갈의 매듭을 거칠게 풀었다. 나는 바짝 마른입을 추스르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등 뒤에 결박된 손목이 자유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흠칫했다. 요나가 아무렇지 않게 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여기서 나보다 높은 사람이 없는데 그리 들으니 우습구나.”
“건방진 년.”
목이 너무 말라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꾹 참고 말하자 곧바로 욕이 돌아왔다.
“도리스 카스타냐가 나를 죽이라 했느냐?”
소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 표정에 어쩐지 허탈해졌다. 나는 마지, 요나, 마리 세 명의 하녀를 대공저에 상주시키며 사용인들을 감시해왔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내가 홀로 대공저에 남아 패악을 부리며 사용인들을 하나씩 갈아치운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니었다. 가장 도리스의 사람이 아닐 것 같은 자들만 다른 곳으로 잠시 보냈을 뿐이었다.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던 이름뿐인 하녀장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천한 것이 감히, 귀한 분의 존함을 마음대로……!”
“도리스가 마음이 급했나 보구나.”
도리스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노우라에게 듣기로 오늘은 그녀와 바르데날도의 합방일이기도 했고 후에 있을 황제 폐하의 탄신연 준비까지 정신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 말대로 천한 것이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항상 방비하고 있었는데.”
“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내가 믿을 것이라곤 뒤늦게 백작저로 도착해 내가 없는 걸 확인한 닐이 마차가 반파된 흔적을 쫓아 여기로 오는 것, 혹은 대공저로 갔다가 내 부재를 알아채 주변을 수색하는 것뿐이었다.
“도리스가 이리 나올 줄 알고, 내가 죽거나 실종되거나 둘 중 하나라도 발생했을 시 도리스가 의심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는 뜻이지. 아마 지금쯤 내 흔적을 쫓아 찾아오고 있겠군.”
“말도 안 돼! 세 치 혀 놀리지 마라!”
“무엄하다!”
새된 비명은 내게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시퍼런 검날을 빛내며 다가서는 소피를 막은 건 뜻밖에도 마지였다.
“……마지?”
마지가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 앞을 우뚝 막아섰다.
“대공비가 되지 못하셨더라도! 네가 모셨고, 앞으로 계속 모시게 될지도 모르는 분인데! 어떻게 이런 짓을! 마님께서 네게 뭘 어찌했다고? 대공저에서 밥만 축내는 인력을 대공께서 변방으로 쫓겨가셨어도, 내쫓지도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는데! 감히…… 감히……!”
아, 마지!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마지의 한마디 한마디를 비웃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썩 물러가라! 우리 마님 털끝 하나 건들지 마!”
공포에 질려 내지르는 비명 같은 훈계는 안타까웠고, 동시에 너무나도 감격스러웠다. 창백하게 질린 중년의 하녀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맨몸으로 맞섰다.
나보다 작은 마지가 그토록 커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마지는 블리에의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처음에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던 하녀였기에 감회는 더 남달랐다. 죽을 각오로 도발해서, 약간의 진실이라도 알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곧바로 흩어졌다. 이 몸에 들어와서 얻어낸 소중한 사람들을 바보같이 잃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들끓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나는 이 몸에 들어온 이후 줄곧 블리에의 건강함에 놀랐지만, 오늘처럼 기이한 흥분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소피의 허리춤에 줄줄이 달려 있는 단검에 자꾸만 시선이 뺏겼다.
“살살하세요, 블리에 님…….”
바람처럼 가볍게 속삭이는 요나의 목소리가 땅에 떨어져 있던 자신감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피를 끓게 했다. 이상했다.
“천한 것은 비켜라.”
싸늘하게 내뱉은 소피가 지체 없이 마지를 밀고,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병들지 않은 노파는 한때 현역으로 활동했던 자객이었던 게 분명했다. 살기를 띠는 눈이 일반인이라 보기에 어려웠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퍼런 칼날이 곧바로 내게 쇄도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쇠 마찰음이 들리자, 나는 소름이 돋기는커녕 전율했다.
“이……!”
노파는 노파인지라 힘이 충분치 않았던 걸까, 아니면 이 블리에의 경이로운 건강함이 오늘따라 심하게 넘쳤던 것일까. 옆으로 급히 비켜선 내 손이 정말 기적처럼 노파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서슬 퍼런 검에 맞섰다. 뿐만 아니라 이 몸이 기억하는 대로, 단검을 강하게 그러쥔 손은 망설임 없이 노파의 손을 찌르고 목덜미로 날을 가져갔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달려오는 마차를 보고 생각을 하기도 전에 황급히 피하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노파의 번들거리는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동시에 단검을 쥐지 않은 내 손이 노파의 멱살을 바짝 그러쥐고 단검을 바짝 들이댔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노파의 눈에 대고 나는 서늘하게 말했지만 동시에 심장이 저릿했다. 이상했다.
‘블리에, 너 도대체…… 뭐 하는 애야?’
검을 뽑아 들지 않았던 몇몇 사내들까지 한꺼번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더 이상한 일은 그게 겁이 나기는커녕, 마지나 요나만 없었더라도 서넛은 거뜬히 해치울 수도 있을 거란 기묘한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작은 빛만 흘러들어오던 창고에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에서 들린 소리는 모두의 신경을 예민해지게 했다.
“누가 오고 있군. 뜸들일 시간 없다. 여자는 물론이고 하녀장도 죽여 몰살한다.”
“뭐, 뭐라고?!”
쾅! 소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굉음과 함께 차가운 겨울바람이 창고에 곧바로 불어닥쳤다. 매정한 얼굴로 다가오던 사내들은 물론이고 내 표정까지 창백해졌다. 달빛을 등지고 서서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육중한 나무문을 부셔버린 사람이 있었다.
“아드리엔!”
로아드네스였다. *** 처참하게 나뒹구는 마차 바퀴며, 쓰러져서 숨만 겨우 붙어 있는 기사들이 꿈틀거리는 꼴을 보자 로아드네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도 당신의 친구인데. 멀쩡한 친구는 쓰지도 않고, 당신이 계속 다른 친구를 만드니까 화가 납니다.’
성마른 손길이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을 마구잡이로 쓸었다.
“미친 새끼.”
‘친구, 좋습니다. 진실을 아는 것도 다 좋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든지 지금은 그 빌어먹을 친구로 지내는 거 다 좋다고. 그런데…… 오늘은 조금 힘듭니다.’
“하나를 갖고도 만족을 못 해서…….”
불안함으로 끓어오른 단전은 후회라는 감정을 들이붓자 화산처럼 폭팔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제 입으로 지껄였던 말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내가 그딴 말이나 해서…….”
그를 달래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얼굴을 떠올리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온몸을 지배했다. 마침내 흔적을 찾은 수색대 쪽으로 말을 달리며 수많은 말발굽 자국들을 발견했을 때, 그의 심장은 멈추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하, 전하! 놈들이 몇 명인지도 모르는데 그리 섣부르게 먼저 가지 마십시오!!”
쿠로세다 남작 부인 실종사건을 조사했을 때, 그때도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겼던 자들을 기억했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은 죽은 게 기정사실이 된 사람이 아니던가?
‘내가 당신의 친구이기는 합니까?’
아드리엔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그딴 것이었다는 떠올리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 살기로 가득한 창고 안에서,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내게 선명히 박혀 있었다. 처음에는 환희에 가까운 안도감, 그리고 후에는 분노가 선연히 떠오르는 눈은 찾던 사람을 마주한 눈 치고는 온몸이 오싹할 만큼의 살기를 띠었다. 재갈을 물린 흔적이 분명한 터진 입술이며, 결박된 흔적이 선연한 하얀 손목에 그의 시선이 느리게 옮겨갔다. 당연히, 요란스레 뒤를 따라오는 그의 기사단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군홧발이 나와 제일 가까이 붙어서 있는 사내부터 짓밟고 손아귀 힘으로 얼굴을 짓뭉갰다. 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이는 사람의 정체를 나뿐만 아니라 사내들은 단번에 알아봤다. 혼자서 마물 수십 마리를 상대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을 그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직 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는데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 맨손에 뭉개지는 이들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마저도 포위하며 달려오는 기사단에 의해 진압될 것이지만 말이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내 주위의 너덧 명을 상대한 로아드네스는 이어 내가 붙잡고 있던 소피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달랑 들고는 쓰레기처럼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힘주어 단검을 쥐고 있던 내 손이 곧바로 거친 그의 손에 감싸였다. 쨍- 소리를 내며 떨어진 단검과 함께 긴장하고 있던 내 몸이 무너졌다. 빛을 등져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숨이 막힐 만큼 그에게 끌어 안겨 있었다.
“아드리엔, 아드리엔…….”
술 냄새, 땀 냄새, 그리고 늘 그에게서 나던 라벤더 향이 섞인 체향을 맡자 나는 그제야 몸에 힘을 풀 수 있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죄다 갈려버린 듯한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탄식처럼 튀어나왔다.
“내가 너한테 그딴 소리나 해대서…… 내가 널 저택으로 데려다줬어야 했는데…….”
무너진 내 몸을 그대로 주저앉은 채 끌어안은 로아드네스의 몸은 방금까지 몹쓸 짓을 당한 나보다 훨씬 떨리고 있었다.
“병신 같은 나 때문에 네가…….”
네 잘못이 아니야. 도리스가 언제고 움직일 줄 알았어. 이건 내가 놓은 덫이야. 이런 과격한 방법으로 그녀의 사람이 정체를 드러낼 줄 몰랐고.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일 뿐.
“로…….”
목이 콱 막힌 것 같이 매여서, 나는 잠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못 참겠어.”
숨도 못 쉴 만큼 꼭 끌어 안겨서일까, 단단하고 떨리는 가슴을 밀어 내려 해도 도저히 밀리지 않았다. 그는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 끌어당기는 늪처럼 나를 옭아맸다.
“나 네 친구 안 해.”
나는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걸 멈췄다. 그의 갑작스러운 선언이 내겐 충격으로 와닿았다. 목구멍 안에서 울컥, 하고 핏덩이가 치솟아 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무슨 뜻일까?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게 화를 냈던 로아드네스를 떠올리자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은 않았다. 씨근대는 가슴이 맞붙어 있었고, 뜨거운 그의 몸에 안겨 있어도 나는 순간 한기를 느꼈다. 짐승이 앓는 소리와 비슷한 으르렁거림이 내 귓전에 곧바로 스며들었다.
“친구 안 해. 이제 그런 거 안 할래, 나.”
나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일렁이는 붉은 눈과 마주하자, 그의 선언이 내게 실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말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