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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나, 안 죽어 (94/171)

94화. 나, 안 죽어2022.03.26.

나도.

16558468457526.png‘나도, 네 친구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미래를 그리고 싶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은 그냥 느낌만이 아니었다. 나를 끌어안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로아드네스의 어깨를 힘없이 툭툭 때리며 그에게서 겨우 벗어났다. 그 작은 틈도 불안했던지 그가 다시 끌어당기기 무섭게, 나는 컥! 하는 소리를 내며 핏덩이를 게워냈다. 로아드네스는 숨 쉬는 걸 잊은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괴롭게 몸을 뒤틀며 난리 중에 느끼지 못했던,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 옆구리를 더듬었다.

16558468457531.png“아드리엔!”

16558468457526.png“으윽…….”

단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구석에서 벌벌 떨면서 사태를 파악한 마지와 요나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16558468457539.jpg“저 여자, 저 여자가 그런 거야! 저 망할 년!”

마지의 비명소리가 창고를 울리자마자, 구석에서 잠깐 의식을 잃었던 인영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바깥 상황을 정리하고 굴러 들어오듯 급히 들어선 닐은 요나가 방방 뛰며 가리키는 곳으로 가 노파를 포박했다. 노파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로아드네스를 확인하고 벌벌 떨면서도 나를 향해 웃었다. 로아드네스가 등장해서 내가 얼이 빠진 사이 찌른 게 분명했다. 아까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물밀 듯이 몰려오는데, 로아드네스가 황급히 나를 고쳐 안았다.

16558468457526.png“로, 로아드…….”

16558468457531.png“아드리엔, 아드리엔……!”

핏덩이를 토해낸 입은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더 괴기스러울 것이다. 왈칵 일그러진 로아드네스의 눈이 정신없이 나를 살피고, 동시에 커다란 손이 아직도 단검이 박힌 옆구리로 향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연한 고통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16558468457526.png“아파, 아파…….”

16558468457531.png“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제발. 제발 죽지 마.”

나는 희게 질린 로아드네스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나는 이 애를 사랑하는구나. 견디기 힘들만큼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고, 피가 드레스 반쪽을 흠뻑 적실 만큼 흐르는데. 소피에게 단검으로 맞섰을 때도. 마치 아드리엔의 몸으로 죽었던 날처럼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도…….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아닌,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로아드네스가 이런 나를 보고 괴롭거나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나 할 만큼.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마다 눈에 밟히는 얼굴이 어찌 이 남자일 수 있을까.

16558468457526.png‘그만큼, 로아드네스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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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웃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설사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아주 조금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노에비안을 완전히 지워낸 것이다. 홀로 남을 로아드네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지는데, 그게 어찌 그리 기쁜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로아드네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대공저로 가는 것조차 치를 떨며, 피투성이인 아드리엔을 끌어안고 거의 버려두는 곳이나 다름없었던 자신의 사저로 이동했다. 급한 대로 불러온 의사는 아드리엔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한 발짝도 저택에서 나갈 수 없음을 통보받았다. 명령을 내린 상대가 ‘그’ 2황자이니 당연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로아드네스는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아드리엔이 누워 있는 침대 곁을 지켰다. 그러다 아드리엔이 쓰러진 지 4일째 되는 날부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변 사람들을 닦달했다. 닐은 그게 불안함을 표출하는 주군의 방식이라 생각했다. 로아드네스는 희게 질린 아드리엔의 손을 차마 잡지도 못하고 노려보듯 응시하다가 어쩌다 끙끙대는 소리라도 입에서 흘러나오면 그게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사용인들을 죄다 깨우고 의사의 멱살을 끌어다 그녀의 앞으로 대령했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부터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황태자비의 시녀이자 황태자의 보좌관이기도 한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문을 냈다. 아드리엔의 방식대로 조용히 움직이려 했으나, 그리 소문내지 않으면 이름난 의사를 몰래 데려오는 게 힘들다는 판단이었다. 곧바로 아드리엔을 아카시아 백작저로 옮긴 로아드네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의사를 족치는 중이었다. 식은땀만 흘리고, 악몽을 꾸는 것 같이 괴로워하는 아드리엔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자연히 아드리엔의 시신을 대공저 지하에서 마주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16558468457531.png“……죽지 마.”

고작 그 한마디밖에 내뱉을 수 없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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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속은 잔인했다. 찬란했던 어린 시절을 보여준 후, 배신과 기만으로 얼룩진 진실을 깨닫는 그 순간으로 끊임없이 나를 끌어내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노에비안과 부부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다정히 앉아 있는 내 모습. 그리고 그 바보같이 순진하고 어리석은 여자에게 청혼하겠다며 전장으로 뛰어든 어린 소년, 로아드네스의 뒷모습. 세기의 커플이라며 떠들어대는 신문 속. 수줍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절망했던 로아드네스의 모습에 대한 잔인한 환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불신하고, 절망하다가 마침내 분노와 체념으로 얼룩진 얼굴로 무너지는 그를 나는 멀리서 울면서 바라보았다. 나를 버리지 마. 제발, 도망가지 마. 언제부터인가 계속 들었던 목소리가 귓속에서 점점 커졌다. 나를 버리지 마 제발. 죽지 마. 죽지 말라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는 아득했던 환상을 벗어나 눈을 번쩍! 떴다. 분명 얼굴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을 햇살은 눈 속에 스며들자 고통이었다. 나는 여전히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내 앞의 인영을 보려 애썼다. 환상 속 절망하던 얼굴보다 훨씬 무너진 얼굴의 로아드네스가 눈앞에 있었다.

16558468457526.png“안 죽어…… 나, 안 죽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는 말치고는 미친 사람 같아 보일 수 있었지만, 아직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던 나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절로 그런 말부터 나왔다. 죽은 시신이 깨어나는 걸 보는 것 같던 눈이 내 말을 듣고 점점 커지더니 왈칵 일그러졌다. 덩달아 일그러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고 목의 핏대를 세운 로아드네스는 울음 섞인 탄식을 삼키고 미친 듯이 설렁줄을 흔들었다. 잘 훈련된 기사처럼 곧바로 달려들어 온 의사는 다섯 명이나 되었다. 나는 그들이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하면서 멀찍이서 날 응시하는 로아드네스를 힐끔대며 보았다. 그는 꿈속에 있는 사람처럼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의사들이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약을 올리겠단 말을 하고 나갈 때까지도 로아드네스는 입 밖으로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메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물잔으로 손을 뻗었을 때 성큼성큼 다가와 대신 잔을 들고 내 입에 갖다 대줬다. 아기 새처럼 물을 받아마신 나는 그제야 내게 다가온 로아드네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항상 매끄럽게 빛나던 얼굴이 푸석해지고, 말끔하게 면도되어 있던 턱에 굵은 털이 삐죽삐죽 올라왔다. 늘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하던 입술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사람처럼 거칠고 부르터 있었다. 물잔을 든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기자, 그는 순순히 끌려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얼굴은 화난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수염이 자라난 그의 턱을 쓸어보았다. 그제야 그가 움찔했다.

16558468457526.png“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미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로아드네스가 낮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16558468457531.png“네 얼굴이 더 상했어.”

16558468457526.png“아.”

16558468457531.png“네가 지금 며칠 만에 일어난 건지나 알아?”

원망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굳어 있는 얼굴에서 나오는 극적인 감정변화에 내가 움찔하자, 로아드네스는 제 턱 끝을 쓸던 내 손가락을 꽉 잡고 그대로 나를 품에 안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체향과 희미한 약 냄새가 났다. 아마 이 방에서 내내 내 입에 약을 흘려 넣고 있던 건 그였으리라.

16558468457531.png“네가 죽어버리면 용서 안 하려고 했어.”

16558468457526.png“!”

16558468457531.png“너 말고, 나.”

사람이 눈물 없이 흐느낄 수도 있구나. 깊은 우물 속에서 끌어 올려진 물처럼 축축한 목소리였다. 그는 울지 않는데, 내가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야 완전히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환상 속 로아드네스의 가엾고 커다란 뒷모습이 자꾸 생각나 코끝이 찡해졌다.

16558468457531.png“네가 죽었으면, 나는 따라 죽었을 거야.”

그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드리엔의 시신을 확인한 날, 그는 가차 없이 무시무시하게 시퍼런 검날을 제 목줄기에 갖다 댄 남자니까. 로아드네스는 내가 일주일간 눈을 뜨지 않았으며,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했다. 그 전에 마차 사고로 머리를 크게 박고 정신을 잃기도 했었으니. 혹은 영혼과 육체의 주인이 다르니 이만한 충격에도 약한 건가 싶기도 했고. 그리 생각한 것을 말하자, 로아드네스는 창백한 얼굴로 호위를 적어도 50명씩은 데리고 다니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본인이 직접 호위하겠다는 말까지.

16558468457539.jpg“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부인.”

닐 역시 마음고생을 했는지 조금 핼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문을 열고 선 닐을 보는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싸늘했다.

16558468457531.png“고향으로 돌아가라니까 뭐하러 아직까지 남았나?”

16558468457539.jpg“죄송합니다. 저도 부인이 걱정되어서…….”

나는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닐은 분명 초췌할 내 얼굴을 힐끔 보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진심으로 사과했다.

16558468457539.jpg“제가 부인을 먼저 모셔다드리고, 일을 보았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16558468457526.png“괜찮아요.”

16558468457531.png“안 괜찮아.”

마음만 앞서 닐을 기다리지 않고 대공저로 향한 건 나였으니까 용서를 해주려는데, 로아드네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깊게 한숨 쉬었다.

16558468457539.jpg“……죄인에게 부인의 소식을 알렸더니 뵙게 해달랍니다.”

16558468457531.png“그 정도 고문은 받을 만한가 보네. 다른 놈들도 입 열 때까지 조져놔. 부인을 뵙게 해달라느니 뭐니, 개소리 지껄이지 못하게 입을 지져놓던지.”

16558468457539.jpg“……입은 있어야 말을 할 거 아닙니까.”

16558468457526.png“갈게요.”

얼굴 가득 죄송한 표정이면서 옳은 말로 말대꾸는 잊지 않는 닐에게 로아드네스의 화가 닿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내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자, 닐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나는 얇은 네글리제 차림임을 그제야 인식했다. 로아드네스가 닐의 아킬레스건을 가차 없이 발로 까고, 그가 황급히 방을 나서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요나가 들어왔다. 열린 문밖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요나의 팔에는 이미 실내용 가운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사실 옆구리는 아직 욱신거렸지만, 요나의 도움으로 가운을 꿰어 입는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16558468457531.png“그리 웃어주지 마, 이제 안 속으니까.”

16558468457526.png“좀 속아주면 안 되나?”

투정을 부리듯 말하자 대번에 얼빠진 얼굴을 한 로아드네스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더니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소파 팔걸이에 대충 걸터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그는 나무랄 새도 없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너무 놀라 옆구리가 따끔했는데, 굳게 다물려 있던 로아드네스의 입이 살짝 느슨하게 풀리는 게 눈에 바로 들어왔다.

16558468457531.png“네가 대놓고 날 속여도, 나는 속아줄 수밖에 없는 놈이야.”

속아주겠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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