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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사랑해 (95/171)

95. 사랑해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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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저 사용인들은 밖으로 나온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반가운 얼굴을 했지만, 로아드네스 때문인지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1655846861684.png“마지, 마지는?”

16558468616847.png“쉬라 했어.”

1655846861684.png“하녀장이 내게 검을 들이미는데, 마지가 그 앞을 막아섰어.”

다시 생각해도 감격스러운 장면이었기에, 나는 살짝 울음을 삼키고 말했다.

16558468616847.png“……나보다 낫군.”

로아드네스는 낮게 읊조리며, 저택 밖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대공저와는 달리 백작저는 따로 지하감옥이 없어서인지 마굿간을 비우고 임시로 감옥을 만들어둔 듯했다. 대신 경계는 삼엄했는데, 빈센토가 나를 보자마자 안부를 묻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로아드네스에게 안긴 모습을 소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쳤더니, 로아드네스가 순순히 날 내려주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피떡이 되어 있는 사내들이 한 우리에 가둬진 채 널부러져 있었고, 가장 안쪽의 우리에 소피가 있었다. 그녀는 며칠 새 10년쯤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는데, 구석에서 떨고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자 바득바득 기어와 나무 창살을 붙잡고 일어섰다.

1655846861686.jpg“내가, 내가 다 말할게요! 내가 다 말한다고!”

나는 잠자코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사내들이 나는 물론이고 소피까지 죽여 몰살하려 했던 걸 우리는 같이 들었었다. 소피는 그때를 잊지 않았는지 퍽 필사적일 만큼 말을 토해냈다.

1655846861686.jpg“황태자비. 황태자비가 시켰어요! 도리스 카스타냐! 아니, 이제 도리스 론타지.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당신을 죽이라고 했어요!”

16558468616847.png“……또 뭘 시켰나?”

1655846861686.jpg“그 여자가, 그 여자가! 죽은 대공비를 괴롭히라고, 대공저에서 고립시키라 했어요! 나는 그저 못된 하녀들이 가엾은 대공비를 모욕해도 외면한 죄밖엔 없어요! 그리고 대공비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으니, 결국엔 당신이 대공의 마음을 꿰찰 수 있었지요! 아닌가요?!”

잠자코 지켜보던 로아드네스의 이가 으득 갈리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렸다.

1655846861686.jpg“대공비는 외롭게 갔지만, 그 덕에 당신이 한때나마 차기 대공비가 될 수 있었지요! 내 공도 인정해줘야 해요! 살려줘요! 제발! 당신이 그리 곱게 있을 수 있는 건 다 내 덕이나 마찬가지니까!”

16558468616847.png“……도리스가 왜 죽은 대공비를 괴롭히라 시켰나?”

1655846861686.jpg“뻔하지요. 질투지! 그 여자가 금발로 염색하고 피레타 공녀를 따라 한 세월이 얼만데!”

16558468616847.png“도리스가 대공비를 죽이라고도 했나?”

1655846861686.jpg“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에요! 나는 죽이지 않았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였던 데다가 늘 황실에서 보낸 하녀들의 눈치를 보고 살았으니, 말라 죽을 만도 하지! 도리스야말로 대공비가 독 따위를 먹고 죽는 것보단 외로움과 괴로움에 잠겨 죽길 바랐을걸?”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이유 없는 괴롭힘을 사주하고 부추긴 게 도리스라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듣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이미 노에비안에게 다 갈려버린 마음인지라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그때, 내 몸이 갑자기 공중에 두둥실 떴다. 로아드네스가 기어코 나를 안아 든 것이었다. 그 역시 단단히 버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주변 풍경을 제대로 보기 힘들 만큼 성큼성큼 거칠게 저택으로 들어온 로아드네스는 힘든 기색은 하나도 없이 백작저 내의 계단을 서너 개씩 올라 다시 날 침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문을 쾅 하고 닫기 무섭게 내 두 발이 바닥에 닿고, 그가 나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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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68616847.png“……다른 놈이랑 결혼할 거면 행복하기나 하지 그랬어.”

까끌까끌 올라온 그의 턱수염이 내 귓불이며 목덜미에 닿았다. 내내 조용히 울음을 삼키던 그는 결국 무너졌다.

16558468616847.png“매 순간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버텼어?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저런 개소리나 듣고…….”

이미 다치고 아물고를 반복하며 흉이 진 내 마음은 생각보다 덤덤했는데, 로아드네스는 저가 공격당한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절절 끓는 분노가 눈물이 되어 내 어깨를 적셨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1655846861684.png“매 순간은 아니었어.”

16558468616847.png“거짓말. 이 여자 몸에 들어와서부터, 장례를 치르는 100일 내내 넌 지옥이었을 거야. 네 지옥에 나도 일조했을 테고.”

그는 내 정체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떠올리는지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욕지기를 씹어뱉었다.

1655846861684.png“매 순간 절망하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던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때마다…….”

나는 그를 떼어내고 뒤돌아, 일그러진 그의 눈가를 쓸어주며 웃었다.

1655846861684.png“아드리엔은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괜찮았어.”

나는 여전히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단단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 두 손바닥에 그의 심장이 쿵쿵대는 것이 느껴졌다.

1655846861684.png“사랑스럽고, 현명하고, 용기 있는 아드리엔이라고 착각하는 바보가 있어서…… 늦었지만 진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버텼어.”

또다시 찾아온 죽음에 근접한 느낌, 그것을 눈앞에 두고 떠올렸던 사람의 얼굴. 진실만 알게 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내가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있었던 또 하나의 진득한 미련. 환상 속에서 끝없이 절망하고 좌절하던 소년, 그리고 남자의 뒷모습. 나는 떨고 있는 그의 가슴을 쓸어 올려 내가 없는 세상에서 죽음을 택했던 남자의 목에 남은 흉터를 쓸어보았다. 순간,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정수리로 쏟아졌다. 옆구리가 찌르르하고 당겼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보다 더 초췌한 몰골을 하고도, 내가 안쓰러워 미치겠다는 로아드네스가 눈에 가득 들어오자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1655846861684.png“나도 친구 하기 싫어.”

처음은 충동적이었지만, 멍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갖은 용기를 다 꺼내 겨우 입을 열었다.

1655846861684.png“나도 너랑 더, 더 가까워지고 싶어.”

욕심인 거 알지만.

1655846861684.png“네 말대로 네가 이 몸에, 이 입술에 입 맞춘다면 조금 슬플지도 몰라.”

16558468616847.png“아드리엔?”

1655846861684.png“난…… 난 네가 너무 소중해, 안. 이전보다 네가 더 소중해졌어. 내가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정말 네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거야. 나도 널 놓치고 싶지 않아…….”

뜻밖의 고백에 로아드네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1655846861684.png“하지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누가 내 적인지 친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아무리 네가 괜찮다고 해도, 널 또 다른 위험에 빠트릴까 봐 너무 걱정돼. 블리에의 몸으로 소중한 너와 뭘 한다는 게 아직은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내게 시간을 줄 수 있어?”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목을 감싼 팔에 더 힘을 주었다.

1655846861684.png“이런 날…… 네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로아드네스는 아주 잠깐 아득한 눈을 하고 날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내 용기는 여기까지였다.

16558468616847.png“이해해주고 말고가 어디 있어?”

그는 더 기다리지 않고 어리광을 부리듯 내 목덜미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귓전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16558468616847.png“네가 그런 말을 나한테 한 이상…… 네가 이 몸이 아니라 저 노망난 할망구 몸에 들어앉아도 난 널 못 놔.”

1655846861684.png“그런…….”

16558468616847.png“그거 알아, 아드리엔?”

로아드네스의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꾹 제 가슴으로 눌렀다. 내 귀에 닿은 그의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뛰고 있었다.

1655846861684.png“뭘?”

16558468616847.png“네 생각보다 나는 더 미친놈이거든.”

얼굴이 보고 싶어 몸에서 조금 떨어지자, 곧장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16558468616847.png“입술 좀 못 비비적댄다고, 내가 널 포기할 것 같아? 네가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 남의 옆자리에 있었을 때도, 마음이 꺼지지 않아서 전장을 돌았던 나야.”

오묘하면서도, 약간은 얼떨떨하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네가 입을 맞추면 좀 슬플 것 같다는 황당한 말을 들은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환희라는 이름의 소나기가 그의 머리 위에 쏟아진 양 서서히 밝아지는 표정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16558468616847.png“네가 원하면, 머리를 죄다 밀어버리고 저 멀리 이국에 있는 수도승인가 뭔가가 돼줄게.”

흘러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하는 그를 나무라듯 통, 때리려는데 로아드네스는 맞아주자마자 크고 뜨거운 손으로 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다친 옆구리가 터질까 봐 걱정될 정도로 숨 막히게 날 끌어안았다.

16558468616847.png“사랑해.”

아, 이런 기분이었을까.

16558468616847.png“사랑해, 아드리엔.”

더 가까워지고 싶다던 내 말을 들은 로아드네스의 기분은. ***

16558468616847.png“그 일기장, 내가 좀 해석해봤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느라 한참 아드리엔을 안고 중얼거리던 로아드네스는 해가 다 저물어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 심장을 저 하늘 위로 붕 띄웠다가 처박고, 다시 붕 띄웠다가 처박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던 아드리엔이 일기장 이야기를 꺼냈기에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16558468616847.png“일상을 적은 게 아니라, 고유한 명사가 많았습니다.”

몇 분 전부터 아드리엔이 눈썹을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다시 서로 존대하자는 의사를 표했기에 로아드네스는 군말 없이 따랐다.

1655846861684.png“그 말을 꼭 이렇게 손을 잡고 해야 하나요?”

16558468616847.png“안 믿기는데 어떡합니까?”

점잖은 왼손과는 달리 오른손으로는 아드리엔이 어디 도망가기라도 하는지 꽉 잡고 말을 하는 통에, 아드리엔은 조금 답답해져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밀어내자마자 간식을 빼앗긴 코완 같이 시무룩해진 그의 얼굴을 보면, 보이지도 않는 귀가 축 늘어지는 것 같은 묘한 환영이 덧씌워지는 게 아닌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테이블 밑에서 은밀하게 잡아 오는 손을 뿌리치기에, 지금 아드리엔의 마음은 로아드네스에게 많이 물렁물렁해진 상태였다.

1655846861684.png“아무튼, 그래서요?”

또다시 슬금슬금 뻗어져 오는 손에 항복하고, 어린아이 딸랑이를 쥐여 주듯 손을 내준 아드리엔은 그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을 애써 모른 체 하고 되물었다.

16558468616847.png“약초나 시약 같은 것들에 관한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그나마 론타에서 구할 수 있는 사전을 이용해 찾은 내용은 머리 염색약 같은 시답잖은 거고.”

1655846861684.png“머리 염색약이요?”

16558468616847.png“흑발로 몇 주간 바꾸어주는 약이던가.”

무심히 툭 던지는 로아드네스의 말에, 그가 쥐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로아드네스가 반응에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16558468616847.png“아는 약입니까……? 설마?”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곧장 탐스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아드리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68616847.png“하.”

아드리엔의 마음을 들은 이후 줄곧 상기되어 있던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16558468616847.png“가지가지 하는군.”

1655846861684.png“금발이었어요, 원래 머리카락은.”

로아드네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16558468616847.png“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섭섭한 듯 물어오는 말에 아드리엔은 어색하게 웃었다.

1655846861684.png“일부러 숨긴 게 아니에요. 저도 너무 놀라서…… 그리고 머리카락 색을 바꾼 게 뭐 대단한 일을 꾸몄다고 볼 수도 없고요.”

16558468616847.png“…….”

1655846861684.png“조금 신기한 건, 주기적으로 약을 발라주지 않으면 물에 닿는 순간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더라고요. 마법처럼요.”

반듯한 눈썹은 그녀의 변명에 내내 꿈틀거리다가 ‘마법’이라는 말에 힘을 풀었다.

1655846861684.png“그 일기장에 다른 약에 대한 내용이 있다면,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요. 마침 에페로 황자도 수도에 있고, 빅토르 왕자야말로 약초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확한 명칭 정도는 알려줄 수 있겠죠.”

그런데, 수행원이 이런 사고를 당했는데 코빼기도 안 비추는 게 정상인가? 아드리엔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눈을 굴렸다.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1655846861684.png“에페로 황자와 빅토르 님이 혹시 병문안 같은 거 안 왔나요?”

16558468616847.png“……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로아드네스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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