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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손님들 (96/171)


96. 손님들
2022.04.02.


마침, 에페로와 빅토르가 병문안을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로아드네스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병문안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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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내 수행원을 황제 폐하보다 뵙기가 어렵군, 귀한 얼굴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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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나. 몸은?”

그들은 등장부터 요란했다.

에페로 본인의 의견이 아닌 것이 분명한 거대한 꽃바구니와 보석함 몇 개가 그들을 호위하던 기사들의 손에서 노집사에게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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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걸음을 해주셨군요, 마침 부탁드릴 게 있던 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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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이 모시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나요,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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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로.”

말에 뼈가 가득한 에페로의 말에 내 뒤에 서 있던 로아드네스가 곧바로 경고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페로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지더니 곧바로 콧대를 세우곤 나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빅토르는 두리번거리며 응접실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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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 뭐예요? 오랜만에 온 고국인지라 힘들게 일하고 싶진 않은데.”

나는 능글거리는 에페로에게 로아드네스가 블리에의 일기장에서 발췌해 온 단어 목록을 보여주었다.

잠시 인상을 찡그렸던 에페로는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눈으로만 그것을 읽다가 픽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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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공부라면 왕자에게 부탁하시죠.”

물론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기에 곧바로 빅토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빅토르는 에페로와는 달리 목록을 직접 가져가 코를 처박고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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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로, 이리 와라.”

의자에 방만하게 늘어져 앉아 지그시 나를 위아래로 훑던 에페로를 향해, 로아드네스의 싸늘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제야 아뿔싸 하는 얼굴로 허리를 세워 앉은 에페로는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 응접실 문턱에 삐딱하게 기대 선 로아드네스에게로 쪼르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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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로는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다.

론타에 계속 남게 해주겠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날 이후 며칠 내내 그를 괴롭혔다.

어머니인 그레이스 황후에게 곧장 그것을 일러바치자 그녀는 놀라 하면서도, 겁에 질리고 말았다.

에페로는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는 블리에를 보며 마음이 약해지려 하다가도 어머니와 자신을 불안에 빠뜨린 여자를 도저히 곱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제 앞에 있는 로아드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입이 딱 다물렸다.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경고하던 그때 그 눈 그대로, 로아드네스가 삐딱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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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엘라콘어의 뜻이나, 명칭 같은 것을 좀 해석해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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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이름. 이거면. 낫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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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게 무엇인지 알면 나을 거예요.”

블리에와 빅토르가 속닥이는 소리를 들으며, 에페로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불만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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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부인을 너무 믿는 거 아닙니까, 형님.”

에페로는 가볍게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는 로아드네스와 함께 문가에 서서, 응접실 안쪽에서 심각한 이야기 중인 빅토르와 귀부인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빅토르와 그는 여러 번 문전박대를 당한 끝에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호자처럼 버티는 로아드네스 때문에 말이다.

그 역시 론타 소식을 듣고 있어서, 제 형님과 귀부인의 스캔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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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부인이 묘한 약을 찾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형님도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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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하라면 좀 해라, 에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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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호하게 말을 자른 로아드네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에페로는 어쩐지 자신이 제대로 가지지 못한 형님의 애정을 저 여자가 가져가 버린 것만 같아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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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얌전히 굴며 부인에게 협조한다면, 네가 여기 있을 수 있게 나 역시 도우마.”

그런데 로아드네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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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라도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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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묵히 블리에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 로아드네스의 닫힌 입술이 곧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귀부인이 황자인 자신을 여기 계속 있게 해줄 수 있다며 허세를 부리는 것과 로아드네스가 돕겠다는 말은 차원이 다른 믿음을 주었다.

에페로는 순간 벅차오르는 마음을 꾹 누르고, 늘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삶의 1순위였던 로아드네스가 저 귀부인의 사고로 인해 약간 변했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은근히 죽이 잘 맞는 빅토르와 블리에가 속닥대며 작당 모의를 끝내자, 에페로는 곧장 돌아가려 빅토르를 잡아끌었다.

블리에는 빅토르와의 이야기가 꽤 흡족했는지, 아픈 몸으로 직접 배웅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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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우리는 친한 척이라도 해야겠어요, 부인. 형님이 무서워서라도.”

에페로는 장난기가 반쯤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다분히 조금 떨어져 있는 로아드네스를 의식한 말이었다.

블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페로는 곧 목소리를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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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인도 적과 친구를 확실히 구분해야 할 거야. 나한테 적은 부인이 모시고 있는 주군인 황태자비와 황태자 전하거든요.”

문어발식 친분을 유지하며 의뭉스럽게 구는 블리에의 행동을 비꼬기 위한 말이었지만, 블리에는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당황하기는커녕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고 웃었다.

얕게 들썩이는 가느다란 어깨가 웃음을 꾹 참는 듯 바르르 떨리더니, 블리에가 에페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마주 잡은 에페로는 서서히 자기 쪽으로 손을 끌어당기는 블리에에게 이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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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적은 제 주군을 친구로 만드는 게 아닌데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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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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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게 제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전하께서 제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주신다면 혹시 모르죠. 제가 전하의 적을 없애 드릴 수도 있을지도요.”

역시 수상한 여자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주군을 없애 드릴 수도 있다는 말에 몸을 딱딱하게 굳힌 에페로는 블리에의 몸이 멀찍이 떨어지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그게 로아드네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곧장 백작저 밖으로 쫓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

두 번째 병문안 손님은 노우라 주세타였다.

노우라는 로아드네스를 보자마자 몸을 잔뜩 굳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노우라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로아드네스를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다.

내가 나가 달라 등을 떠밀자 로아드네스의 얼굴에 약간 억울한 빛이 떠올랐지만, 그뿐이었다.

노우라는 응접실 문 앞에서 투닥이는 우리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보다가 내가 제 앞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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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 전하께서 친히 살펴보라고 보내셨어요.”

노우라는 내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리스의 진심도 아닐 인사치레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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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황태자 전하와의 합방일에 마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비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답니다.”

본인이 저지른 일인데 어째서 본인의 기분이 나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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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합방일과 무슨 상관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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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서 제 일처럼 걱정하시며, 합방을 미루셨거든요.”

노우라는 내 안색을 살피고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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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묘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부인이 괴한에게 습격당한 사건이 사실 부녀자 실종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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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는 황당하여 되물었다. 이 사건은 이미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용의자로 지목되어 쉬쉬하며 종결된 사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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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에, 수도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리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요.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하잖아요? 수도 한복판. 부녀자. 실종 뭐 이런 단어들 말이에요. 더 재미있는 일은 황태자 전하께서 그 의문을 더 키우셨다는 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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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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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시고, 그 핑계로 합방일을 미루신 지 일주일이 넘었답니다.”

노우라는 재미있다고 말하면서도 질린 얼굴이었다. 평소 노우라에게는 감정을 여과 없이 보이는 도리스가 얼마나 난리가 났을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선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코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그날 죽었다면, 도리스에게는 완벽한 밤이 아니었겠나.

거슬리는 블리에 아카시아를 제거하고, 황태자와는 고대하던 합방을 하고.

그런데 나는 살아 있는 데다가 황태자와 합방도 무산되었으니 얼마나 열이 받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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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지.’

노우라는 웃음을 흘리는 내 얼굴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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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건, 그 부녀자 실종 사건이 사실 진범이 따로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는 거예요. 일각에서는 대공을 용의자로 너무 성급히 지목해 유배나 다름없는 과한 형벌을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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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우려가 나올 수도 있겠군요. 너무 갑작스럽게 북쪽에 처박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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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황제 폐하께서도 사안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시고 이번 황제 폐하의 탄신연에 대공 전하를 불러들여 직접 알현해보신다는 말이 있더군요.”

갑작스러운 노에비안의 이야기에 나는 몸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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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번 탄신연에 참석할 생각이었다면, 이번만은 좀 적당히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거예요. 부인.”

노우라는 약간 걱정스러운 낯으로 내게 조언했다.

갑자기 손발이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주먹을 쥐었다 편 나는 옆구리가 아릿한 것을 느끼며 노우라를 향해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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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반드시 황제 폐하의 탄신연에 참석할 생각이에요.”

 

***

아드리엔의 납치 미수 사건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부녀자 실종 사건의 배후였다는 소문이 사그라들고, 사실은 숙부를 쳐내기 위한 로아드네스의 수작이 아니냐는 소문이 돈 것이다.

황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지만, 워낙 쌓아놓은 이미지가 있는지라 몇몇 사람들에게는 로아드네스가 전장에서 마물의 피를 먹지 못해 부녀자의 피를 먹어야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가 요 몇 달간, 잘 드러내지 않던 얼굴을 여기저기 비추었기 때문에 영준한 용모가 널리 더 알려졌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사내임에도 그런 요사스러운 용모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부녀자의 피라는 것이었다.

웃음도 나지 않는 괴소문이었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였다.

특히 일반 평민들에게 로아드네스는 마물과 관련된, 두려운 이미지의 황족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정작 로아드네스는 이런 소문에 익숙해 아무렇지 않게 굴었는데, 그게 아드리엔을 더 속상하게 했다.

바깥의 상황이 어떻든, 그는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아드리엔의 말만 되뇌며 간병에 힘썼다.

그렇게 제국 론타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황제의 탄신연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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