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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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재회
2022.04.06.
사람들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내게 향했다.
나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평민에서 귀족이 된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
남들이 씹어대기 좋은 가십거리가 아닐 수 없는 데다가, 로아드네스와 엮이며 스타일을 따라 하는 은밀한 추종자가 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황태자비 도리스의 시녀, 황태자의 보좌관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어내 더욱 이목을 끌고 있었다.
게다가 평귀족들은 몰라도, 대귀족들은 다들 쉬쉬하면서 알 것이다.
내가 한때 차기 대공비로서 대공저에서 살기까지 했다는 것을 말이다.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는 사람. 나는 지금 그런 위치였다.
“어째 다들 스타일이 비슷하네, 재미없게.”
에페로가 나를 향해 들으라는 듯 말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어느새 루비로 만든 붉은 장미 장식을 매단 드레스들이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리지어 있는 노우라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노우라는 밝게 인사하려는 것을 꾹 참고 부채 뒤에서 은밀하게 미소 지어주었다.
나는 지난번, 병문안을 끝낸 노우라에게 마담 르블레아가 알려준 보석 세공 장인을 소개해주었다.
밤낮으로 장인을 닦달해 장식을 만들어 팔았으니 노우라의 보석점 매출이 얼마나 뛰었을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노우라와 은밀한 눈빛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나는 곧 강렬히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루비 장미를 가슴팍에 크게 매달고 온 도리스가 정확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는 멀리서 보아도 바들바들 떠는 게 보일 정도였다.
나는 빅토르의 옆구리를 찌르곤, 보란 듯이 함께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앞광대와 코만 찡긋하며 겨우 미소 지은 얼굴은 곧 우리를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황태자에게로 향했다.
“비 전하는 부인을 좋아하는 거예요, 싫어하는 거예요?”
“…….”
“아, 질문이 잘못되었네. 비 전하는 부인의 친구예요, 적이에요?”
에페로는 영애들의 호감 가득한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에페로, 부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쓰겠니?”
“어머니.”
에페로의 질문에 난감했던 내게, 그레이스 황후가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깊숙이 숙여 예를 갖추었다.
“파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 그렇게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답니다.”
그레이스 황후가 친한 시녀에게나 하듯, 내 팔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 가까이 있는 테라스로 들어가자 황후의 시녀들이 재빠르게 테라스 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게 보였다.
“놀랐죠? 몸도 아직 덜 회복되었을 텐데 이리 갑작스럽게 불러내 미안해요.”
“아닙니다, 황후 폐하.”
아주 심하게 놀라긴 했지만, 나는 예를 다했다.
마흔을 훌쩍 넘겼음에도 아직 30대 중반으로 밖에 안 보이는 황후는 순한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나는 이리 가까이서 그녀를 알현한 적 없었기에 테라스 밖을 내다보는 황후를 관찰하듯 살폈다.
“고맙다는 말을 꼭, 직접 전하고 싶어서요.”
“제게요?”
“그럼요.”
테라스 밖으로 잠깐 향했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이었다.
“에페로의 수행을 잘 맡아주어 고마워요.”
사실 요양을 하느라 에페로의 수행을 맡은 건 며칠 되지 않은 터라 나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에페로가 내게 반가운 말을 하던데…… 혹시 진심으로 한 말인가요?”
‘망할 자식.’
론타에 남게 해주겠다는 말을 황후에게 아뢴 게 분명했다.
그새 제 어머니에게 쪼르르 말하기는.
그레이스에게 직접 그런 말을 들으려니 더 민망해서 이번엔 억지로 웃었다.
“저는 진심으로 에페로 황자 전하께서 고국에 남아 황제 폐하를 잘 수행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말을 끝낸 순간, 다정하게 빛나던 황후의 얼굴이 조금 무너졌다.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요.”
“……폐하?”
갑자기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 황후 때문에 나는 보는 눈이 없음에도 주변을 살폈다.
“에페로는 론타에 있으면 안 돼요. 부인의 인맥이 상당하다는 건 알지만, 부디 우리 에페로가 엘라콘으로 돌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진 말아줘요.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는 늘 우아하던 황후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여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꼭 잡고 부탁하듯 흔들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으실까요?”
황후는 걱정스러운 내 눈을 한참 보다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에페로가 친해지기로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그래서 내가 부인을 믿고 말을 할게요.”
“네.”
“나는 황궁이 무서워요. 황태자도 무섭고요.”
“황태자 전하가요?”
“황태자궁은 기운이 좋지 않아요.”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 숨이 막히는지, 그레이스는 급하게 숨을 들이켜고 방금 전의 나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했다.
황태자궁의 기운이 좋지 않아 황궁이 무섭다니.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께 무슨 위협이라도 하셨나요?”
“아뇨, 아드님은 늘 예의 바르고 올곧지요. 내가, 내가 문제인가 봐요. 쓸데없이 겁만 많아서는…….”
그레이스 황후는 신경이 쇠약하기로 유명했다.
금쪽같은 황자들을 연달아 주신의 곁으로 보내고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황궁이 무섭고 기운이 좋지 않다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마음 깊이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차올라 잡힌 손을 풀어 되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토닥여주었다.
“이해해요, 폐하. 걱정 마세요. 아무에게도 폐하와의 대화를 입에 올리지 않을 테니.”
“……고마워요. 하지만 에페로가 엘라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 생각은 진심이에요. 부디 그 아이의 마음을 흔들지는 말아줘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필요하면 두 손을 모을 수도 있다는 듯 간곡한 말에 나는 무척 난처했다.
***
황제가 찾는다는 전언에, 그레이스는 내게 확답을 듣지 못해 찝찝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테라스를 나섰다.
간곡한 그녀의 요청에 마음이 이상해지는데, 돌연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부인.”
로아드네스였다.
“황후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는 방증이었으므로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주었다.
“제가 워낙 요란하게 다쳤으니, 황자 전하의 수행원인 저를 직접 위로하시려고요.”
웬만하면 그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버려서 에페로에 대한 대화는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로아드네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입가에 살짝 미소가 고여 있었다.
“……혹시 오늘 내가 에스코트하지 않아서, 섭섭합니까?”
그럴 리가.
나는 로아드네스가 파티장에서 왜 내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지 알았다.
부녀자 실종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 때문에 희대의 계략남 취급을 받고 있는 로아드네스는 지금 나보다도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유쾌한 관심이 아니니 괜히 아픈 내 곁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스캔들을 상기시켜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요, 전하가 왜 그러시는지 아니까요.”
“좀 섭섭했으면 좋겠다고 싶기도 한데……. 나는 떨어져 있기 싫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잠깐 싫더라도 오늘 같은 날엔 좀 떨어져 있는 게 좋겠습니다.”
진심이 반쯤 섞인 농담에, 내가 살짝 당황하자 로아드네스가 피식 웃었다.
아, 밤중에 보는 로아드네스의 그런 미소는 정말 반짝이는 별 같아서 내 마음을 속절없이 흔들어놓았다.
“걱정 마세요. 황제 폐하의 탄신연에서 큰일을 저지를 만한 간덩이 부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나는 잠시 설레는 마음을 갈무리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오늘 무리해서 탄신연에 참석한 이유는 사실…… 노에비안을 좀 만나 보러왔어요.”
봄바람 같은 미소가 스치던 얼굴이 곧바로 차갑게 내려앉았다.
로아드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이더니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무슨 뜻입니까?”
약간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에 나는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화내지 마시고요. 이럴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단번에 서운함으로 물들었다.
“어쩔 수 없어요. 그에게 받을 게 있어요. 물어볼 것도 있고요.”
“내가 대신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내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노에비안에게 받고 싶은 건, 어머니의 목걸이었다. 노에비안이 만약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면 로아드네스에게 줄 리 만무했다.
“그가 아직 죄인의 신분이며, 황제 폐하의 부름으로 온 이상. 제게 허튼짓하진 못할 거예요.”
로아드네스의 기분은 이미 많이 상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아 급히 덧붙였다.
“빈센토 경과 닐 경이 전하를 찾는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오늘은 각자의 목적만 이루자고요.”
나는 굳은 표정의 로아드네스를 열심히 밖으로 밀어내 그의 부관들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파티가 무르익었는데 황제가 상석에서 사라져 있었다. 노에비안을 따로 만나러 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혹시 몰라 품에 넣고 온 단검을 찾아 가슴께를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최근 닐에게 호신용 단검술을 배웠던 걸 떠올렸다. 닐은 내 몸놀림에 꽤 놀란 눈치였다.
납치당했을 때 저절로 몸이 반응했던 걸로 보아 블리에는 상당한 실력자인 게 분명했다. 그때 살살하라는 요나의 반응은 분명 연약한 주인을 모시는 하녀의 반응은 아니었으니까.
참 알수록 신기하고 어이없는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제 탄신을 맞아 선심 쓰듯 만나주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말라비틀어진 웃음이라 입 근육이 아팠다.
‘내가 노에비안, 너를 버리겠느냐?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불러올릴 것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황제가 찾는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제 아들과 말하는 게 똑같았다.
멀찍이 들리는 아틸차드 홀의 음악 소리며 웃음소리가 기분을 더 더럽게 만들었다. 평생 보답 받지 못하던 삶인데 이제 와 머리통이 깨질 것처럼 회한이 밀려드는 것도 우스웠다.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아, 그는 다시 마차로 돌아가야 했다.
황제의 탄신연이라 특별히 허락받은 자유도 잠시일 것이다.
황궁에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감옥과 다름없는 곳으로 향하는 길은 치욕스러웠다.
‘말해봐, 노아. 왜 나를 죽였어?’
눈에 띄게 여윈 손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붉은 불꽃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드리엔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아무리 빌어도 용서해주지 않던 차가운 얼굴.
눈을 뜨면 황량하고 낡은 저택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바라는 쓸모없는 놈이 되어 악몽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마차로 향하던 발걸음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흘러들었다.
아드리엔을 처음 똑바로 마주했던,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공녀를 향해 거짓을 말했던 그 정원이었다.
그리고 노에비안은 그곳에서,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
“……블리에?”
“나를 그리 부르는 것도.”
“아드리엔!”
벼락처럼 작열하는 감정은 목소리가 되어 쏟아졌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어두운 그림자에 잠겨 있는 여자에게로 달렸다.
악몽 속 블리에 아니, 아드리엔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