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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그곳에, 아드리엔이 있었다 (99/171)


99. 그곳에, 아드리엔이 있었다
2022.04.13.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로아드네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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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시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만날 생각을 하지?’

그는 머릿속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 같은 감정을 식히기 위해, 그리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어린 영애들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질투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하기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로아드네스는 고백에 가까운 아드리엔의 말을 들었어도, 늘 불안했다.

기만으로 가득한 사랑이었어도 사랑은 사랑일 테니까.

고작 더 가까워지고 싶다, 친구이고 싶지 않다는 한마디에 기대기엔 예전에 아드리엔이 노에비안을 가리켜 망설임 없이 꺼냈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목 안에 박힌 가시처럼 그를 괴롭혔다.

아까 테라스에서 아드리엔이 노에비안을 만나러 왔다는 말을 했을 때, 그때 조금만 더 차분하게 반응했었더라면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차분해질 수 없는 주제이지 않은가.

그는 달빛 아래 반짝이는 백금발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어느새 발걸음은 아틸차드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노에비안이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가는 길은 뻔했다. 필연적으로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길을 지날 수밖에 없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의 발걸음은 불안을 쫓아 그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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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안?”

그때 거칠게 쉰 목소리가 문득 들려와 그는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비 궁이 있는 방향에서 침의 차림으로 달려오고 있는 도리스가 보였다.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차림에,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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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안, 로안. 아, 나의 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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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달아 그의 애칭을 부르며 반가워죽겠다는 표정의 도리스는 정신이 좀 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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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이 많습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전달하는 내용에는 걱정이 어렸지만, 내려다보는 표정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음에도 너저분하게 팔랑이는 허리끈을 내려다볼 뿐 여며주는 친절을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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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황태자 전하와 제 합방일이에요.”

움직일 생각이 없는 커다란 손을 도리스가 빠르게 잡아 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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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으십시오, 전하. 보는 눈이 많다는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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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계집에게 달라붙는 사내들에겐 잡아 죽일 것 같은 시선을 보내면서도, 어째서 고귀한 내가 깜냥도 안되는 황태자와 합방을 한다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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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귀도 있습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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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평생 남의 눈치만 보고 살다가, 이미 첫사랑도 놓치지 않았나요?”

도리스가 로아드네스의 손을 끌어 제 가슴께에 얹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해도 이를 악물고 제 몸에 그 손을 비비적거렸다.

농염한 미소를 흩뿌리며 천천히 시선을 올린 도리스의 표정이 돌연 창백해졌다.

로아드네스의 눈이 전혀 동요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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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아주 사람을 등신으로 만들고…… 도대체 뭐가 문젠데! 이 빌어먹을 론타의 핏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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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일 끝나셨습니까?”

로아드네스가 봐주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손을 떼어내자 헐벗은 도리스는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다. 얼굴을 타고 내려간 붉은 기운이 빠르게 목을 지나 온몸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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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로안. 나는 처음부터 너를 원했어. 바르데날도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의 곁에 서지 않았을 거야. 제발, 제발 날 좀 안아줘. 내가 맞출게. 금발? 흑발? 그 무엇이든 내가 맞출게!”

누가 들을까 겁이 나지도 않는지 도리스는 망설임 없이 옷을 더 풀어헤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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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문제야? 도대체! 내가 네 첫사랑이 되어 주겠다잖아! 그 같잖은, 가짜 연인도 되어주겠다잖아! 어차피 그 여자는 널 사랑하지 않아 로안. 제 입으로 말했어! 아무리 모두가 선망하는 신랑감이라도, 저가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악에 바쳐 지르는 소리가 회랑 바닥에 쏟아졌다.

평소보다 극도로 신경 쓴 도리스는 누가 보아도 넋을 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도리스는 로아드네스의 무감각한 얼굴에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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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해보십시오. 여기가 바깥이 아니라 둘만 있는 침실이라 해도, 내가 당신께 동하는 일은 없습니다.”

노골적인 언사에, 도리스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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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여기서 꺼지십시오.”

완벽한 외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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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황태자를 놓쳐버렸다.

황태자궁에 들어섰지만 황태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의외로 궁내로 진입하는 건 쉬웠다. 내가 황태자의 보좌관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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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잘못 본 것이길.’

텅 빈 복도를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면서 나는 주신께 기도했다.

알현실과 응접실 문을 벌컥벌컥 열어보던 나는 침실 앞에서 호위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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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은 절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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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요. 나는 전하께 전할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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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께서 아무리 보좌관이시더라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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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에비안 트로비카와 관련된 급한 전언이에요.”

호위 둘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놀란 기색이었다.

황태자에게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노에비안의 무엇이었는지도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황태자가 늘 달고 다니는 호위들이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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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복잡한 눈 두 쌍이 나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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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황자 전하께서도 오시기로 했는데, 아직 안 오셨나요?”

로아드네스를 들먹이자 남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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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막자고 둘이나 붙어 있을 필요는 없을 테고. 한 분 정도는 어서 2황자 전하를 모셔오세요. 파티에서 취하셨는데 중간에 어디 쓰러져 계신다면 곤란하잖아요? 중요한 일인데.”

결국 남자 둘은 눈빛 교환을 하다가 한숨을 푹 쉬고 한 명이 로아드네스를 데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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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일이에요. 나도 더 오래 이렇게 밖에 나와 있기 싫고요. 누군가 갑자기 황태자 전하를 뵈러 오기라도 한다면 뭐라 생각하겠어요? 내가 황태자 전하를 유혹하려고 이 앞에서 어슬렁거린다 생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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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런…….”

대공, 로아드네스, 거기다 에페로와 엘라콘 왕자까지 얽힌 내 가십을 눈앞의 기사가 모를 리 없다.

그 스캔들이 황태자에게까지 향할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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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임지죠. 2황자 전하께서 오시면 우리가 선약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 명을 밖으로 보내버리자, 남은 한 명은 혼자서 내 궤변을 견디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던 기사는 결국 기 싸움에서 밀려 몸을 비켜섰다.

문이 열렸다.

덧문이 세 개나 달린 침실의 입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조용히 걸어 들어간 나는, 덧문 세 개를 빠르게 열어젖히고 침실에 들어섰다. 누군가 집기를 모두 깨부순 흔적이 선연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없었다.

순간이지만 소름이 오싹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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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전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기척을 숨긴 맹수가 노리고 있는 작은 짐승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뜻 모를 공포가 발밑에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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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온 이상, 이렇게 저질러버린 이상…… 물러설 순 없어.’

그때였다.

콰쾅-! 쾅! 쾅!

무언가를 세게 내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내 발아래에서 울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얕은 지진이 발생한 것 같은 진동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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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아래?”

깨어진 화병이며, 깃털이 삐져나와 완전히 터져버린 베개 등의 흔적을 따라 넓은 침실을 가로지르자 레티나 황후 폐하의 초상이 벽의 구석에 걸려 있었다.

쾅-! 쾅-!

그리고 발아래 진동이 더 거세졌다. 극도의 긴장감이 등을 타고 흐르자 벌컥 화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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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야.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어딨는데, 너. 바르데날도.”

나는 그 진동에 응수하듯 발을 쾅쾅 굴렀다. 그리고 레티나 황후의 초상 이곳저곳을 만지고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살짝 밀기만 했을 뿐인데…….

다정하게 웃고 있는 레티나 황후가 내게 팔을 벌려 안내하듯, 그림이 쑥 들어가더니 그 자체로 문이 되어 열렸다. 그러곤 끝없는 암흑과 지하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선명히 들렸다.

콰쾅-! 쾅! 쾅!

발밑에서 쿵쿵대던 망할 소리가 말이다.

순간이지만 갈등했다. 이대로 나가서 사람을 불러온다면 저 현장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이 침실로 들어올 수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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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망설일 건데. 더 이상 도망치거나 미룰 정신머리가 있어?’

나는 떨리는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디뎠다.

잠식될 것만 같은 암흑이 나를 숨 막히게 했지만, 이대로 뒤돌아 도망친다면 절대로 진실을 알 수 없을 거란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더듬거리고, 덜덜 떨면서도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겨울이긴 했지만, 따뜻한 훈기가 돌았던 침실과는 달리 지하로 내려갈수록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등골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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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궁이 무서워요. 황태자도 무섭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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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궁은 기운이 좋지 않아요.’

 
빌어먹을 그레이스 황후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번뜩 떠오르는 건 왜일까.

황궁 한가운데 있는 황태자궁 아래. 이런 비밀의 방이 있다는 걸 그녀 역시 알고 있었을까?

가까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반가웠지만 동시에 내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도망가지 마. 도망가지 마. 끝없이 나 자신을 채찍질하듯 말을 이었지만 희미한 빛 속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아무리 손으로 틀어막아도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바르데날도는 이렇게 싸늘하고 소름 돋는 공간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바르데날도가 치고 있었던 건 관이었다. 익히 보아왔던 유리관.

유리관 하나를 부술 듯이 두 팔로 내리치던 바르데날도는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뒤돌았다.

벌거벗은 상반신이라 반짝이는 금줄이 더 잘 보였다. 더는 부정할 수도 없이, 어머니의 목걸이가 확실했다.

바르데날도는 열이 잔뜩 오른 얼굴로,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털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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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봐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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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듯한 황태자의 야살스러운 표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에 질식된 나는 두 손으로 입만 틀어막은 채 그가 내리치던 유리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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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란…… 정말 지긋지긋하군.”

그곳에, 묻혀 있어야 할 아드리엔의 시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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