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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황태자와 비밀의 방 (100/171)


100. 황태자와 비밀의 방
2022.04.16.


이 서늘한 냉기만 풍기는 지하는 놀랍도록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 군데군데 걸려 있는 이국적인 태피스트리는 물론이고 자주 와서 갈아주지 않는 이상 절대 저런 싱싱함을 보일 리 없는 생화가 거대한 꽃병에 꽂혀서 기둥마다 놓여 있었다.

정중앙에는 아름답고 소박한 마을의 광장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작은 분수대에서 물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샹들리에 빛에 반사된 물방울이 작은 황금 덩어리처럼 가장자리에서 톡톡 터졌다.

한순간, 이곳이 황태자의 진짜 침실은 아닐까 착각할 만큼 향기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 눈앞에 놓인 무수히 많은 관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래, 관.

내 시신이 누여진 관과 비슷한 유리관이 몇십 개나 ‘전시’되어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드넓은 방 벽면을 차지한 유리관들은 도저히 ‘전시’가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는 모양새였다.

나는 이 몸에 들어와 정말 무수히 많은 소름과 전율을 느껴왔지만, 지금만큼 공포에 질린 채 몸이 굳어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가 극에 달한 건 내 유리관 근처에 있는 다른 관을 보았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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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세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로아드네스가 그녀를 찾는 동안 내내 초상화를 봐왔기에 나는 그녀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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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세다 남작 부인, 내 아버지의 정부.”

황태자가 비틀거리며 그 유리관으로 다가갔다. 아끼는 골동품처럼 유리관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나는 순간 구역질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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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머니를 배신하고, 아들인 내게 자신의 정부를 아껴주면 안 되겠냐 간곡히 부탁하셨지. 말이 되나? 애초에 살아 있는 것들 중에 내가 사랑하는 건 없는 것을.”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 웃던 바르데날도가 땀에 젖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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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조용하고 좋습니까. 적막한 방에…… 숨 쉬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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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 미쳤어…….”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다문 입 틈새로 겨우 씹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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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뭐야, 도대체…… 전하. 전하 이거 설마 다 전하의 것이라고 하진 않으시겠죠? 부녀자 실종 사건이 설마 전하의 짓인가요? 대공비의 시신은 도대체 왜, 왜…….”

밀폐된 공간이라 황태자에게서 술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하지만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은 단순히 술의 영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색스러웠다.

입 한번 떼기가 어려웠다. 목구멍을 누가 주먹으로 콱 틀어막은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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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저 시신은 왜, 왜 저기 있나요?”

혀를 몇 번이나 깨물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어느새 내 시신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비틀거리는 몸을 관에 의지하더니 근처에 있는 손잡이를 돌려 관을 세로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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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큭. 왜? 궁금합니까?”

내 시신이다. 비슷하게 만든 인형도 아니다. 온갖 꽃으로 장식되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잠든 사람처럼 누워 있는 내 시신.

머릿속이 백치가 된 것처럼 새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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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습니까?”

나는 굳어버린 고개를 겨우겨우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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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였는데.”

아름답지 않다는 대답에 쌕쌕대는 목소리가 시무룩해지는 게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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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였, 죽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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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보다, 이렇게 죽어서 시신으로 조용히 있으니 훨씬 아름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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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데날도는 마치 예술작품을 만든 장인처럼 뿌듯하게 웃었다. 너무 순수하게 밝은 미소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내내 날 죽인 사람을 찾아다녔다.

내가 누군가의 농간으로 죽은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도 알고 싶었다.

그게 죽은 나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행복한 미래를 위해 밟고 올라서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진실이 눈앞에 있는데. 대놓고 날 죽였다는 이가 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발은 앞이 아닌 뒤로 향한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바르데날도의 하얗고 흠결 없는 상반신이 이유 모를 땀으로 젖어 있었다.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려 보니 그의 고간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유리관을 쓰다듬는 손길이 마치 내 등골을 쓰다듬는 듯 오싹했다.

구역질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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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미친놈.”

바르데날도가 단정한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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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은 로아드네스지, 아름다운 내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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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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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은 로아드네스나 듣는 거예요, 부인. 가엾은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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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도대체 왜 남의 시신을 가져와 이런 데 전시하는 건데? 대공비를 죽여? 도대체 왜? 아드리엔이 당신에게 뭘 어쨌는데?”

터질 것 같은 그의 바지 앞섶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잇는데 그가 여상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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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것밖에 사랑할 수 없는데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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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자신을 동정하듯 아련한 눈깔을 내리깔던 바르데날도는 돌연 분노에 차서 아까처럼 아드리엔의 유리관을 쾅쾅 내리쳤다.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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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목걸이가 있는데 도대체 왜 안 열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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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는……. 그 목걸이는 도대체 왜 당신이 갖고 있는데? 도대체 뭔데 시체…… 시체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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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안 열려. 아무리 해도 안 열려. 감히. 네까짓 게…… 감히.”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한 황태자의 분노는 온통 아드리엔의 유리관으로 향했다. 나는 감당하지 못할 장면을 눈에 빠짐없이 담으며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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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려고?”

발걸음이 한 번 더 뒤로 물러서기가 무섭게 황태자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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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봐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관이 열리지 않는 분노가 갑자기 내게로 향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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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도리스의 손으로 곱게 죽었으면 좋았잖아.”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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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객…… 그 사람들 당신이 보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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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가 보냈지.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그 여자가 당신을 없애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황태자는 도리스가 움직일 것이란 걸 알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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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건 전부, 가져야 하고. 거슬리는 건 전부, 치워버려야 하는 여자니까.”

나처럼, 도리스가 움직일 걸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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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편하고 쉽습니까. 당신 같은 여인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바르데날도는 돌처럼 굳어버린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손이 곧장 내 목으로 향했다. 자비 없는 남자의 힘이 내 목을 단번에 콱!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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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바르데날도가 내 목을 쥐고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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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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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조용해지세요.”

의도적으로 기도를 꽈악 눌러 압박하는 힘은 한 번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안 돼.

안 돼.

저기 내 시신이 있는데. 여기서 이 몸까지 뺏기면……!

나는 힘으로 잡아 누르는 황태자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비틀었다. 하지만 반항이 격렬해질수록 단단한 엄지는 더 진득하고 무겁게 숨구멍을 조였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갑자기 기도가 열리고 찬 공기가 내 폐부로 가득 들어왔다.

컥! 커억! 콜록, 콜록!

나는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져 들어오는 숨을 감당하며 콜록거렸다.

화려한 샹들리에 빛이 퍼진 공간. 싸늘한 냉골의 바닥 위에 두 남자의 검은 인영이 엉겨 붙었다.

퍽!

퍽!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상체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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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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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껄여봐…….”

퍽!

노에비안이었다.

처참하게 흐트러진 노에비안이, 방금 기사들에게 끌려갔던 그 노에비안이 내 앞에 나타나 시뻘건 눈으로 황태자의 얼굴을 때렸다.

곧바로 입술이 터진 황태자는 멱살을 잡힌 채 제 숙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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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숙부가 오셨네.”

부쩍 여윈 노에비안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았는지, 키가 큰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구석에 내리꽂혔다.

노에비안은 멀뚱히 세워진 아드리엔의 시신을 올려다보곤 순간 할 말을 잃고 침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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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버렸네. 재미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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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데날도, 설명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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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본래 내 것인 걸 내가 가진 것을? 주군인 내가 숙부에게? 시신을 준 건 당신이잖아.”

시신을 준 건 노에비안이라고? 내가 본래 황태자의 것이었다고?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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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은 나한테 해.”

온몸이 벌벌 떨렸지만, 나는 벽을 짚고 겨우 일어나 똑바로 섰다.

황태자를 노려보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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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끼리 도대체 무슨 작당을 했는지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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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에비안 론타는 선황제의 27번째 황자였다.

늙은 황제에게 팔려 오듯, 몇 번째인지도 모를 황비가 된 그의 어미는 그를 낳자마자 죽어버렸다.

그의 황위 계승 서열은 손바닥만 한 영지 하나라도 받아 갈 수 있으면 다행일 만큼 저 아래에 있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황제의 재목이라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자리.

뒤를 봐줄 세력도, 안전을 약속할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황태자였던 지금의 황제, 율리어스가 노에비안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세력이라곤 한 줌도 없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달리 치열했던 황위 다툼.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독살까지 서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며 천덕꾸러기 황자 시절을 보낸 노에비안은 어릴 땐 누구도 그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력과 뒷배가 필요한지 알려줄 사람이 없었기에, 무지했던 그는 늘 밝은 곳에서 대접받고 살아가는 황태자가 부러웠다.

그래서 로열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다. 자신도 쓸모가 있는 황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는 졸업이라는 개념이 없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중년이 다 되도록 학생으로 살아가는 타국의 왕족들을 보았다.

처음엔 한심한 눈으로 보았지만, 몇 번이나 수석을 하고 몇 번이나 아카데미 대표 학생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그는 성년이 다가와서야 깨달았다.

막강한 세력들을 가진 형제들 사이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도 어쩌면 영지 하나 받지 못한 채 로열 아카데미에서 세금이나 축내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신세라는 것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안전하던 위치까지, 그가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자 위협받기 시작했다.

처음 독을 감별했을 때, 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죽어도 나서줄 세력이 없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자신의 별궁에서, 그는 자신이 살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전면으로 나서지 말자.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내지 말자. 가질 수 있는 것에만 시간을 쓰자.

계승권에서 멀고 맡은 일을 잘하는 그는 자연스럽게 믿을 만한 신하가 필요한 율리어스의 신뢰를 샀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당시의 율리어스는 단순히 신뢰할 만한 형제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대신해 손에 피를 묻혀줄 만한, 떨어지는 콩고물이 절실한 형제가 필요했던 것뿐이지.

가끔, 아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일은 자신이 다 하는데, 어째서 황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일까.

황족의 상징인 짙푸른 눈동자는 저 역시 가지고 있는데.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어째서 자신을 아무도 경계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황태자, 율리어스를 지지했다. 자신이 세력을 모을 만한 힘이 없으니 힘이 많은 자에게 붙어 자신이 세력이 되고자 애썼다.

율리어스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신이 손을 더럽히고, 오로지 영광만을 율리어스에게 주었다.

노에비안은 그즈음, 자신이 무엇을 가질 수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 상태였다.

죽거나, 변방으로 쫓겨나는 황자가 아니라 높은 작위를 가지고 수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황족.

그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는 바로 그 자리였다.

과분한 것을 욕심내지 않자, 그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어냈다.

당시 치열하게 황위 경쟁을 하던 형제들은 모조리 죽었다.

낮은 서열의 형제들은 혼인 동맹으로 타국으로 쫓겨나듯 궁을 떠나거나 수도에 머무르지 못하고 변방으로 향했다. 그마저도 못한 형제 중 몇몇은 영원히 로열 아카데미 학생으로 남았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별궁 황자, 노에비안은 ‘트로비카’라는 새로운 성을 받아 북쪽의 거대한 영지를 하사받고 수도에 머무르며 황제의 책사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다짐에 확신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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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 수 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가질 수 있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옳다.’

진작 그리 살았어야 했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게 황위나 자신만의 세력이 아니라는 걸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비록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이 올려 세운 황제를 섬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황위에 올라야 자신에게도 미래가 있었기에 그는 만족했다.

넘보면 안 될 것을 넘보는 사람들을 보면 이가 갈렸다. 어리석고 멍청한 놈들.

하지만 그의 삶의 지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계기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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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엔 피레타를 가져야겠습니다, 숙부.”

자신이 두 번째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정한, 자신의 조카이자 이 나라의 새로운 황태자가 그 말을 꺼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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