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사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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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사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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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사정 (1)
2022.04.20.
노에비안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동부의 부호, 유서 깊은 피레타 공작의 적녀인 아드리엔 피레타와 혼인하세요.”
아.
자신이 취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나.
이 정도로 단호하게 말한다는 건 이미 모든 계산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노에비안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인이었지만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혼인으로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세력을 가지게 되면 누군가는 자신을 경계할 것이고 그게 황태자나 황제가 되면 자신이 피곤해진다.
그의 목표는 황위가 아니라, 그 뒤의 권력이었다.
이제 그는 현재의 삶을 어떻게 더 이어나갈 것인지에 집중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말입니까?”
“숙부와 하는 혼인은 위장입니다. 가져야겠다는 말은 말 그대로, 아드리엔 피레타를 내가 갖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혼인해서도 공녀는 내 것입니다.”
“……이미 서부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하셨으면서. 무슨 말입니까?”
“도리스는 욕심이 많고 멍청해, 다루기 쉬워서 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 여자 때문에 동부를 버릴 순 없습니다.”
“……그래서요? 훗날 공녀를 황비로 들이시면 될 일입니다.”
“부황께서 정정하신데, 내가 황제가 되어 황비를 맞이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리지. 피레타 공녀가 몸은 약해도 괜찮은 신부감인데 동부에서 기약 없이 나를 기다려줄 리는 없고 말입니다.”
웬만해선 화를 잘 안 내는 노에비안이었지만, 이번만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몰라 한참 눈썹을 꿀렁였다.
“숙부가 혼인한 채 데리고 있다가,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이혼하죠. 내가 황제가 되면, 그때 황비로 자비롭게 맞이하면 되니까. 한번 이혼한, 몸도 약한 공녀를 황비로 받아준다는데 동부에서 거절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서부에서 용납 안 할 겁니다.”
“그럼 정부로 두지요, 뭐.”
황태자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 말했다.
사실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입지는 조금 위험하다. 레티나 황후가 죽고 단단했던 세력들이 많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유부녀여야 하고. 숙부는 혼인에 본래 뜻이 없었으니. 주군과 부인을 공유한다 생각하면 편할 겁니다. 동부에서도 어중간한 집안 보단 대공비 자리를 반길 테고.”
미끄러진 황태자비 자리 대신 대공비 자리를 주어 동부를 달래고 뒤에서는 자신의 정부로 삼아 갖겠다는 의미였다. 욕심도 많지.
하지만 아내를 공유하는 것만큼 의심 많은 황태자에게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도 없으니 노에비안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단 하나 의심스러운 것은…….
“굳이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 바르데날도였기에 노에비안이 넌지시 물었다. 자세히 보니, 바르데날도가 계속 내다보고 있던 창밖에는 로아드네스가 있었다.
“아, 로아드네스. 내 사랑스러운 아우가 말입니다.”
말갛고 다정한 황태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그 공녀를 마음에 뒀습니다.”
아. 그랬군.
노에비안은 로아드네스가 피레타 공녀에게 마음을 두었다는 문장 하나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 애는 숙부처럼 주제를 알지 못해. 황태자비 후보가 된 여인을 자신이 가지겠다고 욕심내는 게 너무 안타깝지 뭡니까?”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이유 모를 열등감을 그 역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질 수 있는 것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걸 그 애는 모릅니다. 남의 것을 탐내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도 알려줘야 내가 진정한 형님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한차례 정적이 그들을 휩쓸었다.
노에비안은 눈앞의 황태자를 보며, 자신의 형님인 지금의 황제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순간 격렬한 반항심이 일었지만 잠깐이었다. 곧 입을 굳게 다문 노에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뜻 모를 분노는 황제나, 황태자가 아닌 밖에 있는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했다.
노에비안으로서 더 거슬리는 존재는 어쨌든 모셔야 할 황태자가 아닌 로아드네스였다.
자신과는 달리 계승 서열도 높은 데다 황태자의 동복동생인 2황자 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치켜들었다.
별궁의 천덕꾸러기였던 자신과는 달리, 충분히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서열임에도 로아드네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붉은 눈. 불길한 놈.’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괴담이었다. 붉은 눈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2황자 로아드네스는 늘 황태자 바르데날도에게 져주었다. 처음에는 의기양양하던 바르데날도도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을 것이다.
선생들에게 수재라 불리는 제 동생이 기껏해야 영특하다는 말이 최선인 자신에게 왜 항상 지는지를 말이다.
노에비안은 콧방귀를 꼈다.
‘그런 여유는 가진 자가 부리는 것인데.’
형님이 황제가 되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양보하는 동생. 거기다 그 행동엔 자신과는 달리 ‘진심’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노에비안의 마음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동화 속에서 살고 있는 애송이.’
각자의 비틀린 생각을 끝마친 그들은 밖에서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멀끔하게 생긴 젊은 사내가 비굴해 보일 만큼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아, 왔군.”
바르데날도는 품에서 구겨진 서신 몇 개를 꺼내 노에비안에게 건넸다.
“이번에 이곳, 트로비카 대공저의 집사가 될 사람입니다, 숙부.”
바르데날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을 가스팔이라 소개한 남자가 땅에 머리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노에비안은 딱딱하게 굳은 채 바르데날도를 응시했다.
“선물입니다.”
바르데날도가 다정하게 웃었다.
노에비안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얼굴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어찌 이리 제 아비와 똑같은가.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그러했듯, 바르데날도 역시 노에비안의 주위를 모두 자신의 사람들로 채웠다.
이 거대하고 화려한 대공저 안에 우글거리는 사용인들을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혔다.
바르데날도는 자신이 건넨 서신을 가스팔에 전달하라 눈짓했다. 노에비안은 잠자코 따랐다.
“그 서신 속 글씨를 따라 해라.”
“예.”
“그리고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써라.”
바르데날도가 그 자리에서 대충 휘갈긴 쪽지를 건넸다.
「아드리엔. 데뷔탕트에서 우리만의 작은 숲으로 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저…… 어느 분의 글씨를 베끼는 것인지…….”
“네 새로운 주인이지 누구겠느냐.”
전혀 상의되지 않은 바르데날도의 발언에 노에비안이 인상을 왈칵 구겼다.
가스팔이 편지를 써오겠다며 부랴부랴 집무실을 나섰다.
“누구의 글씨입니까?”
“로아드네스. 이제는 숙부의 글씨입니다.”
“뭐하러 저런 편지까지 지어내야 합니까?”
“공녀도 로아드네스에게 마음이 있거든.”
“…….”
“로아드네스 그 순진한 놈이. 아직도 제 얼굴조차 안 보여주고 연애를 한다니까.”
바르데날도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2황자 혼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둘이 이미 연인이란 말입니까?”
“비슷합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공녀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모릅니다. 늘 로열 아카데미 가면을 쓰고 만난 데다 목소리조차 낸 적이 없다더군.”
이런 경우가 있나.
그저 청혼서만 주고받으며 감정 없는 결혼을 할 생각이었던 노에비안은 졸지에 로아드네스를 흉내내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띵했다.
여인을 가까이 해본 적도, 할 생각도 없던 그는 팔자에도 없는 연애질을 해야 한단 생각에 황태자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아까 내가 뭐라 썼는지 보았습니까? 공녀에게 데뷔탕트에서 얼굴을 공개하는 걸로 하죠.”
노에비안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황태자 바르데날도를 살폈다.
더없이 다정히 웃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어른이 되지 못한 황태자의 입가에는 약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이 자리에 로아드네스가 없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노에비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아드네스가 견뎌낼 수 있을 만한 진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는…… 당신이 알던 그대로야.”
그래, 뒷이야기는 노에비안보다 내가 더 잘 알 것이다.
***
건강 때문에 아카데미를 관뒀던 아드리엔은 피레타 저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동부는 아름답고 부유했지만, 그녀에겐 그런 것들을 누릴 만한 체력이 없었다.
아드리엔은 짧은 아카데미 생활 이후, 그곳에서 사귄 친구 몇 명과 나누는 편지로 하루의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
그녀는 특히 ‘안’에게서 편지가 오면 기뻐 날뛰었다. 안은 정말이지 다정한 소년이라 편지를 주고받으면 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런 아드리엔을 보며 평소와는 다름을 느낀 비앙카가 꼬치꼬치 ‘안’을 좋아하느냐고 캐물을 때마다 아드리엔은 부끄러워하며 아주 소중한 친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비앙카가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분홍빛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비앙카가 그들이 하는 것이 ‘연애’라며 단정 짓고 상대가 누구냐고 묻자 아드리엔은 그저 황족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실제로 론타의 황족인지 혹은 황궁에서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은 타국의 왕족인지도 몰랐고.
그는 암살의 위험 때문에 가면을 쓴 채 생활하는 로열 아카데미 소속이었다.
당연히 얼굴은 본 적도 없고,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게 다였다.
함께한 시간에 비해, 둘이서 뭔가를 함께 한 일은 극히 적었다.
아드리엔은 몸이 약했고, ‘안’은 로열 아카데미의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에.
「아드리엔. 데뷔탕트에서 우리만의 작은 숲으로 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데뷔탕트를 앞두고 받은 서신.
“맙소사! 아마 그 ‘안’이라는 사람은 그때 네게 고백하려는 게 분명해! 데뷔탕트에서 다른 사내가 우리 아드리엔을 채가기 전에!”
곁에서 같이 읽던 비앙카는 제 일처럼 설레하며 아드리엔을 특별히 더 꾸며주었다.
그들이 치르는 첫 데뷔탕트는 매년 첫날에 황궁에서 벌어지는 신년 가면무도회였다.
즉시 피레타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면을 구입한 비앙카는 아드리엔에게 선물하며 흡족한 표정을 했다.
‘안이 정말 내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연인…… 혹은 약혼이라도 하자고?’
안을 정말 좋아했지만, 약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엄청 부끄러웠다.
겨우겨우 답장을 써서 보낸 후, 아드리엔은 처음으로 다음날, 그 다음날을 기대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신년 가면무도회가 다가오는 동안 내내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저도 모르게 빨리 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 사실 안을 많이 좋아하나 봐.’
목소리 한 번,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이런 것도……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아드리엔은 왔던 편지를 꺼내 보고, 또 꺼내 보았다.
그들이 성년이 되는 바로 그 날, 제게 할 말이 있다니. 이보다 떨릴 수는 없었다.
‘성년이 되었으니, 이제 안의 얼굴도 볼 수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나 봐.’
그리고 예정대로, 아드리엔은 오빠 그레고리의 손을 잡고 들어간 아틸차드홀에서 안의 가면을 발견했다. 그가 말했던 행커치프 자리에 꽂혀 있는 장미 한 송이까지.
그가 호언장담하며 기대하라 했던 대로, 못 본 사이 안의 키는 다른 사람들과 머리 하나만큼 차이가 날 만큼 컸고, 걸음걸이마저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드리엔은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안은 그녀가 계속 손을 흔들자 잠깐 굳어 있다가 따라오라는 듯 아틸차드홀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