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사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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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사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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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사정 (2)
2022.04.23.
“그럼, 당신은 그날 날 처음 본 거였겠구나. 하, 맙소사.”
“…….”
“안과 나만 알던 작은 숲이 아니라, 사실은 당신도 알던 숲이었던 거야.”
“몰랐어. 황태자가 알려준 거지, 나는 몰랐어.”
노에비안이 급하게 대답했다. 해롱해롱한 얼굴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태자는 실소했다.
나는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안을 따라 작은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귓가에 선명히 울리던 내 심장 소리.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기대해도 좋다고 우쭐대던 편지들을 생각하며 달빛에 부서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았었지.
그리고 과연, 가면을 벗고 입꼬리를 끌어올린 안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
밤하늘 같은 기다란 흑발, 감춰져 있던 짙푸른 눈동자.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
내 몸 하나 추스르기 바빴던 나는 노에비안 트로비카라는 이름의 위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안이라는 이름은…… 노에비안의 ’안‘이었군요.’
‘당신이 항상 제가 꿈꾸고 상상하던 안의 모습 그대로인 게 너무 신기해요.’
그저 안이라 좋았다.
졸업이라는 개념이 없는 로열 아카데미의 제도와 머리색이며 눈동자 색까지 바꿔주는 마나석을 나 좋을 대로 해석했던 것이다.
순진하고 바보 같았던 어린 날의 나는 그저 첫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꿈에 젖어 온 마음을 열어 노에비안을 사랑했다.
그게 불행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제발, 제발 울지 마. 아드리엔. 할 말이 더 남았어. 내가 얼마나,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게 됐는지도 알아야 하잖아.”
노에비안은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말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세기의 커플.
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대외적으로는 철혈 재상인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피레타 공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소문인지!
순진하고 어린 영애 하나를 속여먹는 건 쉬웠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를 받아들인 아드리엔은 청혼서를 보냈다는 말에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당황하다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아드리엔이 만날 때마다 그런 식으로 기뻐할 때면, 노에비안의 마음은 약간 이상해졌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그런 남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처음 그 ’작은 숲‘이란 곳에서 가면을 벗고 아드리엔 피레타라는 여자를 맞이했을 때, 그는 척추가 찌릿할 만큼 얕게 전율했다.
이유는 몰랐다.
여자의 순진무구하고, 맹목적인 눈빛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호의 가득한, 인간적인 애정으로 가득한 눈빛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결혼식 날.
노에비안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아드리엔의 표정을 보고 자신도 따라 슬며시 웃고 있음을 자각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첫날밤에, 아드리엔과 몸을 섞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술을 먹였다. 몸이 약하니 술을 마시면 금방 잠에 빠져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한 몸과는 달리, 그녀는 꽤 주당이었다.
느른하게 풀린 눈으로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웃는 모습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아무런 경계 없이 흐트러진 슬립 차림으로,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드리엔은 그가 모르는 ‘우리’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서, 그거 기억나요. 안?”
“……그 ‘안’이라는 이름.”
“네?”
“너무 오래된 애칭이니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노에비안은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보기 좋게 웃고 있던 말간 얼굴이 살짝 굳은 채 고개를 갸우뚱했기 때문이다. 그는 괜스레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목이 탔다.
“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아드리엔은 곧 밝게 웃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에비안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순간 숨을 멈추고 보드랍게 부딪치는 살결에 얼굴이 닿지 않도록 몸을 물렸다. 하지만 아드리엔은 그럴수록 그를 더 꼭 끌어안고 웃었다.
“그럼 ‘노아’는 어때요?”
“……음?”
아드리엔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살포시 무릎에 앉았다.
아, 맙소사. 이 연약해 빠진 공녀는 자신이 지금 어떤 차림인지도 모른 채 그의 어깨에 기대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노아. 예쁜 애칭으로 새로 불러줄게요.”
아드리엔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노아.”
옅은 청록빛에 가까운, 보석 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일렁였다.
“사랑하는 나의 노아. 나의 바다. 나의 전부.”
노에비안은 살면서 그토록 온전하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을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는 당신을 노아라고 부를 거야.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아요. 나만 그렇게 부를 거니까.”
아.
도대체 애칭 따위가 무엇이라고.
온전히 제 것도 아닌 사람이 속삭이는, 제 것이 아닌 감정이 무엇이라고.
“사랑해요, 노아.”
이렇게 가슴의, 어디 한가운데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을까.
***
“그 무엇의 주인도 될 수 없는 나를 맹목적으로 기다리던 그 여자를…… 평생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아야 할 내게 진심으로 의지하던 그 여자를 나는…….”
노에비안의 충혈된 두 눈은 눈물이 말라비틀어져 더 아파 보였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당신 사랑 타령,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더는 흘릴 눈물이 없어서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두통이 찾아드는 건 아드리엔 쪽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갖고 싶었어. 난 그냥…… 그냥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밤이 오면 다시 해가 뜨는 것처럼 당신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어.”
아드리엔은 온몸을 떨며 다시금 상처를 되새기는 노에비안을 저주했다.
“당신을 사랑할수록. 당신을 갖고 싶었어.”
노에비안의 한쪽 다리가 서서히 구부러졌다. 차가운 바닥에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데 가질 수가 없잖아. 내 것이…… 내 것이 아니잖아 당신은.”
“그만.”
마침내 두 무릎을 온전히 꿇어앉은 남자가 호소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황태자는 내 마음을 눈치채고 늘 밖으로 날 나돌게 했지. 늘 본인이 가야 할 곳까지 나를 보냈어. 나는 그가 당신에게 따로 접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수도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그리고 어쩌다 한 번 돌아오는 날이면…….”
한차례 다툼으로 생채기가 생긴 두 손이 바닥을 처절하게 긁었다.
“당신을 안고. 사랑하고. 갖고 싶었어. 당신을 품에 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육체는 바르데날도, 마음은 로아드네스의 것인 당신이……. 어떻게 하면 내 것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어.”
“그만!”
“그런데 그런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어! 당신의 건강이 나빠지고, 나빠지고…… 의사가 매번, 매번 고개를 젓는 그 순간 끝없이 나는 절망하면서도 바르데날도가 살아 있는 당신은 몰라도, 죽은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가진 않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졌어.”
노에비안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
“숙부의 얼굴이 피었습니다.”
“…….”
자신도 모르게 느슨한 표정을 했던 노에비안이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수도에 오자마자 입궁을 해야 하냐며 입을 삐죽이던 아내가 생각나서였다.
안부를 묻듯 가볍게 흐르는 목소리였지만, 노에비안은 순간 자세를 똑바로 하고 바르데날도를 마주했다.
“대공비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결혼 이후, 아드리엔에 대한 소식을 일절 묻지 않았던 황태자였다. 서슬 퍼런 도리스의 곁에서 잡혀 사는 듯 보였지만 황태자는 늘 도리스를 비웃었다.
‘멍청하고, 욕심만 많아서 다루기 쉬운 여자.’라고 부르면서.
늘 일 이야기만 하던 황태자의 말에 노에비안은 단번에 아드리엔을 그리던 단꿈에서 현실로 끌어 내려졌다.
“……많이 좋지 않습니다.”
“오늘내일한다는 말이 있던데?”
심드렁한 얼굴로 남 일처럼 말하는 바르데날도를 한 대 치고 싶은 감정이 일었다. 노에비안이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는데, 그것을 놓칠 바르데날도가 아니었다.
“숙부. 신혼의 단꿈에 젖는 것은 좋지만. 피레타 공녀의 주인이 나인 이상, 나는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불과 일 년 전의 노에비안이었다면, 무감각하게 고개만 끄덕였을 것이다. 어차피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은 목줄 묶인 개가 매시간 받는 뼈다귀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줘도 준 게 아닌.
주인이 빼앗아 가면 속절없이 뺏겼다가 배가 고파 꼬리를 흔들면 주어지는 개뼈다귀 같은 것.
주인이 다시 오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 말이다.
오늘처럼, 지금처럼 자신의 처지가 뼈에 사무쳤던 적은 없었다.
아.
‘헛살았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기회가 있을 때 황제부터 죽여 버릴 것을. 다 죽여 버리고 누구도 그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없게, 아드리엔을 빼앗아갈 수 없게 만들어 버릴 것을.
하지만 주인에게 길들여진 개는 언제나 그렇듯 배가 고파 으르렁거리면서도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인다.
“아드리엔 피레타가 죽어도. 그녀가 묻히는 곳은 트로비카 대공가의 묘지가 아니라…… 내 곁일 것이란 말입니다. 알아듣겠습니까?”
그 뼈다귀가 썩은 것일지라도 주인이 그것마저 내놓으라고 빼앗아 가버리면 품고 있을 수 없다는 걸 매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래서 네 잘난 주군에게 내 시신을 넘긴 거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는 노에비안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해서 고개만 저었다.
“내 시신과 내 어머니의 목걸이까지. 그렇게 내 모든 것을 저 괴물에게 넘겼다고? 나를 사랑했다면서?"
“그 목걸이는……!”
격양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굴이 흠뻑 젖은 노에비안은 몸서리치며 죽은 내 시신을 가리켰다.
“그 목걸이는 저 관의 열쇠야. 바르데날도가 그걸 알아. 넘길 수밖에 없었어.”
하.
정말 가지가지 하네.
나는 머릿속이 녹을 것 같이 아득해져 잠시 고개를 들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떨어져 내 몸을 짓이겼으면 좋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당신의 시신조차 가질 수 없다잖아.”
씹어뱉는 목소리는 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꽉 차 있었다.
“단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아드리엔. 앞으로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아드리엔…….”
쿵. 쿵. 대는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노에비안이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찧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히 가지고 싶었던 당신을, 내 가문의 묘지에조차 묻을, 수, 없다잖아……!”
낮게 소리친 노에비안의 이마가 퍽! 소리 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멀쩡하던 이마에 핏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노에비안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황태자와는 또 다르게 미쳐 있는 눈을 보자, 나는 나 역시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어 잠시 비틀거렸다.
노에비안이 눈을 크게 뜨곤 곧바로 일어나려 했다.
“아니.”
하지만 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억 안 나?”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꼭 말아쥐고 내가 속삭였다.
“내 어머니의 목걸이 없이는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 했잖아.”
아무리 그럴듯한 변명과 사정이 있었다 해도, 그가 날 속이고 기만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을 다시 사랑해달라며 뻔뻔하게 내 앞에 있는 그의 변명은 내 화를 돋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날 보고 싶으면…….”
아연한 빛을 띠던 짙푸른 눈동자에 곧장 이채가 돌았다. 원반을 던질 준비 중인 주인을 보는 듯한, 개를 연상케 하는 눈이었다.
‘계속 날 보고 싶다면’이라고 내건 조건에 한 줄기 희망이라도 엿본 게 분명했다.
땀에 젖은 목울대가 크게 꿀렁이는 게 보였다.
“가져와 아니, 뺏어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내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어느새 홀린 듯 무릎을 세워 앉은 노에비안이 언제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다리를 움찔거렸다.
“네 주인에게서. 내 어머니의 목걸이를 뺏어와, 이 개XX야.”
이를 악물고 하는 명령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내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분노와 함께 아래로 툭 떨어졌다.
노에비안이 곧바로 방만하게 널브러져 앉아 있는 제 주인에게로 튀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