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절망 속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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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절망 속에 피는 꽃
2022.04.30.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현실 같을지도 몰랐다.
로아드네스는 광인이나 다름없는 바르데날도의 차림이나 얼굴보다 머릿속을 사정없이 할퀴는 목소리를 부정했다.
입술을 달싹인 것도 여러 번,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되는대로 내뱉어버리고야 만 바르데날도 역시 흥분으로 차오른 숨을 내뱉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침묵은 서로를 숨막히게 할 뿐이었다.
“양보라니 우습지도 않지. 어머니의 유지가 없었더라도, 네가 내게 충성했겠느냐?”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쪽은 쭉 흥분한 상태였던 바르데날도였다.
“……형님을 사랑했으니 마땅히 형님을 따랐을 겁니다.”
로아드네스는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기계처럼 대답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어쩐지 불투명한 막으로 그것을 감싸버리고만 싶었다.
어찌 되었든 바르데날도는 지존이 될 몸이니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스스로 되뇌었다.
그는 삐걱대는 고개를 겨우 내저으며 방금 들었던 말 몇 가지를 지우려 애썼다. 그리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부녀자 실종 사건이 형님의 짓이었습니까?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구역인 북쪽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까지…… 대공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저지른 짓들입니까? 도대체 아드리엔의 시신은 왜 형님이 가지고 계십니까?”
이죽이던 바르데날도는 자신을 사랑했으니 따랐을 것이라는 로아드네스의 대답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아, 로안. 내가 한 일이 아니라니까. 저 꼴들을 보아라. 저 시궁쥐 같은 것들이 네 형님을 모함하는 꼴을!”
실상 누구도 황태자 바르데날도를 모함하지 않았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한 바르데날도가 로아드네스가 곧장 제 눈앞에 무릎 꿇지 않자 엄습하는 불안감에 못 이겨 되는대로 내뱉는 말뿐이었다.
“괘씸한, 괘씸한 숙부가 모든 일을 꾸몄다. 아니, 그의 정부가 모든 일을 꾸몄다! 숙부가 어찌 이곳에 들었겠느냐? 저 여자가 아니었다면 여기 근처에나 올 수 있었겠느냐?”
그럴듯한 변명이 습하고 축축한 지하실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점점 식어갔다.
“그래, 저 여자가 문제다. 블리에 아카시아 저 방탕한 여자가 문제야!”
점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이는 바르데날도뿐이었다.
“로안, 로안 내 동생. 내 사랑스러운 아우야. 내가 아까 널 좀 꾸짖었다고 해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야?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우리가 함께 싸워온 날들이 얼만데. 미안하다. 내가, 내가 약에 취해…… 술에 취해…… 도리스가 내게 약을 먹인 게 분명해! 그 망할…….”
깊게 침잠하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바르데날도가 아닌 아름다운 물건들과 시체가 즐비한 방을 훑고 있었다.
바르데날도를 죽일 듯 노려보는 노에비안. 누군가의 땀으로 지저분해진 아드리엔의 유리관. 그리고…… 그 뒤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엔까지.
유리관 뒤에 숨은 아드리엔을 보자, 묻어두고 묻어두고 또 묻어두었던 말이 불쑥 솟아올랐다.
“……저를, 증오하십니까?”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모든 것을 꾸몄고, 그의 정부가 도왔다며 정신없이 이 공간에 대한 변명만 늘어놓던 입이 얼려진 듯 멈추었다.
“하, 아직도 그런 말을…… 지금 이 꼴을 보고도…… 네가 나를 믿지 않으면…….”
“다 들었습니다.”
로아드네스의 눈이 대답을 바라듯 간절하게 일렁였다. 아드리엔의 시신과 아드리엔을 본 순간. 로아드네스는 더 이상 방금 들었던 말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다.
“다,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내 아우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을 피하고 싫어하더라도, 제 형님만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깨어지는 목소리 말이다.
힘없이 늘어뜨렸던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바르데날도는 젖은 생쥐 꼴을 한 채로 그를 응시했다.
아무도, 숨소리조차 쉬이 낼 수 없었다. 분노를 터트리지 않아도 로아드네스의 충격이 얼마나 상당한지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바르데날도는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제 앞에 서 있는 로아드네스가 낯설게 느껴졌다.
누가 아무리 모함할지라도.
블리에 아카시아를 향한, 기이할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
그 믿음이,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에 그대로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흥분하여 아무 말이나 주워 담던 바르데날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체념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짙푸른 눈동자를 유영하다 사라졌다.
“……사랑하려 노력했단다.”
방금까지 흥분해 어쩔 줄 모르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고 낮은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점점 감정이 표백되어 가는 것처럼 색이 옅어졌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차분히 꺼냈던 목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어 들어가 거의 속삭이는 듯했다.
“너 같이 불길한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니.”
그리고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로아드네스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
로아드네스는 보이지 않는 장검에 심장을 꿰뚫린 사람 같은 표정으로 황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정적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로아드네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굵은 눈물방울이 얼굴에 툭, 툭 떨어졌다.
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입에서 피만 터져 나올 것 같지 않다면 바르데날도를 향해 닥치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이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얼굴로 눈물을 떨구는 로아드네스를 감싸 안아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슬픔도, 분노도, 원망도 다 그러모아 꾹꾹 눌러놓은 얼굴은 단단히 잠긴 철문 같았다.
노에비안의 배신을 맞닥뜨렸던 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로아드네스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홧홧한 가슴은 누군가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뭐라 하건 말건 내게 온 신경을 집중하던 노에비안이 어느새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 손을 뻗었다.
나는 간절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노에비안은 우뚝 멈춰서서 유리관 근처에는 오지도 못했다.
나는 피에 젖은 손으로 뜨거운 가슴을 짚었다.
뜨거운 건 내 가슴이 아니라, 통통한 펜던트였다.
나는 품에 감춰두었던 단검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펜던트를 감싸 쥐었다.
목걸이에 닿자마자 손바닥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다. 동시에 아주 가까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초록빛이 닫힌 펜던트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노에비안은 숨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빛을 뿜어내고 있는 펜던트를 응시했다.
숨을 멈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간 강렬한 예감이 토기처럼 치밀어 올랐다.
내가, 절대 열리지 않는 이 유리관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예감 말이다.
유리관을 열어서 뭘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뜨거워진 손을 유리관 위로 올려놓았다. 반은 내 의지였지만 반은 아니었다.
마치 자석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내 손을 끌어다 유리관으로 붙이는 것만 같았다.
유리로 된 돔 아래, 내 시신을 받치고 있던 짙은 초록빛을 띠는 두꺼운 돌판에서 서서히 빛이 났다.
그 빛은 너무나도 미약해 언뜻 조명을 받은 반들반들한 돌이 잠시 색이 옅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게 범상치 않은 현상이라는 걸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목걸이에서 시작된 빛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이 선연했기 때문이다.
한순간 뜨거웠다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것 같기도 한 감각이 혈관을 따라 내 온몸을 돌고 돌아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유리관이 탁,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뚜껑이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을 때 나는 미약한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드리엔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내 시야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순간 누군가가 이 방의 불을 껐는지 물어볼 뻔했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습한 공기가 갑자기 폐부에 들어차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번쩍 눈을 떴다.
내 시야는 이전과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다시 내게 손을 뻗는 노에비안의 경악에 찬 얼굴, 그리고 내 눈앞에 허물처럼 스러져 내리는 블리에 아카시아의 몸이 보였다.
나, 죽은 건가. 블리에의 몸으로도.
“아드리엔, 아드리엔!”
노에비안이 미친 듯이 달려와 앞으로 쓰러지는 블리에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주저앉았다. 옆구리에 피가 흥건했다.
아까부터 다시 블리에와 노에비안에 대한 욕을 주절주절 늘어놓던 바르데날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로아드네스가 번개처럼 뛰어와 블리에의 몸을 노에비안에게서 빼앗아 안았기 때문이다.
턱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로아드네스가 블리에의 몸을 아기처럼 부둥켜안고, 여전히 피가 꿀렁이며 나오는 옆구리를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밀려난 노에비안 역시 어떻게든 그녀에게 닿으려 애쓰며 기어갔다.
“안 돼…… 안 돼…….”
“이런, 곧 죽을 것 같더라니.”
“안 돼, 아드리엔…….”
“그 여자는 아드리엔이 아니다, 로안. 여기 있는 모두가 미쳤군.”
여기서 제일 미친놈인 바르데날도는 내 이름을 부르며 블리에 아카시아를 부둥켜안는 남자들을 보며 비실비실 웃었다.
“뭐, 상관없나. 둘 다 죽은 사람이니.”
로아드네스가 이를 으득으득 갈기 시작했다. 그는 블리에의 숨결을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코 밑에 대어보았지만,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떠난 몸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유령이 된 걸까?
사경을 헤맬 때 봤던 환상처럼, 로아드네스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 어깨를 감싸 안아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의사를 불러, 의사를 불러라!”
로아드네스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큰 목소리로 지하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 이윽고 까마득한 계단 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사라졌다.
그 순간, 황태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런, 미친…….”
바르데날도가 황급히 2황자의 명령을 듣지 말라 소리쳤지만, 다시 들려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아직 바르데날도에게서 받은 상처가 아물지 못한 로아드네스가 블리에의 몸을 끌어안고 바르데날도를 노려보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이성이 뚝 끊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네 형님을…….”
저 새끼 입을 다물게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텐데.
분노가 끓어오르자, 손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다.
“……?”
아.
무심코 들어본 손은 정말 실재했다.
나는 영혼으로 부유하는 유령 같은 게 아니었다.
동시에 몸을 덮고 있던 꽃송이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이 내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아…….”
순간,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바싹 메마른 목을 타고 나오는 미약한 목소리는 늘 듣던 블리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아-.”
그것은 내 목소리. 아드리엔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블리에의 몸마저 잃고 떠오른 유령이 된 게 아니었다.
‘몸을 찾았구나!’
나는, 아드리엔의 몸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