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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면 (105/171)


105.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면
2022.05.04.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지만, 이상하게 죽기 전보다 훨씬 숨쉬기가 편했다.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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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했던 적이 있기는 합니까?”

떨리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유리로 가로막힌 공간 밖에서부터 또렷하게 들렸다.

아무도 내가 몸을 되찾은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나를 등지고 서 있는 바르데날도는 로아드네스의 질문에 날개 죽지를 꿀렁이며 온 힘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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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단 한 번도.”

저 개새끼.

나는 되찾은 손으로 유리관 뚜껑을 짚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열릴 것 같았다.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하는 바르데날도의 목소리가 내 귀로 들어올 때마다 그것을 그대로 씹어 침과 함께 뱉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했다.

아니, 저 망할 입을 좀 다물게 하는 게 우선일 테다.

평생을 황태자에게 헌납했던 로아드네스가 그의 숨통을 쉽게 끊어 놓기는 힘들겠지.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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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는 자각은 사실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블리에의 육체가 피도 많이 흘리고 황태자의 손에 숨이 끊어질 뻔했기 때문에, 내 영혼이 잠시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내 시신으로 들어온 걸까?

어쩌면 이생에 대한 진득한 미련이, 나를 본래의 몸에 붙잡아두고 있기라도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지만 나는 절박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죽었어야 할 나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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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해주었는데도, 현실을 깨닫지 못했구나. 어떻게 너 같은 놈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로아드네스의 손으로 차마 죽일 수 없는 사람이자, 내 원수인 바르데날도를 없애버리라고…… 주신께서 내게 주신 마지막 기회일지도.

아드리엔의 몸으로,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룰 수 있는 기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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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세웠던 잔챙이들 말고, 진짜 날 죽인 원수를 찌르고…….’

내 눈은 어느새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했다.

바르데날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단단히 세워놓았던 둑이 무너지듯 서서히 가라앉는 얼굴.

하지만 여전히 블리에의 옆구리를 틀어막고 흐느낌이 새어나가지 않게 이를 악물고 있는 턱까지.

이게 이생에서의 마지막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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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드네스 네게…….’

그리고 곧, 떨리는 내 시선이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블리에를 지나 내가 유리관 앞에 두고 온 단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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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지켜온 이 공간이, 외부인에게 드러나기 직전까지 몰리자 황태자는 정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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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엔 피레타도 네 눈을 봤다면, 절대로 너를 사랑할 수 없었을걸. 그건 내가 장담해. 묻고 싶어 견딜 수가 없겠지. 하지만 죽은 자에게 어찌 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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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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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신 답해주마. 아드리엔은 널 사랑하지 않았을 거란다. 네 눈을 보고서는, 네가 그 불길한 황자인 걸 알았다면 입은커녕 눈 한번 제대로 맞춰주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너를 사랑하는 사람에 가장 가까운 건 나뿐이야, 로안. 자…… 어서…….”

시궁쥐 같은 것들을 치우고 지상으로 올라가자.

바르데날도는 제 마음속 가장 어두운 그림자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온 사신처럼 로아드네스에게 속삭였다.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이 쓰러지고 죽은 듯 숨이 미약해진 순간부터 이미 제정신을 놓은 지 오래였다.

의사를 데려오라고 외쳤던 순간만이 그가 현실에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로아드네스는 오로지 자신과 바르데날도, 그리고 품에 안긴 아드리엔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갇혀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위를 이루었던 지난날들이 산산히 조각나고 밟혀서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그는 제게 상처 주지 못해 안달 난 얼굴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바르데날도를 응시했다.

아.

어째서 불현듯.

그날의 자신이 떠오르는가.

어머니 레티나 황후의 장례식 마지막 날.

무너지는 자신의 마음은 아랑곳없다는 듯 멀리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목소리.

누군가 자신을 좀 잡아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울어도 괜찮다고 보듬어 안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약해빠진 생각을 죽이고 또 죽이던 암흑 속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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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줘.’

그 말 한마디를 끝끝내 아무에게도 하지 못해 도망갔던 그날이. 왜 어제 꾼 악몽처럼 불현듯 떠오르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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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안고 있는 여자는 아드리엔도, 무엇도 아니야. 그저 숙부의 장난감에 불과했지. 그러니 괜한 미련은 버리고 얼른 올라가 관련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걸 막아, 로아드네스. 네 주군의 명령이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바르데날도가 곧이어 시퍼렇게 날이 선 얼굴로 종용했다.

주인이 버리고 간 개처럼 처량한 낯을 한 로아드네스를 보자 속이 마구잡이로 뒤틀리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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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지를 외면할 셈이냐? 이대로 사람들을 들여 기어코 네 형님을 불명예로 처박을 셈이냔 말이다. 다른 날도 아닌 아버지의 탄신연이다. 사람들이 오면, 미안하지만 나는 이 손으로 널 가리킬 수밖에 없어!”

바르데날도는 어머니의 유지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동요하는 로아드네스를 보며 조소했다.

그는 로아드네스를 위하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자신뿐이라고 속삭였다.

로아드네스가 처음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을 때처럼, 지옥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에게 제 주제를 확실히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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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어차피 아드리엔 피레타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내가 살아남아 황제가 되는 것이 어머니의 대의이자, 네 대의야! 네가 나가서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걸 막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의 대의를 위해 이 모든 걸 네가 저질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 네가 아무리 나를 원망한다 한들, 숙부를 원망한다 한들…… 문제아인 네 말을 누가…….”

하지만 바르데날도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묘한 위화감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푹-!

바르데날도는 날갯죽지에 엄습하는 고통에 잠깐 눈이 핑 돌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어나 그토록 크게 눈을 치뜬 적이 없을 만큼.

꿀처럼 달콤해 보이는 금발, 창백한 얼굴에 또렷하게 빛나는 연녹빛 눈동자.

이를 악물고 가느다란 손으로 제 날갯죽지에 단검을 박아넣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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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 좀, 제발 닥쳐.”

죽은 아드리엔 피레타가 충혈된 눈으로 그의 코앞에 와 있었다.

분명히 비명을 질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벌어진 입에서 끝내 소리를 내뱉지 못한 채 충혈된 눈을 홉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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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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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도 안 돼……!”

열린 유리관을 등지고 선 아드리엔 피레타의 신형에, 바르데날도는 귓전의 솜털마저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공포에 잠식되어 뒤늦게 터져 나온 등의 고통이, 마침내 그를 차가운 바닥에 쓰러뜨렸다.

***

비겁하게 레티나 황후까지 들먹이다니!

끝까지 로아드네스를 제 뜻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황태자의 머리통부터 후려칠지 말지 짧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선 유리관 뚜껑을 밀어내고 단검부터 주워들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찌르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고 가져왔던 단검을 황태자에게 겨누게 될 줄 나도 몰랐다.

단검을 주워들고 잠시 핑그르르 도는 시야를 바로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건 로아드네스 근처에 있던 노에비안이었다.

그는 유리관 뚜껑을 열고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숨이 멎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바르데날도의 어깨너머, 로아드네스에게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로아드네스는 분노와 경멸, 서글픔과 오열을 동시에 눌러두고 이를 악다문 채였다.

그 얼굴은 인내하는 무인과도 같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본 적도 없는 로아드네스의 소년 시절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나는 제 할 말만 개소리처럼 짖어대는 바르데날도의 날개 죽지에 온 힘을 끌어모아 단검을 꽂아 넣었다.

젖은 살을 가르고, 단단한 뼈가 날카로운 단검 끝에 턱 걸리는 느낌이 손바닥에 전달됐다.

아. 해냈다.

기묘한 희열이 전신에 파도처럼 넘실댔다.

로아드네스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로 굳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블리에의 몸을 내려놓고 멍하니 일어나는 로아드네스의 시선과 내 시선이 성기게 얽혔다.

나는 심장이 저며 드는 것만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제 형님인 바르데날도를 상처 입히고 말았으니, 나는 로아드네스의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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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로아드네스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몰라.’

나는 비틀비틀 다급한 걸음걸이로, 여전히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로아드네스에게 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는 숨 쉬는 것을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해 앞으로 쓰러진 바르데날도를 꾸욱 지르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상처 입은 로아드네스의 두 뺨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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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 아드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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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데날도, 이 개자식 말은 다 틀렸어.”

아.

버석하고 건조한 모래알이 목에서 흩어져 나오는 것 같았지만, 분명히 아드리엔…… 내 본래 음성이 맞았다.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눈물이 울컥, 하고 쏟아져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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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아드리엔은 네 눈을 보고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 기적 같은 순간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내고 죽어버리란 계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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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뻐, 안.”

연거푸 내 이름을 되뇌는 것 외에 말을 건넬 생각조차 못한 채 굳어 있는 로아드네스의 이마와 내 이마를 마주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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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의 태양같이. 깊은 바다 위를 쓰다듬는 노을같이.”

늘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 두 손바닥 아래 젖어 드는, 동시에 떨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단단한 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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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좋아하고 있어, 안.”

꿈틀대는 바르데날도의 등을 나는 온 힘을 다해 눌러 밟고 까치발을 들었다.

흔들리는 로아드네스의 눈을 꽉 붙들어 매듯 똑바로 응시하던 나는 세상과 이별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늘 탐냈던 그 입술에 내 젖은 입술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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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석하게 메말랐지만 그 어떤 것보다 뜨거운 감촉이 입술 전체를 감싸고 내 몸을 빠르게 덥혔다.

화답할 생각조차 못 하고 굳어 있는 그의 아랫입술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단 과일을 대하듯 베어 물고 더 깊게 입을 맞췄다.

온전한 아드리엔 피레타로서 하는 입맞춤이라, 눈에서 아무리 많은 눈물이 떨어져도 나는 슬프지 않았다.

아, 이 얼마나 찬란한 마지막인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이기적인 내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분노와 환희가 섞여 폭죽이 되고, 머리 위로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이런 감각은 이기적인 아드리엔의 가장 완벽한 마지막이 아닐 수 없었다.

죽어있던 몸이 분명한데도.

분명 멈추었을 심장이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쿵쿵대며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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