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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네가 죽여 (106/171)

106. 네가 죽여 202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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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젖은 입술이 떨어졌을 때, 첫 입맞춤을 나눈 연인은 해후의 시간을 가질 새도 없었다. 기적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버거워 먼저 입술을 뗀 건, 로아드네스였다. 잠시 꿈결을 걷는 듯 멍한 표정이었던 로아드네스는 제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샹들리에 빛으로 일렁이는 짙은 금발.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조용히 들어 올려진 눈꺼풀 아래로 그보다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소 창백한 색이었지만 로아드네스의 눈에는 가장 아름다운 입술은 그의 것임이 분명한 촉촉한 게 살짝 묻어 반짝였다. 잔뜩 일그러진 마음 아래로 병증 같은 간지러움이 치솟았다. 동시에 눈물도 아닌 무언가가 제 단전을 치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드리엔이었다. 아드리엔. 그가 기억하는, 그리고 그의 기억보다 훨씬 찬란하고 바스라질 것 같은 아드리엔이 눈앞에 있었다.

16558470948887.png “안.”

창백한 얼굴로 바르데날도를 찌르고.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입술은 맞댄 이는 아드리엔이 맞았다. 마구잡이로 엉겨 있던 머릿속은 바르데날도를 쓰러뜨린 아드리엔이 그를 짓밟고 올라서는 순간부터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날뛰던 응어리도 일순 찬물을 들이부은 듯 굳었다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멀어져갔다. 로아드네스는 선명히 닿았다 떨어진 아드리엔의 입술에 끌려가듯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래. 차라리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이기를. 감당하지 못할 진실 따위, 평생을 헌납했던 가족의 진심 따위……. 진짜 아드리엔이 맞냐는, 네가 다시 몸을 찾았냐는 그런 상투적인 말은 애초에 나오지 않았다. 로아드네스는 다만 자신을 붙잡아 주려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그녀가 해주었던 말들을 믿고 싶었다. 간절했다. 침잠하던 눈이 조용히 감기고, 아래로 뜨거운 눈물을 떨군 로아드네스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하지만 지하의 악마는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16558470948891.jpg “젠…… 장…….”

말없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던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맞닿으려 하기 무섭게, 잠시 조용하던 황태자가 발악을 하며 일어나고자 애쓰기 시작했다. 로아드네스는 멍하던 얼굴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아드리엔을 끌어당겨 곧장 제 뒤에 숨겼다. 황제의 탄신연이라 홀에 있었기에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지만, 아드리엔을 보호하려는 그의 살기는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였다.

16558470948891.jpg “X발 내가 정신이 나가버렸나. 지금 뭘 본 거지? 숙부…… 숙부!”

등에 꽂힌 단검을 뽑지도 못한 채, 바르데날도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릎으로 겨우 일어나 앉은 그는 그제야 로아드네스의 뒤에 서 있는 아드리엔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앞장선 로아드네스를 마주했다. 노에비안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태자를 쏘아보던 아드리엔은 제 뺨에 선명히 박혀 드는 노에비안의 시선을 느꼈지만, 끝끝내 외면했다. 털썩, 노에비안은 뒤늦게 다리에 힘이 풀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참았던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대답 대신 공기 중에 흩어졌다.

16558470948901.png “아드리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다소 냉정함을 품고 바닥으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아드리엔은 제 팔을 꾹 쥐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너른 등을 올려다보았다.

16558470948901.png “고마워.”

16558470948887.png “!”

정신이 번쩍 든 로아드네스가 짧고 낮게 감사함을 전했다.

16558470948891.jpg “모두가, 짜고, 날 속였구나! 모두가!”

제멋대로 오해한 바르데날도가 다시 헛소리를 시작하자 아드리엔의 팔을 쥔 로아드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드리엔은 곧바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16558470948887.png “로안……!”

16558470948901.png “내가 죽여야 해.”

그가 낮게 속삭이기 무섭게, 바르데날도가 아드리엔을 로아드네스에게서 끌어내려 손을 뻗었다. 고통으로 구부러진 등에서 팔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리석게도, 그 앞을 막아선 제 동생이 자신을 해하지 않으리란 기이한 확신으로 가득 찬 행동이었다. 로아드네스는 바르데날도의 손이 자신을 지나쳐 아드리엔에게 닿기 전에 그의 뺨을 퍽 소리 나게 밀었다. 실상 뺨을 맞았다기보단 옆으로 밀려난 것이었으나 파괴력은 굉장했다. 실전 전투로 다져진 솜씨는 단번에 바르데날도를 밀어냈을 뿐만 아니라, 등에 꽂힌 단검까지 동시에 거둬들였다. 단검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꿀럭, 솟아났다.

16558470948887.png “로안!”

아드리엔의 외침이 로아드네스의 귓전에 잠깐 고였다가 떨어져 나갔다. 바르데날도는 나가떨어진 그대로 널브러졌다가, 엄습하는 살기를 느끼고 맨발로 바닥을 밀어내며 물러났다. 그가 도망친 곳은 고작 노에비안의 앞이었다.

16558470948891.jpg “숙부…… 숙부, 숙부!”

여전히 그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에비안의 시선은 줄곧 뜨거운 피로 덧칠된 단검을 든 로아드네스를 지나 아드리엔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잘근 깨문 아랫입술과 함께 욕을 씹어뱉은 바르데날도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로아드네스의 거대함을 뼛속에 아로새겼다. 로아드네스가 위협하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느낀 작은 짐승처럼 바르데날도의 몸이 저절로 발발 떨렸다.

16558470948891.jpg “붉은 눈…….”

들끓어 오르는 용암 같은 눈을 보자 그 속에 잠겨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인 바르데날도는 끝내 로아드네스를 지옥에 빠뜨릴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16558470948891.jpg “붉은 눈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

위험을 직감한 짐승의 발악은 처참했다.

16558470948891.jpg “발톱을 숨기고 있던 2황자 로아드네스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제 형님인 황태자를 죽여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려 한다!”

죽을 위기에 놓인 짐승이 갖은 감각을 끌어올려 위험을 인식하듯. 바르데날도는 수없이 드나들었던 이 비밀의 방 입구에서 로아드네스가 불렀던 외부인들이 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 소리를 감지했다.

16558470948891.jpg “그 괴담이 맞았구나! 내 너를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괴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의 어머니는 지하에서 통곡하시겠구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내 동생아!!”

숨통을 틀어막는 살기에 눌려, 바르데날도는 목에서 피가 솟구칠 만큼 소리쳤다. 침잠해 있던 로아드네스의 눈에 레티나 황후에 대한 이름 모를 감정이 안개처럼 드리워졌지만, 그뿐이었다. 잠깐이지만 동요하는 모습에, 끝없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듯 밝아졌던 바르데날도의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검을 틀어쥔 로아드네스의 손에 더 굵은 힘줄이 돋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로아드네스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이던 빛은, 어느새 분노에 눌려 더 이상 기를 펴지 못했다. 바르데날도는 순간 직감했다. 저건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눈앞의 적을 없애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눈이다.

16558470948891.jpg “안 돼. 안 돼. 난 어머니의 희망이야. 난 어머니의 영광이야! 로안! 천한 계집에게 속아, 네 형제를……!”

그때였다.

16558470948887.png “로안!”

기적처럼 바르데날도의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황금의 파도처럼 출렁이는 금발이 두 팔을 벌려 바르데날도 앞을 막아서고 로아드네스와 대치했다. 날카로운 검기가 삽시간에 사그라들고, 괴롭게 일그러진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16558470948901.png “……비켜줘.”

16558470948887.png “네 손에 의미 없는 피를 묻히지 마. 없애야 마땅한 사람이지만, 네 손으로 죽이고 괴로울 만한 사람이면 그러지 마.”

아드리엔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16558470948901.png “그 어떤 후회가 있더라도. 내가 없애야 해.”

이번만은 그녀의 말을 따를 수 없다는 듯 로아드네스가 잇새를 짓씹었다. 바르데날도는 그의 인생을 짓밟았다. 형님을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를 이용했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다른 사내에게 떠넘겼다. 그도 모자라 그 여인을 죽여서 자신의 곁에 두려 했다. 로아드네스는 비록 아드리엔을 죽였다는 바르데날도의 고백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죽음에 제 형님이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을 피부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어서, 아드리엔이 바르데날도의 손에 다시 한번 죽어버렸다면? 생각만으로 머리가 펑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노에비안을 쳐냈을 때. 노에비안이 망설임 없이 제 동아줄인 바르데날도를 지목했을 때부터 그는 더 냉정하게 바르데날도를 감시했어야 했다. 바르데날도를 더 강하게 의심했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어머니의 영광을 찾아줄 수 없더라도……. 제 눈앞에 살아 있는 아드리엔, 나아가 이 나라 전체를 기만하는 바르데날도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능이 벼락처럼 떨어져 그를 지배했다.

16558470948901.png “나는, 형님을 이대로 둘 수 없어.”

붉은 눈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다. 어쩌면 그 괴담이 맞는지도 몰랐다. 아드리엔보다 오래 사랑했던 형님을 죽여 없애면 그의 마음은 평생을 지옥 속에서 헤맬 테고, 어머니는 지하에서 통곡하겠지. 그렇다고 이대로 모르는 척 둘 수 있는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런 형님이라도 어머니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세우면 되는 것인가?

16558470948901.png ‘어머니가 진정 그런 걸 원하셨을까?’

로아드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더라도, 되살아난 아드리엔을 위협할 바르데날도를 이대로 두는 건 더 이상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16558470948901.png “내가 끝내게 해줘.”

그가 아드리엔을 향해 애원하듯 목을 긁어 말했다. 죽여 후회하는 것조차 자신의 몫이다. 아드리엔이 그런 것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아드리엔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로아드네스는 이미 손에 피를 많이 묻혔다. ‘론타의 문제아’라는 별명은 형제가 더 빛나길 바라며 그가 스스로 만든 이미지일 뿐. 이 나라를 위해 싸워왔다는 자긍심이 단번에 부서지고 제 형님의 죄로 그녀가 상처받았을 것이란 죄책감이 그를 잠식하고 있음을 아드리엔은 알았다. 아드리엔은 로아드네스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다시 입을 맞췄다. 뜨겁고 거칠거칠한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게 고스란히 그녀의 입술로 전달되었다. 그와 이마를 맞대고, 아드리엔은 이렇게 씹어 뱉었다.

16558470948887.png “그를 죽일 사람은 따로 있어.”

아드리엔은 그들을 망연히 지켜보고 있는 노에비안을 향해 몸을 틀었다. 한때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밤바다 같은 눈동자는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거칠게 일렁였다. 아드리엔은 자신의 손을 붙잡으려는 로아드네스의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노에비안을 향해 자박자박 걸었다. 그리고 로아드네스의 손에서 손수 거둬들인 단검을 무릎 꿇은 노에비안의 앞에 내던졌다. 쨍! 하는 쇳소리와 함께 굳어 있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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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70948887.png “당신이 죽여.”

1655847100929.png “!”

잘게 흔들리던 노에비안의 눈동자 아래로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흘렀다. 아드리엔이 싸늘하게 이어 뱉었다.

16558470948887.png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누구든 그 목을 베어버릴 거야.”

아드리엔의 목소리는 음산했지만 동시에 오싹할 만큼 다정했다.

16558470948887.png “내게 분명히 그리 말했지.”

그날의 노에비안처럼. 노에비안의 기다란 손가락이 제 무릎을 빠득 쥐었다.

16558470948887.png “그러니 약속을 지켜. 약속을 지키는 남자라며.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분명히 그리 속삭였잖아. 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그 목을 베어버릴 거라고.

16558470948887.png “그러니까…….”

아드리엔이 재차 씹어뱉듯 속삭이며 턱 끝을 치켜들었다.

16558470948887.png “……네가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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