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내가 널 깨워줄게 (107/171)


107. 내가 널 깨워줄게
2022.05.11.


16558471109991.jpg

 
충혈된 푸른 눈이 나를 형형하게 직시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이미 주인을 한 번 배신한 개는, 새로운 주인에게 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16558471109998.png

“그럼 당신을 용서할게.”

로아드네스의 다급한 손길이 내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나는 노에비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짙푸른 눈에 한차례 소용돌이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번뇌를 거듭하던 눈이 새로운 희망의 빛을 띠고 번뜩이는 게 보였다.

깊게 가라앉은 노에비안의 시선이 곧장 내가 던져놓은 단검으로 내려갔다. 다소 앙상해진 길쭉한 손이 서서히 단검으로 향했다.

16558471110002.jpg

“숙부, 숙부…….”

공포로 굳어버린 황태자는 바닥을 긁으며 노에비안을 불러대다, 답을 듣지 못하자 전력을 다해 입구로 기었다.

16558471110002.jpg

“사람, 사람 살려…… 액자를 밀어라. 어머니의 초상을 밀어 이 멍청한 것들!”

여전히 입구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기척을 향해 황태자가 발광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까마득한 위에서 들렸다. 깊은 암흑에 동요하는 목소리들이 벽을 타고 내려왔다.

노에비안이 단검을 집어 들었다.

16558471110002.jpg

“어서, 어서 내려와! 으윽…… 젠장! 젠장! 숙부! 숙, 숙부!!”

내 팔을 붙든 로아드네스의 손에 더 큰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그의 손등을 감싸 잡아주었다.

벌떡 일어난 노에비안이 바르데날도에게로 걸음을 빨리했다. 계단 입구 벽을 짚고 겨우겨우 일어나 올라가려던 바르데날도의 몸이 그에 의해 돌려졌다.

푹.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노에비안이 결국 제 주군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황태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마지막으로 노에비안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주르륵 쓰러졌다.

동시에 로아드네스 역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 팔을 쥐고 있던 뜨거운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나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로아드네스는 제 얼굴을 감싸 쥐고 낮게 신음했다.

제아무리 배신당하고 실체를 보았어도, 그와 함께했던 추억까지 단번에 날려 보내기엔 시간이 필요할 테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마음에서 잘라냈던 지난날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결국 두 손에 얼굴에 묻어버린 로아드네스의 머리를 한차례 위로하듯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곧장 벽에 걸린 화려한 태피스트리 하나를 뜯어 쓰러진 블리에를 덮었다.

태피스트리는 워낙 커서 자그마한 여인의 몸을 가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쓰러진 황태자를 외면한 노에비안의 시선이 나를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보상을 바라는 개의 눈빛.

나는 미소 지었지만 동시에 두 눈을 일그러뜨렸다.

16558471109998.png

“노아.”

내 입에서 흘러나온 노아라는 단어에, 노에비안의 어둑한 시선 끝자락에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16558471109998.png

“당신을 용서할게.”

16558471110027.png

“아드리엔…….”

16558471109998.png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돌아가겠다는 뜻은 아니잖아?”

차마 토를 달지 못하는 입이 벙긋거렸다.

노에비안의 지옥이 되고 싶었던 지난날은 이미 내게 과거였다.

나는 이제 그의 지옥조차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아무런 존재도 되고 싶지 않았다.

노에비안의 지옥 따위가 되는 건 쓰러진 블리에나 되라지.

나는 블리에의 몸에 태피스트리를 더 꼼꼼히 덮어주곤 몸을 세웠다.

노에비안은 그저 멀거니 나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바르데날도의 피가 묻은 손등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사랑도, 애증도…… 심지어 분노나 경멸조차도 내 눈에 스며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얼굴은 퍽 처참했다.

16558471110038.jpg

“전하! 전하!!”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로아드네스가 불렀던 의사는 물론이고 아까 작은 숲에서 노에비안을 끌고 갔던 기사들과 그 동료들이 여럿 몰려 들어왔다.

비밀의 방에 들어선 사람들은 처참한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너무 놀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사람도 있었다.

나는 혼란을 틈타 일어나 있던 로아드네스의 품에 안겼다. 로아드네스가 움찔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16558471110038.jpg

“화, 황태자 전하! 전하!!”

16558471110038.jpg

“전하! 전하!!”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는지 의사가 정신없이 황태자를 살폈다.

16558471110038.jpg

“어서, 어서 전하를 밖으로!!”

나는 로아드네스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기사의 품에 안겨 지하실을 벗어나는 황태자를 응시했다.

남은 기사 몇몇이 황망한 눈으로 노에비안과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나는 로아드네스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황태자를 찌른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가리켰다.

16558471109998.png

“대공께서, 황태자 전하를……!”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누가 황태자를 찔렀는지 물어보고자 남은 게 아니다. 그저 내게서 확인받고 싶었던 것뿐이지.

형님이 당하는 걸 눈앞에서 본 로아드네스의 절망적인 얼굴.

아직도 살기가 가시지 않은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흐트러진 모습. 그리고 그의 손에 선명히 남겨진 핏자국과 그 앞에서 쓰러졌던 황태자의 모양새만 보아도 유추했을 테다.

‘황태자파의 수장 자리에서 쫓겨났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앙심을 품고 황태자 바르데날도를 시해하려 했다.’는 지극히 단순한 결론을 말이다.

16558471140583.png

“2 기사단을 불러와라.”

16558471110038.jpg

“전하,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16558471140583.png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황태자 전하를 시해했다.”

로아드네스의 확인까지 떨어지자 처음 노에비안을 놓쳤던 기사 둘이 이를 빠득 갈며 노에비안을 붙잡았다.

양팔이 사로잡힌 채 끌려나가는 노에비안의 시선은 끝까지 내게 머물렀다.

전시된 시신들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던 나머지까지 이곳의 조사를 맡게 될 2 기사단을 부르러 사라졌다.

휘황찬란한 비밀의 방과 그 안에 전시된 수많은 시신들의 향연에 질려버린 그들은 도망치듯 지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당연히 태피스트리에 덮여 있는 블리에와 이질적으로 비어 있는 유리관 따위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블리에의 피와 황태자의 피, 그리고 묘하게 습하고 축축한 냄새가 그제야 코에 선명하게 스몄다.

지하에 남은 건 로아드네스와 나, 둘뿐이었다.

여전히 안긴 상태였던 내가 잠시 몸을 물리려 하자, 로아드네스가 되려 더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우리는 한참이나 그리 있었다.

누구도, 그 어떤 말도 서로에게 건네지 못한 채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로아드네스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속으로 흐느끼는 것처럼 몸을 꿀렁였다.

16558471140583.png

“내가, 끝냈어야 했는데.”

짙게 드리운 정적을 가른 건, 로아드네스의 낮은 음성이었다.

마음이 죄다 갈려버린 목소리라 나는 그저 그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로아드네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되살아난 내 존재에 대해 확인하듯 몇 번이고 세게 끌어당겨 안았다.

16558471109998.png

“로안. 도움이 필요할 땐, 받는 거야.”

16558471140583.png

“…….”

16558471109998.png

“네가 나였더라도, 내게 바르데날도의 끝을 맡기지 않았을 거고.”

황태자는 죽었을까?

이상하게도, 바르데날도가 죽었든 죽지 않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58471109998.png

‘끝이구나.’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이 난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만족감이 차올랐다.

내 곁에 있는 로아드네스 덕분인지도 몰랐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손으로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심장을 찔렀다. 그만하면 괜찮은 복수가 아닌가.

물론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어떤 방식으로 날 죽여 시체를 가지려 했는지까지 밝히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찌 되었건 결과는 나온 셈이니까.

나는 아직 나를 품에서 놓지 않으려는 로아드네스에게 조용히 빠져나와 블리에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태피스트리를 거둬 창백한 블리에의 얼굴을 살폈다.

16558471109998.png

“!”

혹시나 해서 손가락을 코 밑에 대어보니 미약하지만,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블리에의 몸을 흔들었다.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얼굴은 아주 작은 인상도 찌푸려지지 않았다.

마치 숨을 쉬는 인형처럼. 내가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 생각할 만큼 미약한 호흡만 유지한 상태인 것이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살핀 로아드네스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펜던트를 더듬었다.

그리고 멍하니 펜던트를 열어 한참을 보다가 곧 그것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미미하지만 안에 돌이라도 든 것처럼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뚜껑 쪽 틈을 벌리자 조약돌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돌이 들어 있었다.

16558471140583.png

“……마나석인가.”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로아드네스가 단번에 그 돌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내 유리관 아래를 받치고 있는 돌과 정확히 같은 색이기도 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관 속에는 이 방에 장식된 화려한 생화들과 같은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지만 내 유리관은 달랐다.

내가 장례 첫날 보았던 꽃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유리관을 열지 못해 바르데날도 취향의 꽃으로 장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내 유리관 속 꽃들은 방금 따온 것처럼 싱싱했다.

16558471109998.png

“이 마나석이, 여기 이 꽃처럼 내 몸의 시간을 멈추어주고 있었던 것 같아.”

100일이 지나도 여전히 싱그러운 꽃송이들을 매만지며, 나는 돌을 펜던트에 집어넣었다.

16558471109998.png

“어쩌면…….”

나는 블리에를 내려다보며 마른 숨을 집어삼켰다.

16558471109998.png

“나는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저런 상태였을지도 모르지.”

16558471140583.png

“!”

16558471109998.png

“진실을 누가 알겠어?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 이후엔 기억이 없고, 유리관이 이 목걸이를 가진 내 손에서만 열리는 거라면 처음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 다른 사람은 확인해보지도 못했을 텐데.”

16558471140583.png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16558471109998.png

“죽은 사람도 되살아나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것처럼 꾸미는 것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복수를 위한 진실 따위 이제 거의 다 알게 된 것과 다름없음에도 나는 또 다른 진실에 목이 말랐다.

기분이 아주, 아주 이상했다.

저 여자의 활력을 빼앗아오기라도 한 듯, 나는 이전보다 훨씬 숨쉬기도 편하고 몸에 힘이 돌았다.

블리에도, 나도 사실은 죽지 않고 있는 거라면……?

16558471109998.png

“로안. 나를…… 좀 도와줘.”

순간 번뜩이는 생각에 나는 로아드네스에게 저 여자를 안아 들어 관 속에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무리 닦아도 옆구리에서 조금씩 솟아나던 피는 블리에가 유리관 안에 들어가자마자 멈추었다.

몸을 움직일수록 내가 잠깐 소생했다가 소멸해버리고 말 영혼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와닿았다.

내가 원래부터 완전히 죽은 게 아니었다는, 본능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피가 멎은 블리에를 보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홀린 듯이 구석에 있던 벽장을 열자, 바르데날도의 인형놀이를 위한 아름다운 옷들이 즐비했다.

나는 지금 내가 입은 것과 가장 비슷한 색의 드레스를 블리에에게 갈아 입혀주었다.

망자에게 입히는 아름다운 드레스는 살아생전에 입는 불편한 드레스가 아니라 수월했다.

로아드네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을 쏟아낼 듯하다 말없이 그것을 도왔다.

방금까지 내가 누워 있던 유리관 안에 블리에가 완전히 안치되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몸을 회복해 깨어난 지 어느새 2주가 가까이 흐른 시간이었다.

블리에의 머리카락 뿌리 부분이 가까이 보아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금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화병에 꽂혀 있던 아름다운 꽃들을 가져와 꽃송이를 꺾어 그 위에 흩뿌렸다.

16558471140583.png

“……아드리엔?”

내가 뭘 하려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로아드네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점점 차오르는, 이유 모를 고양감에 빠져들었다.

화병을 틀어쥐고 분수대로 가서 물을 받아 블리에의 머리카락에 흩뿌렸을 때, 그 고양감은 절정에 달했다.

16558471140583.png

“아드리엔, 도대체 뭘…….”

예전에 한번 보았던 것처럼 블리에의 머리카락은 금세 금빛으로 변했다. 마법처럼 말이다.

로아드네스가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16558471109998.png

‘이게 환생도, 빙의도 아니라면…… 그저 우리의 영혼이 바뀐 거라면. 내가 사실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었던 거라면 그건 너 때문이겠지.’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나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블리에가 무슨 수를 쓴 것이라는 걸.

나는 블리에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어느새 온기가 돌아온 내 손에 의해 미지근한 뺨의 온도가 따듯해졌다.

16558471109998.png

‘네가 확인하라는 진실이 이런 거였니?’

한참 그녀를 들여다본 나는 조용히 유리관을 닫았다. 돔형의 유리 뚜껑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혔다.

16558471200681.jpg

내 추측대로 밑에 깔린 마나석이 몸의 시간을 멈춰준 것이라면…….

16558471109998.png

“……내가 널 깨워줄게.”

무지했던 나를 깨워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녀가 눈을 뜰 차례였다.

그리고 남은 진실을. 아니 무엇이든 내게 말을 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깨워주겠다는 내 속삭임에도 유리관 속 블리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16558471109998.png

“그러니, 이번엔 네가 아드리엔이 되는 거야.”

지난 몇 달간 내가 너로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블리에 아카시아는, 아드리엔 피레타가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