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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지옥에는 지옥으로 (108/171)


108. 지옥에는 지옥으로
2022.05.14.


역대급으로 화려했던 황제의 탄신연.

그 마지막 날 이후 수도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살얼음판이 되었다.

죄인의 신분이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황제의 자비로 입궁했던 날, 제 주군이던 황태자에게 시해를 시도했다,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황태자를 저주하기 위해, 본인이 저질렀던 죄의 증거인 부녀자 실종사건의 피해자들의 시신을 황태자궁 아래에 보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란 것은 참 가변적이고 무서운 것이라, 노에비안에 대한 질 나쁜 소문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시체를 탐하는 노에비안 트로비카.

그가 첫눈에 반한 아드리엔 피레타는 유리 몸으로 유명했었으니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시체를 보존했다는 소문이 귀족 사회를 충격으로 휩싸이게 했다.

황실에서 조사 중이니 함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소문은 수도를 넘어 온 제국으로 번질 뻔했다.

그리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탄신연의 주인공.

황제 율리어스는 로아드네스가 가져온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시신을 알현실에서 받아보고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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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신들은 모두 기존 실종 사건의 피해자들의 초상과 비교 후 집으로 돌려보낼 예정입니다.”

넋을 놓은 황제는 대답이 없었다.

로아드네스 역시 약간 넋이 나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보고서의 나머지 내용은 곁에 있던 빈센토가 줄줄 읽었다.

침묵을 지키던 로아드네스가 내용 중 아드리엔에 대한 보고가 나오자 곧장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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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의 침실을 지키던 호위의 증언을 자세히 말해보자면.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대공과 관련된 급한 전언이 있다며 침실에 들었고, 곧이어 대공이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겠다며 찾아왔답니다. 그러니 부인 역시 현장에 있었을 뿐 피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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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는 몇 번째 듣는구나. 그 부인이 너와 선약이 있어서 데려오라 했다지? 이미 낌새를 알아챘던 게야.”

황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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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데날도를 찌른 게, 노에비안이 확실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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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주름진 입가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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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세다 남작 부인을 죽인 건…….”

재깍재깍 대답하던 로아드네스의 입이 다물렸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유리관에 못 박힌 듯 시선을 돌리지 않던 황제가 안광을 빛내며 로아드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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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 들리는 소문처럼 노에비안이냐? 아니면…… 바르데날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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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침묵이 모든 대답을 대신하기도 한다.

황제가 잠시 비틀거렸다.

로아드네스는 그를 부축하지 않고 고요히 바라보았다.

황제 율리어스는 어제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노하여 황태자궁의 침실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입구에 걸려 있는 레티나 황후의 초상을 보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었다가 다시 되돌아 나왔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을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납치하고 살해까지 했다면…….

황제는 유리관 위에 엎드린 채 한참 숨을 고르다가 비틀비틀 중심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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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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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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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짓이라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황제의 뜻은 분명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이용해 바르데날도 ‘론타’의 허물을 덮겠다는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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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님의 미친 짓거리는, 이미 네 숙부의 칼부림으로 충분한 벌을 받은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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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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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보고 온 참이다. 너도 줄곧 바르데날도를 지켜보다 왔으니 알겠지. 그놈은 지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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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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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한 놈. 이런 천하의…… 아…….”

황제는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시신을 보자 답답증이 이는지 가슴을 치며 스르륵 주저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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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얼마나 미친 짓을 했든. 어쨌든 네 형님이고 내 아들이야. 만에 하나 주신께서 그놈을 데려가신다면…… 마지막 가는 길을 불명예스럽게 보내줄 수 있겠느냐.”

아.

이 얼마나 절절한 부성애인가.

황제에게 평생을 바쳤던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듣는다면 가슴을 치고 저주를 퍼부을 만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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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네 어미를 생각해라. 바르데날도 마저 레티나의 빛이 되지 못한다면 불쌍한 나의 레티나는 후대에 어찌 알려지겠느냐?”

그는 곧 로아드네스가 레티나의 어둠이며, 불길한 로아드네스에 이어 바르데날도까지 미쳤다고 역사에 남는다면 레티나의 죽음에 아무런 영광도 없다는 뜻이었다.

로아드네스는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관을 끌어안고 기도하는 황제를 보았다.

슬픔에 잠긴 율리어스의 얼굴이 제게서 점점 멀어져 점이 되는 것 같았다.

본인이 가슴속에 눌러두었던 본심을 말해버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기도하는 아비의 얼굴이 낯설었다.

화려하고 안락한 황궁.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

얼마나 많은 착각 속에 살아온 인생인가.

딛고 서 있던 환상이 쨍그랑 깨지자 로아드네스는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설움을 가까스로 굳게 걸어 잠갔다.

한참 흐느끼는 아비를 보고 있던 로아드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알현실 문을 나섰다.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기척 없는 걸음을 따라 복도에 길게 늘여지더니 곧장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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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상태는 심각했다.

내가 꽂았던 등 쪽의 상처는 꽤 깊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돌아온 내 몸으로 찌른 것이라 힘이 충분치 못했던 데다가, 그리 급소는 아니어서 출혈을 막고 몸조리를 하면 충분히 나을 만한 상처였다.

하지만 노에비안이 찌른 가슴은 심각했는데, 출혈량도 상당한 데다가 급소에 가까워 단검을 뽑아내는 동안 어마어마한 고통에 바르데날도는 여러 번 기절했다.

황궁 주치의가 모조리 불려 나와 살폈지만, 대부분이 고개를 저었다.

온갖 진귀한 약은 다 지어다 입안으로 흘려주고 있으니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기도하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로아드네스가 대략적인 상황을 보고하러 간 사이, 나는 황태자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도저히 그 난리통인 황태자궁의 침실에 그를 누일 수 없어서, 응급처치만 받고 바르데날도는 근처 별궁에 옮겨져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바르데날도의 얼굴은 지난밤의 일들이 악몽인 듯 평온하고, 일견 천사 같기 까지 했다.

딸깍. 조심스레 침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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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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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에페로의 에스코트를 받고 들어오는 이는 그레이스 황후였다.

그녀는 금발의 나를 보곤 잠시 놀라는 기색이다가, 혹시라도 바르데날도가 깰까 소리 없이 걸어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에페로는 문가에 멈춰 서서 더 다가오지 않았다. 다소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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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서 상태는 들었는데, 황태자비는 어디를 가고 부인이 이곳을 지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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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전하께 곧장 소식을 알렸는데, 아직…….”

내가 곤란스레 말끝을 흐리자, 목소리를 낮추던 그레이스의 표정 역시 흐려졌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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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헉!”

마침 정신을 차린 황태자가 나를 보고 기함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레이스 황후가 황급히 그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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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정신이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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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가, 저 여자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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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보좌관인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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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니야 저 여자는 아드, 아드리엔……!”

바르데날도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바르작거렸다.

동시에 고통이 찾아왔는지 붕대로 몇 번이나 단단히 여며둔 가슴을 꾹 누르고 고통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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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엔, 아드리엔 피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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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스 황후가 잠시 몸을 물리고, 침묵하는 내게 고개를 저었다.

죽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공포에 떠는 광경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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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들여다봐도 좋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건데…… 아드님께서 아직 많이 안 좋으시군. 이해해줘요, 부인. 부인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해, 죽은 대공비와 헷갈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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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합니다.”

넋이 약간 나가 보이는 바르데날도는 대답을 끝낸 내가 시선을 미끄러뜨려 자신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벌벌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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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하의 보좌관이니, 황태자비 전하께서 드실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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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줄래요?”

저 꼴이 난 황태자와 더 오래 있는 게 영 꺼림칙했던지, 원래부터 황태자를 두려워하던 그레이스가 반색했다.

멀찍이 서서 우리를 지켜보던 에페로가 그레이스 황후를 다시 에스코트했다. 그러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었던지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방을 나갔다.

나는 침실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침대 맡에 두고 앉았다.

바르데날도는 도망갈 곳이 없음에도 내게서 멀어지려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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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유령…… 유령…… 유령이 분명해. 저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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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곧 증언을 하러 갈 거예요.”

흔들리던 붉은 머리카락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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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에비안 트로비카의 비밀을 알게 된 내가, 쿠로세다 남작 부인과 그의 비밀이 연관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에 황태자 전하께 보고하려 밤중에 침실을 찾았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게 신기한지 목소리가 나오는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바르데날도의 눈이 공포에서 의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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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궁의 지하실은 사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있는 줄도 모르던 공간이며 모두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그 공간의 존재를 알고 황태자를 저주하기 위해 제 저택에 숨겨둔 시신들을 비밀통로로 가져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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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소리가 하, 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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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남작 부인에 대한 시름이 깊으시니 한시가 급하다 여겨 황태자궁을 찾았다. 그리고 비밀을 아는 내가 황태자에게 발설할까 봐 불안해진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나를 쫓아왔고, 결국 진실을 알게 된 황태자는 물론 나까지 죽이려 했다.”

퍼석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던 게 뚝 멈추었다.

황태자는 더 이상 떨지 않고, 차분히 말하는 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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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드네스 2황자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죽을 뻔했다. 모든 게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짓이며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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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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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증언하면 어떨까요?”

얌전하던 황태자의 얼굴에 미묘한 동요가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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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게, 뭐지?”

내가 유령 혹은 악마일지라도 제 잘못이 드러나지만 않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은 눈이었다.

나는 솟구치는 경멸 때문에 일그러지려는 입꼬리를 겨우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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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원하는 것을 말했음에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이 내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 괴물에게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게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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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엔 피레타가 알면, 뒤로 넘어갈 만한 진실.”

괴물에게는 괴물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괴로움 따위 안중에도 없는 괴물에게 이만큼 명확한 요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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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있는 모든 것이 론타의 성자,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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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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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저런 소리가 안 나오게 하려면, 똑바로 말해.”

그리고 이만한 협박도 없을 테고.

폭로를 예고 받은 괴물의 표정은 꺼지기 직전 타오르는 촛불처럼 흔들리고, 이지러졌다.

흐트러진 옷차림새 아래, 목덜미부터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바르데날도의 얼굴은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에 분한 표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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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아드리엔 피레타.”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는, 나를 할퀴고 죽일 수 있도록 허락받은 악마처럼 길쭉하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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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정부가 될 운명인 줄도 모르고 죽어간 아드리엔 피레타.”

뺨을 올려붙이고 싶은 손을 꼭 쥐고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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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누운 채로 나를 오시하는 눈은 이제 지상에서도 지하에서처럼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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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비의 동의도 없이 계획했다 생각했느냐.”

다 죽어가는 악마는, 내가 선사한 지옥을 기어코 지옥으로 갚아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나하나 씹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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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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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알면 뒤로 넘어가기만 할까. 당장 네 아비, 피레타 공작을 찾아가 목을 조르고 싶을 텐데.”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건 바르데날도고, 죽었다 살아난 건 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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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듣겠습니까, 숙모님?”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이성의 어디 한 군데가 뚝, 끊어져 버리고. 숨 쉬는 게 버거워지는 건 어째서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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