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진짜 원수
조롱의 의미가 명백한 ‘숙모님’ 소리와 미소가 천사 같은 얼굴에 걸렸다.
그 얼굴을 할퀴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두 손을 꼭 붙들어야만 했다.
짧은 순간 심장의 통증이 도졌는지, 바르데날도가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제 와서, 흐, 헉. 뭘 숨길까.”
***
바르데날도는 제 미래에 가장 도움이 될 두 명의 황태자비 후보를 골랐다.
아드리엔 피레타. 론타가 왕국이었던 시절 수도였던 피레타 영지의 공녀인 아드리엔 피레타.
그리고 유서 깊은 대귀족이었던 카스타냐 공작의 딸 도리스 카스타냐.
바르데날도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도리스에 비해 황태자인 자신보다 로아드네스와 교류 중인 아드리엔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늘 불안함과 열등감에 시달리던 바르데날도를 향해 로아드네스가 더 뛰어나다며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도리스 카스타냐를 자신의 아내로 맞고, 아드리엔 피레타에게는 ‘황태자의 정부’라는 자리를 주기로 결정해버렸다.
그는 스스로 그 결정을 아드리엔에게 주는 벌이라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로아드네스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하던 여자를 제 정부로 두고 농락할 상상만 해도 기뻐 부스스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 피레타 공작을 불러들였을 때, 그는 곧장 이 관계에서의 갑과 을이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피레타 공작가는 아주 오랜 옛날 제국의 수도였다는 정통성을 가졌지만, 되려 그랬기에 수많은 가문들의 견제를 받았다.
엘라콘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요소도 한몫했다.
엘라콘을 무시하면서도 두려워하던 제국은 혹시라도 엘라콘과 우호 관계를 가진 피레타 영지의 사람이 득세 할까 봐 여러 방식으로 세력을 견제했다.
그러니 가진 명예에 비해 동부, 특히 피레타 공작가는 수도 중앙 사교계 진출은 물론, 주요 관직을 맡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번 바르데날도가 아드리엔 피레타를 황태자비 후보로 뽑았을 때, 피레타 공작은 뛸 듯이 기뻐했다.
바르데날도가 이변 없이 황위에 오르기 위해선 황태자비의 가문이 건재해야 한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레타 만큼은 아니지만 거대한 세력으로 견제 받던 서부 카스타냐 역시 중앙 요직 진출을 꿈꾸며 간택 전쟁에 끼어들었고, 결국 승자는 중앙에 조금 더 자리를 잡고 있던 카스타냐였다.
피레타 공작은 몹시 자존심 상해하며, 황태자의 부름에도 쉬이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동부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내가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 아드리엔 피레타입니다.”
황태자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피레타 공작은 일순 멍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바르데날도는 그 어떤 날보다 진중하고, 정결한 얼굴이었기에 공작은 론타의 성자라 불리는 황태자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황비 자리라도 제안할 요량이시라면, 거절합니다. 피레타의 딸이 그 어떤 문서화된 약속도 없이 혼기를 놓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게다가 카스타냐가 가만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에 오르시고 훗날 아드리엔을 맞이하신다 해도, 대외적으로 카스타냐 출신의 황후 아래에 있는 딸을 보기 힘듭니다.”
“트로비카 대공비 자리는 어떻습니까?”
제국에서는 황태자비 다음가는 혼처다. 문제아라 불리는 2황자 로아드네스나, 엘라콘에 볼모나 다름없이 떠넘겨진 9황자보다 훨씬 가치 있고 미래가 보이는 혼처.
“……사랑하는 여인을 숙모로 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아니지.”
바르데날도는 순한 눈을 접어 다정하게 웃었다.
“아드리엔 피레타는 훗날 내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
일순 움직임을 멈춘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의지를 보이는 황태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대외적 위치는 트로비카 대공비. 하나 실상은 내 여자가 되는 겁니다.”
바르데날도가 꿀보다 더 달콤히 속삭였다.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을 가진 두 명의 남자를…… 공작의 여식이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늘 견제 받는 황비 자리 보다, 당당한 대공비 자리가 공녀의 미래에도 낫지 않겠습니까?”
“그, 그게 어떻게…….”
“내가 공작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
“도리스 카스타냐와 내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바르데날도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마음속 깊숙이 감추려 했으나, 절대 감춰지지 않는 피레타 공작의 욕망이 그의 자색 눈동자에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네 아비는 그렇게 해서라도 중앙으로 오고 싶어 했지.”
“…….”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건 너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 널 살리기 위해 온갖 귀한 약을 구해다가 대공저로 보냈으니 감격하기까지 했지.”
기억이 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보내신 귀한 약이라며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드시라던 하녀들의 목소리.
유독 날카로웠던 애니의 목소리는 그녀가 카스타냐 공작의 사람이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 약으로 날 죽인 거야?”
“아, 늘 궁금했겠네. 네가 어찌 죽었는지.”
쿨럭. 쿨럭, 쿨럭.
황태자가 입에서 한차례 피를 쏟아냈다. 나는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원래는 좀 더 두고 볼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생각해보니 네가 더 말라비틀어져 아름다움을 잃은 채로 널 갖게 된다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 뭐야.”
쿨럭-.
잔기침과 함께 고장 난 문처럼 끽끽 대며 웃는 황태자는 어느새 지난밤의 악마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굳이 내가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기꺼이 나서줄 사람이 많은데 뭣 하러 직접 나설까.”
“…….”
“숙모님께서 건강해지면, 초대해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고 싶다.”
“숙모님께서 그토록 우아하고 아름다우시다던데 병이 야속하다.”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낸 바르데날도가 산뜻하게 웃었다.
“그 말 한마디면 눈알이 시뻘게질 만큼 화가 나서, 하루빨리 네가 죽기를 바라는 이가 있는데.”
바르데날도는 도리스를 자극했던 무수한 나날 중 하루를 떠올리는지 초점이 살짝 흐려졌다.
“네가 2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보냈던 진귀한 약 덕분이니 너무 그리 보진 마.”
“우리?”
“로아드네스 역시 그리 뒤통수를 맞고도 늘 전장에서 진귀한 약만 발견하면 네게 보냈지. 아직도 몰랐나? 숙부가 네게 늘 보냈던 온갖 귀한 약 중 대부분은 로아드네스가 보낸 거야.”
“말도 안 돼.”
“다른 귀족의 이름으로 숙부에게 선물했던가. 대공비가 아프다는 건 유명했으니 사람들은 늘 그런 식으로 숙부의 환심을 사려 했거든. 쿨럭! 웬만한 약은 다 내치던 숙부도 로아드네스가 구해온 약은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니 거부할 수 없었을 거야. 재밌더군. 나는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숙부에게 말하진 않았어. 어느 순간부터는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지. 널 살리고 싶었을 테니까.”
아, 로아드네스!
배신감에 치를 떨고.
실연에 절망하고.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전장으로 나돌던 와중에도 내게…….
“어때. 이제 네 진짜 원수가 누군지 알았나? 널 죽인 건 도리스고, 내가 널 원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 결혼을 시킨 건 네 아비야. 네 아비는 정말 멍청해. 욕심만 많고. 꼭 도리스 카스타냐를 보는 것 같더군.”
바르데날도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
대외적으로는 트로비카 대공비로. 뒤로는 황태자의 정부로.
딸을 이용해 두 남자를 치마폭에 둘러싸고 언젠가는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아들을 낳아 카스타냐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면서.
황태자비 후보에서 최종 제외되던 날, 나는 나만큼이나 아버지 또한 무심한 줄로만 알았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에게 청혼서를 받은 날. 나는 아버지가 내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걸 응원하는 줄로만 알았다.
‘다 알고도, 눈을 감았구나.’
머릿속이 멍해져 나는 잠시 침묵했다.
“네 몸에서 내 아이를 봐? 큭……. 쿨럭! 도리스가 언제 널 죽일까 기다리고 있던 나를 네 아비가 보았다면 그런 헛된 욕심은 부리지 않았을 텐데.”
잔기침이 심해진 바르데날도는 자연스럽게 내게 다른 손수건을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새로운 손수건을 건네주지 않았다.
피로 범벅이 된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친 황태자는 제게 반항하는 하찮은 짐승을 보듯 내게 갸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바보같이 속더군. 정말, 바보 같았어. 부녀가 쌍으로 아주 바보 같아서 나는 그동안 참 재밌었어. 큭. 쿨럭, 큭큭…….”
바르데날도의 악마성에 질려버린 나는 속이 후련해 보이는 바르데날도를 보자 사정없이 마음이 비틀렸다.
“……그게 다야?”
노에비안이나 황태자에게서 느꼈던 충격과는 다른 차원의 배신감이 등골을 휘저었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티고 섰다.
이 자리에서 내가 충격받고 쓰러지는 모습이 저 악마가 가장 원하는 모습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바르데날도는 한참 과거를 회상하며 킬킬거리다가 내가 꿋꿋하게 버티고 있자 웃음기를 서서히 지워냈다.
“그게 다냐고.”
“그래.”
여운이 남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저 새끼의 말을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의 말이 맞다면 그동안 의문스러웠던 부분들이 다소 해소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신께 맹세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네가 원하는 ‘진실’을 말했잖아. 쿨럭, 쿨럭! 흐헉, 헉. 그러니…… 이제 그 망할 증언을 하러 가. 그리고 웬만하면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
“……무슨 증언?”
“!”
“바보같이.”
발작 같은 기침이 시작되었다. 손수건이 없는 바르데날도의 창백한 손에 그대로 핏덩이가 울컥 쏟아졌다.
“바보같이 속아서 미주알고주알 잘 떠들었네. 고마워, 꽤 재밌었어.”
“이런, 미, 친…….”
“넌 곧 죽을 거야, 바르데날도.”
쿨럭! 쿨럭, 쿨럭!
“나도 너처럼, 세 치 혀 몇 번만 움직이면 눈알이 시뻘게져서 널 죽이고 싶어하는 이가 있거든.”
“기다려, 기다려! 어디가! 크윽…… 의사를 불러줘! 콜록, 콜록! 젠장! 피가…….”
속은 새카맣게 타버려 재만 남았지만,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악마의 앞에서 나는 딱 그만큼 사악하게 웃어주었다.
달칵-.
이대로 가지 말라며 미약한 비명을 질러대는 악마를 뒤로하고, 나는 침실 문을 닫았다.
차가운 침실 문이 내 등에 닿는 순간.
나는 저 멀리 복도 끄트머리에서 마치 싸움이라도 하러 오듯 시종들을 줄줄이 달고 걸어오는 또 다른 악마를 보았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하루 종일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도리스 카스타냐.
세 치 혀 몇 번만 움직이면 눈알이 시뻘게져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