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악마에게는 악마를
노우라 주세타는 도저히 자신의 상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시해될 뻔하고, 대외적으로 한배를 탔던 트로비카 대공은 기어코 극악의 범죄자만이 수감되는 루벨탑 지하에 처박혔다.
그러니 황태자비 도리스는, 이 황궁에서 가장 불안해하고 미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대의 보석점에서 파는 것과 내게 바치는 것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전하, 섭섭한 말씀을……! 전하의 것을 제일 처음, 가장 좋은 것으로 따로 선별해두는 것을 아시면서요.”
“내가 어찌 아나, 그대가 그것을 블리에에게 주는지 내게 주는지.”
노우라는 침묵했다. 애초에 블리에가 달고 나와 유행시켰던 것들을 비슷하게 만들어 파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더 빛나는 것, 더 값진 것으로 만들어 바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상전이니까.
노우라는 황태자의 소식을 듣고, 카스타냐 공작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던 도리스가 슬픔에 잠기기는커녕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치장에 신경 쓰는 양을 지켜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도리스는 늘 외양에 집착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장은 얼마나 블리에 아카시아와 비슷해지면서 그보다 더 고귀하고 번쩍이는 걸 몸에 갖다 붙이느냐였다.
노우라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황태자 전하를 보살피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 달려가 그의 곁을 지켰겠지 하며.
그런 도리스가 황태자 궁으로 향하고자 했던 건, 잠깐 안부를 여쭙고자 들렀던 아이린이 한 말 때문이었다.
“부녀자 실종 사건의 보고를 위해, 2황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오셨더라고요.”
그 말 한마디에 도리스가 이다지도 성화였다.
아이린이 나가자마자 부지런히 단장한 도리스는 황태자비궁의 시종들을 죄다 끌어모아 행차 준비를 했다.
노우라는 괜스레 불안함을 느끼며 한 발짝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도리스는 얼마 전에 다시 짙은 흑발로 염색한 머리를 한껏 틀어 올리곤 어깨를 드러내 번쩍이는 루비 장미 목걸이까지 한 상태였다.
뒤에서 보면 블리에 아카시아라 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남편의 비보에 졸도한 황태자비 연극을 하던 도리스가 이토록 힘을 내 꾸미고 나온 이유 말이다.
황태자의 최측근인 2황자가 분명 그의 곁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해 궁을 나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인이라 해서, 정부를 둘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상대는 남편의 동생이 아닌가? 그것도 동복동생.
심심풀이 애인으로 삼을 만한 위치도 아닌 사람을 저리 바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리스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조금 앞서 걷던 도리스가 황태자가 누워 있는 침실에 다다라서 우뚝 멈춰 서버렸다.
“……전하?”
딴생각 중인 것을 들켰나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는데, 도리스의 시선은 옆이 아닌 정면으로 향해 있었다.
갖은 생기를 불어넣었던 두 뺨이 창백해진 채 유령이라도 마주한 것 같이 질려 있었다.
“……아드리엔?”
뒤에서 따라오는 시종들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하지만 곁에 있던 노우라에게는 분명히 들리는 속삭임이었다.
아드리엔.
죽은 대공비의 이름을 혼잣말처럼 내뱉던 도리스의 두 뺨이 파르르 떨리자, 노우라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정면을 보았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
블리에 아카시아가 침실 문 앞에서 그들을 알아보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
블리에의 머리카락은 흑발이 아닌 금발이었다.
‘이번엔 수도에 금발 열풍이 불겠군.’
노우라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금발로 바꿔주는 염색약을 사들여야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볍게 생각한 노우라와는 달리, 도리스는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전하,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예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니 너도 아는 체를 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도리스는 되려 더 딱딱하게 굳어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은 얼굴로 블리에를 보았다.
잠깐이지만 완전히 넋이 빠져버린 얼굴이라 노우라는 이제야 제 남편의 변고를 실감했나 싶었다.
***
도리스가 반응할 때까지 기다렸던 아드리엔은 결국 복도를 반쯤 더 걸어와 드레스 자락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비 전하.”
공손하게 굽혔다 펴는 동작이 느리게 이어졌음에도 도리스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도리스가 입을 연 건,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인내하던 시종들이 뒤에서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블리에.”
“예, 전하. 황태자 전하를 뵈러 오셨나요?”
“못 본 새…… 머리가…….”
확인하듯 ‘블리에’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도리스는 말을 갓 배운 아이처럼 더듬거렸다.
“아, 이거요.”
아드리엔은 가장 찬란하던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떼어온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블리에의 맹하고 해맑은 미소와는 차원이 다른, 진심이 담뿍 담긴 미소였다.
마주하는 도리스의 얼굴은 유령을 마주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금발이 어울릴 것 같다 권하시더라고요.”
도리스의 시선은 꿀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을 따라 내려와 아드리엔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펜던트로 향했다.
잘 다듬어진 눈썹 한쪽이 비틀리듯 까딱였다.
도리스는 단번에 그 펜던트의 정체를 알아봤다.
황태자가 목에서 절대로 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가 봉변을 당했던 당일 밤, 제 손으로 직접 그의 옷을 찢어발겼을 때도, 희멀건한 그의 목에 반짝이던 것이었고.
“못 보던 목걸이도…….”
“아.”
아드리엔은 밖으로 나와 있는 목걸이를 곧장 품속에 감추고 곤란한 듯 웃었다.
그리고 그 곤란한 얼굴에 도리스의 눈이 삽시간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내가 실례한 건가요?”
“아!”
아드리엔의 화들짝 놀란 얼굴에 도리스의 얼굴이 더 처참해졌다.
“정표, 라도 되나 봐요?”
“……예,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지만요.”
“…….”
“아시잖아요, 제 애증의 상대가 누구인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여자의 얼굴이란 저런 것인가. 애증의 감정이 향하는 곳은 이미 실각해버린 대공이겠지만, 아마 2황자에게 받았거나 새로운 누군가가 고백이라도 했나 보지.
노우라는 아무 의심 없이, 블리에 아카시아의 새로운 스캔들 상대에 대해 생각하다가 더 차갑게 내려앉은 복도 공기에 흠칫했다.
자연스레, 노우라의 시선은 익숙한 소리를 향해 흘렀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도리스의 손끝이 바삐 움직이며 손톱 거스러미를 바득바득 긁어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의사를 찾으셔서…… 저는 이만 물러나려는데 괜찮으신가요?”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는 도리스의 눈이 느리게 한번 깜빡였다.
물러나도 좋다는 의미였다.
아드리엔은 묘한 미소와 함께 예를 갖추고 그녀를 지나쳤다.
“전하?”
“……내 남편을 직접 살펴야겠어.”
깊게 잠긴 목소리가 노우라는 물론 시종들을 복도 한가운데에 붙들어두었다.
황태자비 도리스가 직접 문을 열고,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침실로 혼자 들어갔다.
노우라는 어쩐지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
악마를 악마에게 들여보낸 내 얼굴은 도리스를 지나치자마자 단번에 무너졌다.
블리에로서 갖은 배신을 마주했을 때처럼, 나는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온통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인간에 대한 불신. 경멸. 혐오.
발을 딛고선 모든 게 거짓이며 저가 보고 싶은 대로 본 환상과 다름없지 않은가.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를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부녀 사이가 마냥 가깝지만은 않았다.
엄하긴 해도 내게 상처 주지는 않았던 아버지였는데.
어머니의 눈을 닮은 나를 속으로는 사랑하고 있었을 거라 착각하고 살았던 걸까.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피와 눈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가 된 듯, 나는 황궁의 구석진 곳을 정처 없이 걷다, 결국 ‘작은 숲’으로 발을 디뎠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가시가 돋친 덩굴이 터널 전체를 감싼 초록빛 공간에, 간간이 새어드는 하얀 달빛마저 거부한 채 가장 어두운 곳에 서 있는 로아드네스를 발견했다.
우뚝, 걸음을 멈춘 내 기척을 로아드네스는 단번에 알아채고 몸을 틀었다.
거울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또 무너지고 억지로 다시 세운 위태로운 고성 같은 사내가 어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 역시 저런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곧.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서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디뎠다.
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거리는, 서로가 가까워질수록 빨라지는 발걸음만큼 훅 가까워졌다.
“로ㅇ…….”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제 그림자 속에 나를 가둔 로아드네스가 그대로 내 허리와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입술을 삼켰다.
거칠고, 뜨거운 입술은 닿기 무섭게 보드라운 내 입술을 열어 입안 깊숙한 곳을 파헤쳤다.
숨이 모자라 헐떡일 만큼 열정적인 기세였다.
순식간에 입안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온 로아드네스의 숨결이 내 숨결과 마구잡이로 뒤섞이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드리엔…….”
찰나 떨어졌던 입술 새로, 낮은 음성이 내 입안으로 들이닥쳤다.
습하고, 뜨거운 숨이었다.
우뚝 솟은 코가, 자그마한 내 코에 몇 번이고 부딪히고 비벼졌다.
내 입안을 완전히 그에게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건 아주 잠깐이었다.
사실 입술이 맞붙자마자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절벽 위에라도 서 있는 것처럼 매달린 것은 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드리엔, 아드리엔…….”
상처받은 짐승처럼 앓는 소리가 내 입안을 뜨겁고 진득하게 후벼팠다.
뜨거운 것들이 맞닿으며 나는 소리가 내 등골 구석구석을 적셨다.
우리는 서로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것인 양 서로를 탐하고 매달렸다.
아무런 대화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뻔한 질문도.
우리는 하지 않았다.
달빛이 으스러지고, 별빛이 덩굴 사이를 찌르고.
주변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축축한 살덩이가 서로를 탐하는 질척이는 소리만 귓속을 가득 채우고.
숨이 차오르고, 차오르고, 또 차올라 헐떡이며 이제 그만하자고 애원 섞인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로아드네스는 어떻게든 내 안으로 들어오려 애쓰는 것처럼 나를 탐했다.
바짝 맞붙은 하체는, 그가 나를 들어 올릴 듯 더 깊게 당겨 안을 때마다 깜짝 놀랄 만큼 단단하고 뜨거웠다.
콰쾅-!
내내 축축하던 하늘에 천둥이 치고 굵은 비가 불시에 쏟아져 내렸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덩굴 사이사이를 지나 우리에게 직격으로 떨어졌다.
쏴아아아-.
귓전을 때리는 사나운 빗소리.
비를 마시는 것인지, 로아드네스의 숨결을 마시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을 쯤이었나.
빗소리가 잦아들고, 비 오기 전보다 더 밝아진 별빛마저 흐드러지는 시간이 되었을 때, 흐트러질 때로 흐트러진 우리가 결국 숨을 몰아쉬며 젖은 이마와 코를 맞붙였을 때.
로아드네스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게 속삭였다.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아드리엔.”
내 것임이 분명한 게 묻어 반짝이는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숨이 턱, 턱 막혔다.
빛이 튀어 오른 그의 눈처럼 저 아래에서 절절 끓어 넘치는 목소리였다.
“네게 더 가까이. 더 깊숙이 닿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굵직한 목을 죄 긁으며 나오는 거친 목소리로 하는 애원이 내 귓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미칠 것 같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가까이, 더 깊숙이 닿아서. 내가 밟고 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이 순간 그를 붙들고 싶은 건.
“로…….”
나는 다시, 그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노려보듯 내 입술을 응시하던 로아드네스가 다시 입술을 맞붙여왔기 때문이다.
처음과는 달리 시작은 부드러웠지만,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삼켜버릴 듯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초저녁의 무서운 소나기 이후, 새벽달이 뜨고 있는 시간이었다.
발밑에서 무너지던 내 안의 무언가를 겁낼 새도 없이, 나는 로아드네스가 하늘에서 내려준 유일한 동아줄인 것처럼 그에게 매달려 뜨거운 숨을 얽었다.
내 발아래, 잦아든 천둥소리와 함께 무엇이 무너져 내리든 지금은 상관없었다.
그날 밤.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짧았던 생을 마감했다.
황태자비 도리스가 병문안을 하러 갔던 직후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