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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11화 (111/171)

111화. 우리의 적                         ◖⚆ᴥ⚆◗

도리스 카스타냐는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침실에서 뜬눈으로 누워 있었다.

새벽부터 서부 귀족들은 물론 황태자파 귀족들의 알현 요청이 줄을 이었지만, 모조리 거절한 상태였다.

적막하고 화려한 공간.

도리스는 향을 피우듯 촛불 하나를 밝히고, 누군가 새벽에 가져다 놓은 제국 일보를 들여다보았다.

[론타의 성자, 바르데날도 황태자 전하 서거]

[또다시, 충격으로 졸도한 황태자비 전하]

신문 1면을 장식한 헤드라인을 읽어내리던 도리스는 결국 미약한 촛불 하나에 신문 한 면을 모조리 태웠다.

순식간에 누런 종이를 집어삼킨 작은 불길 사이로, 어제의 일들이 환영처럼 일렁거렸다.

***

“아드리엔, 아드리엔을 불러와! 아드리엔을……!”

“…….”

흠결 없는 하얀 대리석 같은 얼굴.

이질적인 붉은 피를 묻힌 황태자 바르데날도에게는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사악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도리스. 도리스, 아드리엔을 불러와! 너 말고! 아드리엔을!”

눈알이 시뻘게져서, 혹시라도 방금 나간 여자를 놓치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질 듯 구는 남편의 모습.

그 바르작거리는 몰골을 도리스는 한참 바라보았다.

“내 말 안 들리나? 유령이 아니지? 아드리엔 피레타가 맞지? 불러와! 내 눈앞에 데려와!”

커억-!

몸을 크게 떨던 바르데날도가 결국 굵은 핏덩이를 게워냈다. 정신없이 손수건을 찾는 손이 애처롭게 허공을 휘저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이는 없었다.

“죽은 사람을 왜 찾아?”

“안 죽었어! 젠장! 아드리엔 피레타가 안 죽었어! 쿨럭! 케헥!”

서늘하게 가라앉아있던 도리스의 눈썹은 바르데날도의 기침 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점점 비틀렸다.

“……안 죽었다고?”

“안 죽었어! 죽었는데! 되살아났다고 젠장! 유령이면, 유령이면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여자를 데려와!”

“미친놈.”

기침 소리와 함께 버무려진 개소리를 도리스는 마음껏 비웃었다.

“안 죽기는.”

“도리스, 도리스 이 멍청한 년!”

“네가 그날도 하도 그년을 찾길래. 내가 진즉 죽여버렸는데.”

“쿨럭! 쿨럭쿨럭!”

“어떻게 안 죽어. 어떻게 죽어갔는지, 저승으로 넘어가는 숨소리 하나마저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보고를 받았는데.”

“켁, 큭, 쿨럭!”

한 발짝. 또 한 발짝.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는 조화처럼 미소 짓던 도리스는 마침내 바르데날도가 제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하자 움직였다.

“‘아드리엔은 내 거야.’ 잠결에 그런 말을 들었던 날이었지.”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도리스는 살얼음이 낀 호수에 발을 내디딘 것처럼 부서질 듯 미소 지었다.

“율리어스 론타. 노에비안 론타. 바르데날도 론타…… 로아드네스 론타.”

도리스가 느릿하게 걸어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론타 황가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죽은 자의 망령을 쫓아 미쳐가네. 율리어스 론타는 레티나 황후를 잊지 못해 닮은 정부를 들이고. 대공에 너, 로아드네스까지.”

“로안…….”

로아드네스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황태자를 보며, 도리스는 옆에 있던 하얀 베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네깟 놈이 아드리엔 피레타를 좋아한다고 질투라도 할 줄 알았어?”

주름 하나 없던 베개를 길쭉한 손가락이 콰득, 쥐어짰다.

“너 같이 나약하고, 수준 미달인 놈은 황태자가 될, 이 도리스 카스타냐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이……!”

“애초에 난, 네가 아닌 로아드네스가 좋았다고 얼간아.”

도리스의 가느다란 팔이 앞으로 뻗어지고, 몸을 접듯이 일어나 앉아 피를 토하던 바르데날도의 몸이 그녀의 손에 의해 뒤로 추락했다.

미약과 술을 먹고 그를 덮치던 날의 밤처럼, 도리스가 단번에 바르데날도의 몸 위에 올라앉았다.

꽁꽁 감아둔 붕대의 상처가 터졌는지, 어느새 가슴이며 입에 피가 솟아올랐다.

도리스는 그게 꼭, 블리에 아카시아가 달고 다니던 루비 장미 같다고 생각했다.

“죽어줘, 바르데날도.”

“안……컥……안, 돼……!”

“네가 죽으면 로아드네스가 황제가 될 거야.”

죽으라는 말보다. 로아드네스가 황제가 될 거란 말에 바르데날도가 반응해 눈을 키웠다.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일그러지던 얼굴은 잠시였다.

도리스는 쥐고 있던 하얀 베개로 바르데날도의 얼굴을 덮고 꾸욱 눌렀다.

“커억-. 컥. 컥!”

거대한 욕조에, 더러운 불순물이 한 대 뭉쳐 물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 소리가 사람의 입에서 들렸다.

“너는 숙부의 손에 죽은 비운의 황태자로…….”

“커어어어-억-.”

“나는 새로운 황태자가 될 로아드네스의…… 불쌍한 형님을 대신한 그의 유일한 비로.”

“꺼억, 꺽!!”

“역사는, 우리를 그렇게 정반대로 기록할 거야.”

핏덩이와 숨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가라앉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리고 거칠게 바르작거리며 피를 내보내던 몸이 점점 침대 밑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콰쾅-!

오후 내내 흐리던 하늘이 초저녁 달빛 대신 굵은 빗줄기와 천둥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

졸도한 황태자비 대신, 황후 그레이스와 로아드네스가 장례식을 담당했다.

수도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귀족들이 간밤의 비보를 듣자마자 밤새 황궁으로 달려와 황태자궁 앞에 꾸며진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황태자의 장례식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박하고 조용했다.

아주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시신은 유리관에 안치되지도 않았으며 장례는 오늘 하루로 끝낸다는 공표가 있었다.

바르데날도가 황태자임을 참작하면, 아주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본디 직계 황족과 그 배우자들은 100일간의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그 직계 황족이란 황위 경쟁에서 승리한 황족들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패배한 황족들은 100일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것을 ‘특권’이라 불렀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골육상잔의 희생양들은 그런 장례를 치룰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돌아온 영광스러운 시신과 한평생 고귀하게 살다가 죽은 시신 등을 내보이는 건 론타 황족들의 자부심이 담긴 행위였다.

그러니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시신은 꺼내둘 수 없는, 따지고 보면 비참한 장례였다.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가는 길의 명예를 지켜주라 했던 아들이지만,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후계의 얼굴을 100일 동안 드러낼 순 없었던지 황제 율리어스는 황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역시 아비보다 먼저 간 아들의 시신을 계속 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는 고요히 멈춰 있는 로아드네스를 응시했다.

그는 황제 부부와 함께 거대한 황태자의 관 앞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억지로 웃어주려다 실패한 그의 눈을 나는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지독한 소나기 속에서 입을 맞추고,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탐하던 우리는 황태자궁 쪽에서 들리는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사실, 그 비명을 듣고 로아드네스를 찾아온 닐이 비보를 전하고 나서야 우리는 몸을 떨어뜨렸다.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두 뺨을 적시고, 로아드네스는 곧장 제 망토로 젖은 내 몸을 감싸 여며주고 터널을 벗어났다.

멀찍이 서 있었지만, 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던 우리를 본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새벽의 기억에서 벗어나 다시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절절 끓던 욕망을 잠시 누르고, 야성을 숨긴 눈은 깊게 침잠해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잠시 식장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하룻밤 새 핼쑥해진 도리스가 그제야 노우라의 부축을 받아 등장했다.

사람들은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거나 눈길을 바닥에 처박았다.

쓰러지기 직전인 것처럼 보이던 도리스는 황태자의 관 앞으로 도달하기도 전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

귓전의 솜털이 바짝 설 만큼 위협적인 빛이 도리스의 녹안을 스쳤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일이라 나는 순간이지만 착각인가 싶기도 했다.

대신관의 기도 소리와 묵념을 위한 오르간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도리스는 황제 부부에게 하나 마나 한 예를 차리고는 로아드네스의 곁에서 보란 듯 눈물을 떨궜다.

“어제부터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

주신을 찬양하는 찬송가가 크게 울려 퍼질 무렵, 빅토르와 함께 내 곁에 있던 에페로가 내게만 들릴 만큼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는 당신의 적이었나요?”

“……아니요.”

나는 바르데날도의 관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우리’의 적이었죠.”

“…….”

“어때요. 이젠 저와 친구가 될 마음이 드셨나요?”

노래 하나가 끝나자 또 다른 노래 하나가 시작되었다. 힐끔 옆을 보니 에페로는 무슨 말을 꺼낼까 말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의 친구가 된다면 나는 뭘 얻죠?”

“뭘 얻으시려고요?”

나는 누가 볼까 봐 입꼬리를 부러 더 내리며 코웃음 쳤다.

“함께 뭘 얻어야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진정한 친구는…….”

나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도리스를 응시하며 마저 답했다.

“……함께 적을 없애는 친구가 아닐까요?”

에페로는 잠시 내 말의 의미를 더듬어보는 듯하다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레이스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이미 6명의 황자를 이런 장례식을 치르며 보낸 전적이 있으니 그로서는 걱정이 되겠지.

나는 위로하듯, 동시에 옭아매듯 그의 팔을 한번 꾸욱 잡았다가 놓았다.

화들짝 놀란 에페로는 멍하니 잡혔던 팔을 응시하다 결심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응시했다. 에페로가 내게 더 바짝 붙어 뒤에서 속삭였다

“당신의 적이 되면 다음 장례식 주인공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알겠네요.”

황태자임에도 유리관에조차 안치되지 못한 채 급히 장례를 치르는 바르데날도를 겨냥한 말이었다.

어제 봤을 때부터 에페로는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얼이 빠져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바르데날도가 없다면, 그가 그토록 원하던 ‘론타에 계속 남는’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에페로를 보며 나는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보였다.

에페로는 론타에 남게 해주겠다던 내 말을 떠올린 듯, 제 형님의 장례식에서 희망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

해가 지기 전에 결국 두통을 호소하며 사라진 황제를 시작으로 멀리 떨어져 살던 황족들까지 별궁으로 향하자 예의상 남아 있던 인원마저 전부 돌아갔다.

무수히 많은 눈길이 고요히 황태자의 관을 응시하는 로아드네스를 살피다가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는 훗날 바뀔 후계 구도에 대한 논의를 하러 바삐 사라졌고, 누군가는 황태자를 둘러싼 갖가지 음모론에 대해 입방아를 찧고 싶어 티파티 초대 명단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드리엔도 에페로 일행을 데리고 조용히 식장을 벗어났다.

줄곧 관뚜껑을 향했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식장을 나가는 아드리엔의 뒷모습을 쫓다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곁에 남았던 부관들에게로 향했다.

빈센토와 닐이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

눈치를 보던 시종들과 밤새 황태자 바르데날도를 위한 기도를 이어갈 신관들도 잠시 식장을 벗어났다.

부관들은 로아드네스를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해야 하는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한 발짝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빈센토.”

“예, 전하.”

장례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빈센토 앞에 툭 떨어졌다.

로아드네스의 시선은 여전히 관 위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어쩔 거지.”

“……예?”

대답은 빈센토 대신 닐에게서 기어 나왔다.

자신들을 부려야할 로아드네스가 갑자기 어쩔 거냐는 말을 하자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형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너는 내 곁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광증이 도지셨나.

닐은 눈썹을 쑥 들어 올리고는 동복형제의 죽음을 마주한 주군을 향해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골랐다. 처음엔 그저 화풀이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빈센토?”

자신이 불러도 대답이 없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한 발짝 내디뎠던 상태 그대로 굳어 있는 빈센토를 보기 전까지는.

“네가 형님의 눈과 귀였던 것을 안다.”

닐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말을 하면서, 로아드네스는 여전히 그들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진짜 주인이 죽었으니, 이제 네 거취는 네가 알아서 해라.”

털썩.

빈센토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드디어 관에서 식장 입구로 옮겨갔다. 여전히 시야에 그들은 없었다.

“전하, 전하 그것이…… 언제, 언제부터…….”

닐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기가 눌려 입만 벙긋거렸다.

“……처음부터.”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묻는 빈센토를 향해, 이미 성큼성큼 몇 걸음이나 앞서버린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네가 자원해서 내 부관으로 지원했을 때부터.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나.”

멀어지는 로아드네스의 등은 언제나처럼 강건하고 널찍했지만,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다.

닐은 주군을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망연자실한 얼굴의 빈센토를 살폈다.

그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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