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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12화 (112/171)

112화. 나를 가지면 돼

“빈센토, 이게 무슨 말이야? 진짜 주인이라니?”

주인의 갑작스러운 결별 선언에 닐이 물었다.

눈물과는 거리가 멀고 늘 이성적이던 빈센토의 눈물에 닐은 크게 당황한 참이었다.

“빈센토 윈스터!”

빈센토 윈스터.

그는 죽은 바르데날도의 놀이 친구였으며, 아내 상속법 이후 후작위를 얻은 카뉼라 윈스터의 손자 즉, 황태자 형제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죽은 레티나 황후를 대신해 손자를 지키길 원했던 윈스터 후작.

그 후작의 의지를 이어 그가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사람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너는 개황…… 아니, 2황자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모셨잖아. 나는 네가 그 어떤 부관들보다 전하께 충성스러웠다고 생각하는데. 네 진짜 주인이라니! 네가 황태자 전하의 끄나풀이었다는 말이야?”

어안이 벙벙해 질문을 쏟아내는 닐에게, 빈센토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끄나풀이 맞았다.

황태자의 명으로 로아드네스를 감시했던 첩자.

‘빈센토, 내 오랜 친구여. 붉은 눈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다는 전설은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가서 내 동생이 늘 올바른 길만 갈 수 있게 지켜봐줘.’

빈센토는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그 괴담을 ‘전설’이라 부르는 입을 보았다.

흠결 없는 레티나 황후의 보물. 론타의 성자. 윈스터 후작가의 희망.

생때같은 자식을 줄줄이 잃고, 남은 건 레티나 황후의 아들들과 자신뿐인 할머니, 카뉼라 윈스터는 손자들을 끔찍이 아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어미를 여의고 자신이 함께 있어 줄 수조차 없는 외손자들을 가장 아꼈는데, 성자라 불리며 선행을 베푸는 황태자 바르데날도는 대신전에 매년 억대의 기부금을 내는 독실한 신자인 카뉼라가 가장 사랑하는 손자이기도 했다.

빈센토는 그간 황태자를 곁에서 지켜봐 오며 늘 뭔가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지만, 차마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었다.

외부에다가 말하기엔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고. 윈스터 후작에게 말하기엔 그녀가 너무 노쇠하여 작은 충격에도 졸도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대답해봐. 이대로 전하를 등지고 살겠단 말이야? 빈센토, 이대로 전하를 저리 보내드릴 거냐고?”

“……아니.”

늘 안개 낀 환상 같던 바르데날도의 실체가 처음으로 명징해진 참이었다.

그는 로아드네스의 명으로 황태자궁의 지하를 조사하면서, 자신이 어릴 적 생각했던 것보다 바르데날도가 훨씬 많이 비틀려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이미 내 주인은 황태자 전하가 아니다.”

비단 오늘 로아드네스로부터 결별 선언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의지로 로아드네스의 부관이 되었지만, 그는 로아드네스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바르데날도와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왔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늘 툴툴거리는 닐마저 로아드네스가 전장을 굴렀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래도 개황자 전하가 고생은 참 많이 하셨다’며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늘 문제를 해결하는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이미지를 위해. 로아드네스는 철저하게 자신을 그 반대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실상 늘 문제를 해결해오고 이 나라를 지켜온 건 로아드네스였다.

“내 주인은 2황자 전하시다. 황태자 전하께서 살아계셨다 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아.”

“설명, 설명을 좀 해. 빈센토.”

“전하께 제대로 설명하고 벌은 달게 받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입 밖으로 제 생각을 꺼내자 마음은 더 굳혀졌다.

자신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로아드네스를 자신의 주군으로 정했다.

죽은 바르데날도에 대한 이야기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도 이제는 할 때가 왔다.

빈센토는 그리 생각하며 설명을 요구하는 닐을 등지고 달렸다.

***

식장을 나온 에페로와 빅토르는 황후궁으로, 나는 로아드네스 궁의 집무실로 향했다.

장례 이후의 절차도 신경 써야 했고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아드네스에게 떠넘겨진 일들이 많았다. 오기 싫어도 장례가 끝나고 집무실에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무실 소파에 몸을 묻은 나는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간밤에 그와 입 맞췄던 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등골이 저릿한 기분이 일었다.

사내와 입을 처음 맞춰보는 것도 아닌데.

모든 게 처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각, 또각또각.

괜스레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을 매만져보는데,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게 로아드네스의 소리가 아니라는 직감에 소파 뒤에 있는 거대한 캐비닛으로 가 몸을 숨겼다.

굳이 숨을 이유는 없었지만.

벌컥!

캐비닛 환풍구 사이로,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없네.”

도리스였다.

***

방금까지 로아드네스의 곁에서 보란 듯이 눈물을 떨구던 여자는 없었다.

나는 환풍구 구멍 사이로 스미는 짙은 향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부스럭거리며 입고 온 망토를 벗은 도리스는 새하얀, 마치 신부의 웨딩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벌컥.

다시금 집무실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건 방의 주인인 로아드네스였다.

로아드네스는 뜻밖의 손님에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나는 아까부터 입이 벌어질 만큼 놀란 상태였는데, 그는 도리스를 보고도 생각보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탁-.

별다른 말없이 문을 닫아버린 로아드네스가 망설임 없이 도리스의 앞에 섰다.

붉게 덧칠한 도리스의 입술이 곧장 호선을 그렸다.

“로안.”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도리스는 그가 축객령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쁜 기색이었다.

도리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새카만 로아드네스의 정복 단추를 풀었다. 남편의 장례를 위한 상복이었음에도 손길은 거침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로아드네스는 그런 그녀의 손길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그 어떤 대꾸도 저항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편의 장례식에 새 신부 같은 차림새로 그 동생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자라, 도리스의 손길은 꽤 노골적이었다.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로안, 당신밖에 없어요.”

로아드네스의 턱이 서서히 올라갔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도리스가 하는 양을 쳐다보는 얼굴은 일견 그녀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툭. 툭. 툭.

“지난번의 무례는 용서해줄게. 그러니…….”

바빠지는 손길만큼, 무수히 많은 단추가 끌러졌다. 새카만 상복 아래 칼처럼 각을 세우고 잘 다려진 새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내 남자가 돼.”

진득한 손길은 이제 셔츠로 이어졌다. 양각으로 황실의 문양이 수놓아진 금장 단추가 단단히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너를 황제로 만들어줄게. 로안.”

나는 그제야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아드네스의 가라앉은 눈과 묘하게 관능적인 시선이 내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빗속을 헤치고 탐했던 입술이 서서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자 도리스의 얼굴에는 기쁨이, 반대로 내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도리스의 손길은 더 대담해졌다.

셔츠 사이로 언뜻 드러난 로아드네스의 몸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 어린 신음을 삼키더니 못된 손이 복부를 지나 단단히 잠긴 혁대 버클로 향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똑똑!

다급하고 강한 손길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황홀경에 빠져 있던 도리스의 얼굴이 금세 왈칵 일그러졌다.

똑똑똑똑!!

“전하! 빈센토 윈스터입니다!”

“물려.”

도리스가 명령하듯 잇새를 짓씹으며 말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피식 웃었다. 도리스의 눈길이 날큼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홀린 듯 따라붙었다.

“전하!”

“물려!”

로아드네스가 그제야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몸을 움직였다. 그는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도리스가 죄 풀어헤쳐 놓았던 단추를 느릿하게 잠갔다.

“로안!”

“영 재미가 없어서. 나가는 건 당신이었으면 합니다만.”

도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곤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 줄을 잘 서야 해, 로안. 내 아버지가 에페로와 나를 엮게 되면 네가 이 황궁에, 론타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로아드네스는 그대로 등을 보이고 입구로 걸어갔다. 도리스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고는 벗어둔 망토를 뒤집어쓰는 게 보였다.

“누구의 피도 보지 않고 황제가 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내 옆자리뿐이라는 걸 기억해!”

로아드네스가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자, 도리스가 빠르게 집무실을 벗어났다.

와중에 신경질적으로 로아드네스의 몸을 툭! 치고 나가버렸지만, 그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린 사람은 빈센토였다.

빈센토의 목소리와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교차로 오갔다. 나는 그제야 막았던 호흡을 다시 몰아쉬며 조심스레 캐비닛 문을 열었다.

기가 죄 빨려버린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도리스의 제안이 로아드네스에게 둘도 없는 기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일까.

누구라도 흔들릴 만한 제안을 받은 로아드네스의 마음이 어떨지 가늠하느라 내 속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탁.

다음에 다시 오라는 로아드네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집무실 문이 닫히자, 나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안고 달려 로아드네스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로아드네스가 문을 닫은 상태 그대로 굳었다.

“……로안.”

나는 형편없이 떨리려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바르데날도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망설임 없이 황제가 되게 해 준다는 도리스의 자신감이 부러운 동시에 날 불안하게 했다.

그는 내가 숨어 있었다는 것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아까와는 180도 다른 퍽 나른한 얼굴로 뒤돌아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곧 소파에 앉혀진 나는 내 앞에 눈높이를 맞추고 쪼그려 앉은 로아드네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눈썹을 까딱 올리며 잡힌 손으로 시선을 내린 로아드네스가 귀여운 동물의 재롱이라도 보듯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마저, 어딘가 모르게 훌쩍 커버린 어른 같은 기분이 들어 멀게만 느껴졌다.

“도리스가…….”

“난 너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아 아드리엔.”

언제나 그랬듯이.

로아드네스는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부터 내놓았다.

한 쪽 무릎을 꿇은 그가 제 무릎 위에 내 발을 얹었다. 캐비닛을 빠져나오면서 신발이 죄다 벗겨졌는지 나는 어느새 맨발이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나는 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 서로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나를 못 믿는 건가?”

나는 입을 일자로 꾸욱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내가 괜히 불안해서 그래…… 도리스가…….”

“질투했어?”

단순한 질투는 아니었다.

내가 지쳐 있는 것만큼 로아드네스 역시 지쳐서 편한 길을 가고 싶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싫다 할 자격이 있나. 그런 바보 같은 잡생각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었다.

새롭게 타오른 배신감과 함께 다시 생채기가 난 마음이 아직 아물지 않았기에 내 마음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그 반대였나 보다.

“난 널 불안하게 만들 마음이 없는데, 네가 그렇게 불안하다면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

“쉬운 방법을 두고, 너는 늘 돌아가려 하는 게 문제야.”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림이 없었고,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신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떨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위태로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네가 불안할 만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네 불안함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있어.”

“……뭔데?”

단지 그 방법이 무엇이냐 물었을 뿐인데,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조금 엄해졌다.

“네가 나를 가지면 돼.”

“!”

단호하고 묵직한 음성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무릎에 얹힌 맨발을 뒤로 물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지만 그가 가볍게 내 발목을 틀어쥐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바로 여기서라도 좋아.”

꾸욱 쥐고 있는 손의 뜨거운 체온이 내 발목으로 눅진하게 옮겨붙었다.

나는 덫에 걸린 작은 짐승처럼 파드득 떨며 순식간에 그가 내게 보내는 폭력적일 만큼 강렬한 욕망을 마주했다.

“나를 가져, 아드리엔.”

로아드네스의 고개가 지난 새벽 내 얼굴 가까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로 살짝 기울었다.

깨끗한 백금발이 잘생긴 이마에 가닥가닥 흩어졌다. 모든 게 그림 같았다.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장면의 끝에서, 그의 입술이 내 차가운 발등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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