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13화 (113/171)

113화. 너를 갖고 싶어

뜨거운 피부가 차게 식은 발에 닿자 움찔했다. 하지만 벗어날 순 없었다.

움찔하자마자 더 감겨드는,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덫이나 다름없이 날 옭아맸다.

내게 자신을 가지라 해놓고는.

로아드네스는 되려 자신이 영역표시를 하듯, 혹은 낙인을 찍듯 도드라진 정강이뼈까지 입술을 지분거렸다.

“로, 로안!”

너무 위험해지는 분위기에 내가 황급히 불렀지만 로아드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프지 않게 내 종아리 안쪽 살을 씹어 물며 말했다.

“……나, 너무 비겁한가?”

자조적인 미소를 담은 입술은 눈 깜짝할 새 무릎 안쪽까지 침범했다.

눈앞이 잠시 빙글 돌 만큼 아찔했다.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적안이 내 목구멍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갓 목을 벤 짐승의 피 같기도, 오랜 시간 불 속에 있던 숯의 한순간을 베어낸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목이 바짝 타는 느낌에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로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내 안의 어딘가가 거세게 흔들리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무언가에 매료된다는 감정이란 이런 걸까.

그의 앞에선 늘 긴장되고 떨렸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옷의 단추를 다 풀어헤쳤던 도리스 앞에서의 로아드네스보다, 단추를 모조리 잠근 채 내게 몰입한 그의 눈빛이 수천, 수만 배는 더 관능적이었다.

내 맨살에 파묻은 입에서 나온 숨결이, 그가 말할 때마다 내 무릎을 지나 허벅지 안쪽 피부를 자극했다.

나는 등골을 휘젓는 짜릿함에 잠시 몸을 떨었다가 그의 침범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반짝이는 백금발을 두 손으로 그러쥐고 버텼다.

하지만 그에 인상을 찌푸리는 로아드네스는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자극받은 표정이었다.

“너무, 너무…… 일단은…….”

“……일단은?”

느리게 답한 그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이번엔 살짝 말려 올라간 드레스 자락으로 향했다.

관능적인 입술로 느릿하게 드레스자락을 문 로아드네스의 눈은 여전히 날 응시하고 있었다.

눈으로 온몸을 옭아매듯이. 먹기 직전의 사냥감을 놀래지 않기 위해 살살 몰 듯이.

“로안…….”

이상한 감정이 내 몸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조금 더 그와 가까워지고. 그의 말대로 그가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하는 기묘한 소유욕이 그가 입술이 닿았던 피부 표면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딘지 정확히 지칭할 수 없는 몸 어딘가가 긴장과 흥분으로 바르르 떨렸다.

바짝바짝 메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자, 쏘아보듯 응시하던 붉은 시선이 곧장 그리로 옮겨갔다.

타오르는 것 같던 눈이 단번에 짙게 가라앉는 게 보였다.

“너를…… 너를…….”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을 동아줄처럼 움켜쥐었던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의 떨림이 그의 머리통에 분명히 느껴졌을 것이다.

“너를 갖고 싶어, 로안.”

나는 밤새 얽었던 그의 숨결을 떠올렸다. 달콤하고, 축축하고, 뜨거운.

빗속에서 오로지 내게만 몰입해 이성과 비이성을 넘나들던 강한 힘도.

“너를 가지려면, 어떻…… 어떻게 해야 해?”

달린 것도 아닌데. 나는 숨이 가빠져 말을 골라야 했다.

그 역시 지난밤의 감각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단단한 손이 붙들고 있던 다리를 지그시 문지르고. 여전히 드레스 자락을 물고 있던 입술 끝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면.

곧 로아드네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바닥에 짙게 깔렸다.

깊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쁜 별들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여러 가지 색으로 바뀌는 과정을 나는 바로 눈앞에서 마주했다.

그는 대답 대신,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진입을 막았던 내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그러쥐며 떼어냈다.

방금까지 드레스 끝자락을 말아 물었던 도톰한 입술이 곧장 정복하지 못했던 곳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상복 드레스 아래.

허벅지 안쪽 여린 살까지 숨결이 흩어지자,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천장이 높은 곳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이 눈을 찌르고, 시선을 어지럽혔다.

이성이 날아가 버리기 직전, 나는 그의 한 손에 간단히 잡혀버린 두 팔목을 비틀어 뺐다.

맛있는 음식을 발견한 맹수처럼 여린 살을 탐미하는 그의 머리통을 다시 꾸욱 눌러 제지하자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매료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드리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애원의 빛이 담겨 있었다.

“여기, 네 집무실이잖아…….”

어쩔 줄 몰라 드레스 자락만 꽉 붙잡고 있던 손을 로아드네스가 붙들어 제 쪽으로 끌고 왔다.

곧이어 뜨거운 입술이 듣기 싫다는 듯 내 입을 콱 막아버리며 곧장 파고들었다.

로아드네스의 숨이 마음껏 내 속에서 유영했다.

자연스레 뒤통수와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에, 나는 막아내듯 그의 가슴을 짚은 손을 천천히 그의 어깨로 쓸어올렸다.

화난 짐승처럼 그르렁대는 소리가 그의 단전을 지나 내 입까지 옮겨왔을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입술을 살짝 뗐다.

곧장 다시 따라붙으려는 입술이 물기를 머금고 숨을 뱉어냈지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여기선…… 싫어.”

“아드리엔, 제발…….”

끙끙 앓는 것 같은 목소리가 코앞에서 흩어졌다.

하지만 과도한 흥분으로 터지기 직전인 내 머릿속은 아이러니하게도 필사적으로 이성을 그러잡기 위해 애썼다.

“처음이란 말이야, 너무 밝고. 무섭고. 여긴 침실이 아니잖아.”

“……처음?”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쉴 새 없이 끌어당기던 힘이 뚝 멈추었다.

새빨간 유혹의 결정체처럼 번쩍이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는, 너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이런 게 익숙하지 않아서…….”

“너 결혼…….”

했잖아. 라는 뒷말을 삼키는 게 뻔히 보였다.

나는 활활 불타려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멍하니 있는 로아드네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결혼했어도, 안 했어. 결혼하고 몸이 더 심하게 아팠었고…….”

황태자의 정부로 나를 밀어 넣으려 했던 노에비안은 날 건들지 않았으니까. 라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로아드네스도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어쨌든 내가 처음이라 이런 게 익숙하지 않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심장이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강하고, 빠르게 뛰었다.

맞붙은 로아드네스의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쉴 새 없이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그의 목에 매달려 품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더는 묻지 마. 아무튼. 나는 지금 당장 여기서는…… 싫어.”

“…….”

그가 대답이 없으니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빼꼼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로아드네스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드리엔.”

“응.”

곧바로, 그가 나를 안은 채 일어났다.

나는 꼼짝없이 그의 목에 매달린 채, 덜렁거리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감을 수밖에 없었다.

씨근덕거리는 그의 가슴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로아드네스는 벌떡 일어난 채 빙글빙글 돌았다.

“……로안?”

아니, 빙글빙글 돈다기보단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집무실 안을 목적 없이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내가 어지러워하자, 로아드네스가 금세 나를 창틀에 앉혀놓고는 나를 가두듯 창틀에 제 팔을 지탱하고 그대로 짧게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날 삼켜버릴 것 같던 관능적인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그대로 받아 반짝이는 미청년이 경이로운 작품을 보듯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비겁하고 속 좁은 놈인 줄은 몰랐는데.”

“로안?”

“내가 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기뻐.”

그리고 나는 그의 품에 와락 끌어안겼다.

내 귀에 들리는 심장 소리는 이제 내 것이 아니라 그의 심장 소리인 것 같았다.

“때때로 치솟는 질투심에 미치긴 했겠지만. 네가 아무리 방탕하게 살았어도 나는 사실 그런 거 상관없어. 이대로 내 곁을 떠나지만 않고 가만히 있어 준다면 심장을 꺼내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로안!”

“그런데 막상 네게 가장 깊숙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라고 하니까 이 궁이 다 울릴 만큼 크게 웃고 싶어. 세상을 다 가진다 해도 지금 내 기분 같진 못할 거야.”

눈가를 붉힌 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에게서 첫사랑을 이룬 소년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진정해, 로안.”

“어떻게 진정을 해.”

로아드네스가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딱히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리고 네가 내 가장 깊숙한 곳에 닿는다느니 그런 생각은…….”

너무 극적인 반응에 진정을 시키려 한 말인데.

로아드네스가 품에서 살짝 나를 떨어뜨리더니 순식간에 얼빠진 얼굴을 지우고 섬광처럼 눈을 번뜩였다.

“숫총각 가슴에 불을 질러놓고, 이젠 재도 남기지 않을 만큼 새카맣게 불태울 셈이야?”

“아니, 그게…….”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놈인 줄.”

웃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에 아지랑이처럼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역시 그림 같아서 나는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책임져.”

그리고 다시, 숨이 턱 막힐 만큼 세게 끌어안겼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토록 서로 닿지 못해 안달하는 상황에 배덕감 비스무리한 감정이 솟아오를 때쯤이었나.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가 간지러운 공기를 파삭 깨트렸다.

검은 드레스로 꽁꽁 싸맨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려던 동작이 멈추었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똑똑-.

무시하고 다시 움직이던 얼굴이 멈추자 이제는 내가 창틀에서 내려와 재빨리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누구냐.”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던 로아드네스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형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언뜻 상기된 에페로의 목소리였다.

로아드네스 앞에서만은 순한 양의 행세를 하는 에페로였기에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진득한 미련이 남는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내 정수리에 머리를 기댔다. 솟구치는 감정을 꾹 눌러두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위로하듯 그의 손을 툭툭 두드려 주고는, 아직도 축축히 젖은 그의 입술을 손끝으로 훔쳐주었다.

로아드네스는 놓치지 않고 그 손을 그대로 잡아채곤 제 입술을 보란 듯이 꾹 문질렀다.

벌컥-.

인내심이 길지 않은 에페로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내 손끝에 입 맞추는 로아드네스를 발견하고 입이 떡 벌어졌던 에페로가 재빨리 빅토르의 눈을 손으로 턱 막았다.

“뭐 하는? 놔라.”

에페로의 손이 내려감과 동시에 나도 내 손을 로아드네스의 입술에서 물렸다.

로아드네스가 아쉬움이 진득하니 남은 시선을 에페로에게 돌렸다.

“무슨 일이지? 들어오라는 허락도 없었는데.”

“죄송해요, 형님. 하지만 이 녀석이 급히 부인을 만나 할 얘기가 있다 해서요.”

에페로가 재빨리 빅토르의 등을 떠밀며 변명했다.

“찾았다. 약 이름.”

뜨거운 수증기가 낀 것 같던 머릿속이 환기라도 시킨 듯 맑아졌다.

나는 민망해했던 표정을 지우고 그들을 소파로 안내했다.

팔짱을 끼고선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제 집무실을 내 것처럼 사용하는 나와, 어쨌든 그의 영역에 들어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제 동생에게로 옮겨갔다.

“고생 좀 했다. 찾느라.”

그리고 내게 칭찬받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빅토르의 뒤통수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