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나를 가져줘
손님들은 그를 등지고 앉아 있었고, 나는 로아드네스를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기에 그 시선은 오로지 나만 볼 수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이 불청객들이 진심으로 짜증나는 듯 보였다.
“알아봤다. 시켜서. 엘라콘 사람에게.”
“잘 되었군요. 정말 감사해요, 귀찮은 일일 텐데.”
“아니다. 별것.”
나 역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빅토르가 블리에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약에 대해 알아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았다.
금세 내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로아드네스가 아주 원망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번엔 나를 빤히 보고 서 있었다.
“전하께서도 이리 오셔서 함께 들으세요.”
“그러시죠, 형님.”
에페로가 곧장 내 말에 동의했다.
로아드네스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지만, 곧 내가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자 못 이기는 척 느릿하게 걸어왔다.
로아드네스는 보란 듯이 내게 딱 붙어 앉았다. 누가 보면 반대편 옆자리에 전혀 공간이 없는 것처럼.
제 형님을 쫓던 에페로의 눈이 묘하게 게슴츠레해졌음은 물론이고, 로아드네스가 내 손끝에 입술을 문지르던 것을 보지 못한 빅토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굳이…….”
“빅토르 님. 그래서 그 약은 어떤 약이던가요?”
로아드네스에게로 향하는 질문을 차단하자 빅토르가 금세 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펼쳤다.
내가 건넨 엘라콘어 약초 이름들에 대한 해석과 효능을 적은 표였다.
“많다. 워낙. 여러 효능. 있다. 유명한 주술사. 엘라콘에.”
“음?”
“그 약초들을 다룰 만한 주술사가 엘라콘에 딱 한 명 있다 합니다.”
빅토르의 서툰 제국어에, 에페로가 통역을 자처했다.
“요즘에는 쓰지 않는 약초들이라는 데에 많은 엘라콘 의사나 주술사들이 동의했고. 이런 걸 다룰 만한 대주술사가 엘라콘에 있습니다. 다만, 그가 여기까지 오는 건 힘들고요.”
고로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한다는 뜻이었다.
“안 돼.”
로아드네스가 대놓고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빅토르가 내밀었던 종이를 밀어냈다.
기다란 손가락이 종이 뭉치를 밀어내는 걸 응시하던 빅토르의 인상이 구겨졌다.
“보낼 수 없다. 그자. 엘라콘 입장에서도. 쉽게!”
“왕자면 왕자답게 일을 처리하지 그러나.”
“혼난다. 누님들에게!”
로아드네스가 짧게 혀를 찼다. 에페로는 빅토르가 말한 누님들을 떠올리는지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중재했다.
“형님. 대주술사는 엘라콘에서 존경받는 인물인 데다 은둔하고 있어 론타까지 오지 못합니다. 그의 마지막 행적 역시 겨우 찾았다 하니, 이번이 아니면 또 몇 달이고 그를 찾아 헤매야 할지 모르고요.”
“안 돼.”
“형님께서 움직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자 역시 직접 볼일이 있는 사람과만 만나려 할 테니 부인만…….”
“부인을 혼자 보내지 않는다. 간다면 무조건 나와 함께 갈 거야.”
로아드네스의 단호한 대답에 에페로가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일렁이는 짙푸른 눈은 그를 향해 다른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제가 엘라콘으로 직접 가죠.”
“부인.”
“아카시아 백작. 이라고 불러주세요, 황자 전하.”
내게 완전히 돌아온 얼굴이 단번에 서운함으로 물들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전하의 보좌가 아니라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의 보좌잖아요. 이후 제 거취는 제 자유고요. 저는 늦기 전에 혼자라도 가서 그를 만나보고 싶어요.”
“아드리엔.”
그가 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전하와 제가 따로 의논하고, 내일 다시 뵙도록 하죠.”
“아니다. 혼자. 나도 간다. 에페로도.”
“그러니 더 안 돼.”
“전하.”
나는 단단한 로아드네스의 허벅지를 힘주어 꾹 눌러 잡았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
에페로는 로아드네스에게 반항하지 않고, 약간 화가 난 듯한 빅토르를 데리고 사라졌다.
로아드네스와 나는 그길로 퇴궁해 대공저로 향했다.
오는 내내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로아드네스의 고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서 나는 그에게 대뜸 손님방을 내어주었다.
잠시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서로 생각을 정리하자고 통보한 참이었다.
“마님! 어떡해요! 머리가! 새벽에 돌아온 마님이, 금발로 염색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셨다고 다들 떠들기에 얼마나 놀랐다고요!”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욕실까지 따라 들어온 요나가 상복 벗는 것을 거들며 조잘거렸다.
나는 말없이 요나가 받아놓은 따뜻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많아 보이던 요나는 내가 혼자 씻겠다 하자 군말 없이 나갔다.
나는 머릿속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로아드네스가 함께 가든, 가지 않든 나는 엘라콘으로 당장 출발할 생각이었다.
몸을 대충 닦고, 요나가 챙겨둔 가벼운 드레스를 입고 욕실을 나가자 침실 창문을 내다보고 선 로아드네스가 눈에 보였다.
그 역시 대충 씻었는지, 살짝 젖은 머리카락으로 아까 입었던 검은색 상복 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
“창밖에 뭐가 있어?”
“네가 여기 있었을 때, 뭘 보고 살았을까 싶어서.”
그가 뒤돌아 내게 다가왔다.
스스럼없이 허리를 당겨 몸을 붙이는 손길이 꽤 자연스러웠다.
“내일 엘라콘으로 떠나겠다고 전하려고.”
“…….”
로아드네스가 말없이 내 허리를 더 당겨 안았다.
“아카시아 백작 영지에 있다는 마나석 광산도 둘러보고 싶고. 무엇보다 기회가 있다면 동부로 가서 아버지도 만나보고 싶어.”
금방 마른 백금발이 노을빛에 반짝였다.
나는 말없이 그의 품에 뺨을 묻었다.
머리에 둘러졌던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 반쯤 마른 머리카락이 내 등으로 쏟아졌다.
“네가 가면 나도 갈 거야.”
“할 일이 많잖아, 로아드네스. 장례 마무리도 네가 맡아야 하고…….”
“그 장례식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널 내 곁에 둘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
집무실에서보다 농도 짙은 감정이 그의 입을 통해 내 귀를 괴로울 만큼 간지럽혔다.
순식간에 긴장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네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야. 장례를 치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어. 무리하지 마.”
“아드리엔. 나는 이미 바르데날도가 내게 만들어 준 환상을 다 깨부수었어. 물론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바르데날도가 유리관에 안치되지 않은 게 다행이야. 죽은 형님의 시신을 보고 내가 멀쩡히 서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로안.”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을 쫓고 싶지도, 그것 때문에 산 사람을 놓치고 싶지도 않아. 이제 내게 남은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내가 이 세상에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땅, 그 자체가 너야, 아드리엔.”
그가 의식 없이 문지르는 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니 너를 그런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혼자 보내는 일은 없어.”
내가 욕탕 안에서 생각을 정리했듯이, 그 역시 생각을 정리한 눈이었다.
“하지만 로안. 넌 이제야 바르데날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너 자신으로 살 기회를 얻었잖아. 네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도 필요해. 내 개인적인 일에 무리하게 동행을 부탁할 수 없어.”
“아드리엔. 너는 아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너만 보고 살았어.”
갑작스러운 내용에 눈이 점점 벌어졌다. 로아드네스는 여전히 흔들림 없었다.
“네가 강한 기사가 좋다며. 그래서 그리 산 거야.”
“……로안?”
“네가 강직한. 듬직한. 그런 사내가 좋다기에 내 모난 부분을 다 깎아내고 네 앞에서 그리 살았다고. 네가 내 인성이고, 내 인생이야.”
아.
철없던 어린 시절.
어떤 사내가 좋냐는 질문에 해맑게 대답했던 내용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어깨는 두 팔을 뻗어도 다 감싸 안을 수 없고. 키는 까마득히 고개를 올려다볼 만큼 크면서. 어떤 위험에서도 나를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강한 기사님.
그런 비슷한 말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줄줄 말했었지.
단번에 난처해지는 내 얼굴에 로아드네스가 어둑하게 미소 지었다.
“나 비겁한 놈 맞아.”
“로안, 설마 정말 내가 어릴 때 그렇게 말해서…….”
“불안한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항상.”
“로안.”
“네 불안함을 없애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 사실 그건 네가 아닌 내 불안함을 위한 거야.”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끌어당기는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널 갖고 싶은 건 나야, 아드리엔.”
“로안, 나도 널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 없어.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상각할 시간 말고도, 지금 궁에는 네가 필요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철없는 내 한마디에 여태껏 그런 사람으로 살았다는 로아드네스에게 나는 죄책감을 지우듯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고개를 내젓고 되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이라면 사는 내내 했어. 네가 내 인생이야, 아드리엔.”
“로안…….”
“너를 지켜야 하는데, 황태자가 되어야만 한다면 그 또한 될 거야.”
나는 단번에 몸을 굳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바르데날도에게 묶여 있던 목줄을 끊어낸 로아드네스가, 도로 그 목줄을 내게 쥐여 주려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다시는 널 놓치고 싶지 않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로아드네스가 말했다.
“너를 갖고 싶어. 아드리엔.”
로아드네스의 한 손이 서서히 내 등을 타고 올라와 젖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뒷목을 당겨 안았다.
“머릿속에 내내 그 생각밖엔 없었어.”
더 강하게 그의 가슴에 뺨이 짓눌리자 쿵쿵대며 울리는 로아드네스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 증명할 거야. 나는 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사람도, 어머니의 어둠도 아니라는 걸. 너를 지키고 행복하게 해줄 만한 남자라는 걸.”
뜨거운 한숨과 함께 귀에 틀어박히는 목소리가 버거웠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일렁이는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 믿어, 아드리엔.”
“로안…….”
로아드네스가 망설임 없이 검은 셔츠를 벗어 던졌다. 단추도 풀지 않고 그대로 끝자락을 쥐고 팔을 들어서.
죽음의 기운이 남아 있던 상복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자, 노을빛에 반짝이는 대리석 조각 같은 몸이 다가왔다.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한, 하지만 그런 상처들로 절대 가릴 수 없는 압도적인 육체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러니까…….”
다급하게 벗어 던진 옷이 무색하게, 다가오는 걸음은 느릿했다.
새빨간 노을빛이 늘 내가 훔쳐보았던 우아한 목덜미를 따라 떡 벌어진 어깨를 지탱하는 선명한 빗장뼈, 그리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단단하고 두툼한 흉근을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훑어내렸다.
“……유혹 당해줘.”
맙소사.
성큼 다가선 그의 몸에서 내게 익숙한 비누향. 그리고 그의 체향이 뒤범벅이 되어 코를 잠식했다.
“나를 떨어뜨려 놓고 멀리 가버리겠단 그런 말 하지 말고…….”
자연스레 맞붙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검은 바지 아래 존재감을 감추지 못하는 양감이 느껴졌다.
“……날 가져줘.”
순간 닐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로아드네스의 손이 참 크다며 감상하던 내게 ‘뭐든 크신 편입니다.’라며 대꾸하던 심드렁한 목소리 말이다.
“나를 가져줘. 내가 널 가질 수 있게.”
아.
집무실에서부터 가늘어졌던 내 이성이, 낮게 쏟아지는 그 목소리에 뚝 끊기고 말았다.
“……응.”
죽어가던 몸과 진실에 짓눌려 있던, 오늘 이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가물가물했던 낯선 욕망이 정신없이 뒤흔들리다 마개를 딴 샴페인처럼 터져 나왔다.
눈가를 붉히고.
온 마음과 몸으로 내게 부딪치는 이 야해 빠진 짐승에게 나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럴게.”
내게 끌려오듯 몸을 기울인 로아드네스의 입술은 내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자마자 곧장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