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직도 네가 고파
“올리비아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니,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하필 네 유모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블리에를 찾는 경우는 드물 테지.”
로아드네스가 내 불안을 꿰뚫어 보듯 말하더니 침대에서 스멀스멀 벗어났다.
“로안!”
“응?”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입구로 향하려던 그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빈틈없이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의 음영이 더 짙어졌다.
“옷!”
“아.”
그의 밝은 금발은 흐트러질 때로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과는 달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반짝였다.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올린 로아드네스는 눈앞을 아득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는 제 몫의 이불을 가져다가 대충 허리에 두르고 입구로 걸어갔다.
문 앞에 아침 식사를 전해 주러 온 사용인 하나가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쟁반을 받아들고 와 티테이블에 그것을 하나씩 세팅하기 시작했다.
“나와, 아드리엔. 아침 먹게.”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빅토르 님에게 엘라콘으로 가겠다고 말해야겠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픈 것을 꾹 참고 끙끙대며 일어나려니, 어느새 로아드네스가 내 앞에 다가왔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이불이 뚜렷하게 솟은 장골을 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이 금세 달아올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두둥실 떠올랐다.
“어제 네가 씻고 있을 때, 이미 사람을 보냈어.”
“뭐?”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이불을 덮은 나를 통째로 가볍게 안아 든 로아드네스가 티테이블에 나를 앉혔다.
흘러내리려는 이불을 꼭 붙들고 허둥지둥 어깨만 드러내고 두르자 로아드네스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골치 아픈 준비는 에페로가 다 할 테니, 일단 먹어. 널 살찌워야겠으니까.”
어느새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내 옆으로 끌고 온 로아드네스가 턱 하니 앉아 수프와 흰 밀빵을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날 엘라콘으로 보내줄 생각이었어? 처음부터?”
얼떨결에 나는 물그릇에 손을 담가 씻으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말린다고 안 갈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골치 아플 일도 없었겠지.”
“놀랐어, 솔직히. 이렇게 일사천리로…….”
“나 원래 일 잘해.”
로아드네스는 트레이에 놓여 있던 손수건으로 내 손을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간밤의 손길이 생각나 괜히 움찔거리는데, 그럴 때마다 그가 힘주어 잡아 닦아주어서 내 손은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엘라콘에 가는 김에 올리브인지 올리비아인지 그 여자도 만나보면 좋겠군.”
내 입에 먹을 게 들어가는지 끈질기게 지켜보던 로아드네스가 장식으로 놓여 있던 포도주 하나를 따서 병째 들고 마셨다.
그가 고개를 쳐들고 병에 입을 댈 때마다, 나는 간밤의 잔상이 떠올라 고개를 급히 흔들었다. 꿀꺽꿀꺽 포도주를 삼키는 굵은 목울대가 내 눈을 찌르듯이 자극했다.
나는 괜히 갈증이 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손을 뻗어 전투적으로 밀빵을 씹었다. 로아드네스가 버터를 발라 놓았는지 먹자마자 버터향이 온 입안을 휘저었다.
“어쨌든 엘라콘 놈이랑 에페로가 알아서 짐이고 뭐고 다 꾸려오면 바로 출발할 거야.”
“정말 너도 함께 가는 거야?”
“폐하께는 형님의 죽음을 틈타 엘라콘 놈들이 허튼짓 할 수도 있으니 살피고 오겠다 전했어.”
“허락해주셨어?”
로아드네스는 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다시 포도주를 들이켰다.
“아직. 하지만 남은 후계가 에페로와 나 둘뿐인데 괜히 나를 자극하셔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남은 후계가 둘 다 타국으로 가는 게 더 걱정이실 것 같은데.”
나는 반쯤 빈 접시를 밀어내고, 입을 헹궜다. 기다렸다는 듯 내게 냅킨 하나를 건넨 로아드네스는 잠깐 무언가를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그놈 새끼. 아니, 그놈 말하는 게 짜증나서 안 따라갈 수 없잖아.”
“응?”
내가 다 먹은 걸 확인한 로아드네스가 다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네 얼굴이 제 타입이니 뭐니, 그딴 개, 아니 헛소리하는 놈이랑 어떻게 같이 보내? 그 엘라콘놈도 강아지처럼 너만 졸졸 따라다니고.”
로아드네스는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리다 나를 침대에 놓아주었다.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굴리다가, 곧 에페로 일행이 대공저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그럼 나도 준비해야겠네. 언제 올지 모르니까…….”
“준비할 필요 없어, 넌 몸만 가면 돼. 너 빼고 이 저택 사람들 모두, 우리가 긴 여행을 떠난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 시간이 좀 있다는 이야기야.
로아드네스가 덧붙이며 스멀스멀 내가 둘렀던 이불을 거둬들이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로안, 나 어제가 처음이었다고 분명히…….”
“……나도야.”
그가 나를 안아 들었을 때, 턱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자, 그의 이불이 바닥에 떨궈져 있었던 것이다.
“나도 처음이야, 리엔.”
아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가 온몸을 적셨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덮었다.
뜨겁고 단단한 몸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몸을 움찔하자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달래듯 내 눈가며, 뺨, 입가를 지나 목덜미로 떨어졌다.
그가 방금까지 마셨던 진한 포도주 향이 온몸을 맴돌았다.
“나는 아직도 네가 고파…….”
“아.”
“먹을 때 네 입이 얼마나 귀엽게 오물거리는지 알아? 알면 나한테 하지 말라고 못 할걸.”
깊은 한숨과 함께 쏟아진 말을 끝으로, 뜨거운 입술이 나를 점령했다.
나도.
‘사실 나도 네가 술을 병째 물처럼 마실 때부터 네 목에 매달려 입을 맞추고 싶었다’고.
그런 말은 할 기회조차 없었다.
생각이 날아가 버린 머릿속으로 그가 마신 포도주가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빼앗겼던 내 이불이 그의 등을 지나 우리 둘 모두를 덮었다.
하얀 이불 속이 달콤하고 쌉싸름한 포도주 통이 되어, 내가 그 속에 퐁당 빠져버린 것만 같은 아침이었다.
***
황태자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비앙카는 기분이 이상했다.
“마님,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에페로 황자의 환영식에서부터, 바쁜 그레고리를 대신해 동부 대표로 사교활동을 했던 그녀는 그날도 지금과 같이 비슷한 기시감을 느꼈었다.
“릴리. 자네 에페로 황자의 환영식을 기억하는가?”
“예, 마님도 저도 깜짝 놀랐잖아요. 동부 사교계는 구경도 해본 적 없었을 황실에서 어찌 이리 동부식으로 잘 꾸몄나 하고요.”
바쁜 황실의 여인들을 대신해 황태자 바르데날도, 아니 그의 보좌관이 맡아서 꾸몄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보좌관의 정체가 블리에 아카시아,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러나 동부를 경계하는 중앙 귀족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기에, 비앙카는 대공저에서처럼 그 여자에게 대놓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황제의 탄신연까지 조용히 머무르다가, 황실의 주요 행사에 동부가 참여했다는 눈도장만 찍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황태자가 위독해지고, 하루 만에 서거했다는 소식에 정신없이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비앙카는 그곳에서 에페로 황자 곁에 있는 여자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그곳이 장례식이라는 생각도 잊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드리엔!’
죽은 아드리엔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그곳으로 달려갈 뻔한 걸 꾹 참으며 장례식 내내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뒤늦게 에페로 황자 곁에 있던 여자가 누구였는지 물었을 때,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녀를 블리에 아카시아라고 말했다.
대공 노에비안의 황태자 시해 장면을 목격한 목격자이자, 함께 죽임을 당할 뻔한 황태자의 보좌관.
하지만 비앙카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분명, 블리에가 아닌 아드리엔이었다.
아드리엔이 난생 처음 책을 보고 그것을 또박또박 읽기 시작한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녀는 피레타 대저택을 드나들며 아드리엔을 보아왔다.
어머니도, 여자 형제도 없었던 그 집안에서, 비앙카는 아드리엔이 성장할 때마다 오빠인 그레고리가 보살펴 줄 수 없는 부분을 살폈다.
어쩌면 피를 나눈 아버지나 오빠보다, 비앙카가 아드리엔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다.
블리에가 아무리 닮았다 한들, 잠시 금발로 염색하여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한들. 비앙카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드리엔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고, 그 장례식까지 참석해 땅에 묻히는 것까지 보았지만.
비앙카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미쳤다 하더라도 다시 확인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마님! 마님, 제발! 차라리 제가 할게요!”
“비켜, 릴리!”
“황족의 시신을 파헤치는 건, 아무리 피레타 공작가 같은 대귀족이어도 사형에 준하는 벌을 받게 될 거라고요!”
비앙카는 장례식날 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몰래 트로비카 대공가의 공동묘지에 숨어들었다.
그곳을 지키던 경비 몇 명은 대공비의 가족이자 대귀족인 비앙카가 혼자 조용히 고인을 추모하고자 한다는 말과 돈 몇 푼에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덤을 파헤쳤다고 주신의 벌을 받더라도, 혹시라도 황실에서 이 사실을 알고 나를 벌하려 하더라도…… 너는 그저 비앙카 피레타가 사실은 미친 여자여서 그런 짓을 했다고 말해. 나 하나만 미친 여자가 되면, 최소한 피레타에 폐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
“마님, 마님 제발. 소공작님께서 아시면…….”
“그 여자를 봤다면 그레고리도 내 마음을 이해했을 거야. 아니, 그이 역시 이곳을 죄다 파헤쳤을 거야.”
하나뿐인 동생을 허망하게 잃은 후유증은 쉬이 가시지 않아서 그레고리는 가끔 아드리엔의 방으로 가 홀로 있다 오곤 했다.
그 쓸쓸한 뒷모습을 떠올리던 비앙카가 이를 악물고 삽을 들었다.
고귀한 귀부인이 들기에는 퍽 흉물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하녀 릴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누가 오지는 않을지 망을 보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말없이 무덤을 파헤치던 비앙카의 입술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없어…… 없어, 릴리!”
“마님?”
“시신이 없어! 리엔이 없어! 누군가 리엔을 도둑질해갔어! 내가 뭐랬어? 분명 뭔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비앙카는 움푹 파인 땅 위로 기어 올라왔다.
릴리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올렸다.
반동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비앙카의 드레스는 전날 비가 내려 축축해진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블리에 아카시아. 그 여자를 다시 한번 만나야겠어.”
제 눈앞에 띄지 말라 경고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 여자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꼭 만나야겠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뜬금없이 엘라콘에서 특별히 2황자와 블리에를 초청했다는 소문이 돌자 비앙카의 마음이 급해졌다.
트로비카 대공저에서 엘라콘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말에, 그녀는 머리치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대로 말에 올라타 달렸다.
이미 짐마차 행렬의 중간에 몇 겹의 호위를 두른 대공저의 마차가 수도 북문을 넘어가고 있었다.
비앙카는 미친 듯이 말을 달려 마차를 쫓았다.
수도 중앙을 벗어나자마자 자객을 맞이하는 줄 알고 경계하던 호위들은 웬 자그마한 여인 하나가 마차를 쫓자 놀라 쫓아왔다.
그 소란의 중심에 있던 마차가 마침내 멈추고, 그 안에서 꿀처럼 흘러내리는 금발의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드리엔.”
아드리엔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