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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17화 (117/171)

117화. 뜨거운 재회

에페로 일행은 생각보다 일찍 대공저에 도착했다.

우리는 엄청난 수의 짐마차며 인원들이 대공저 코앞까지 왔음에도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요나가 재빨리 문을 두드려 우리를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행색으로 그들을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집무실에서 허락 없이 문을 열어젖히던 에페로를 순간 떠올리곤 눈앞이 아찔해져 잠깐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그들이 1층 로비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로아드네스를 밀어내고 겨우 옷을 꿰어 입었다.

옷 입는 걸 도와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꼼짝없이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해야 했지만 말이다.

요나는 온몸에 울긋불긋 꽃이 핀 나를 위해, 대신전에 예배를 드리러 갈 때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준비해주었다.

그마저도 어찌나 집요하게 흔적을 남겼는지 얼룩진 목덜미를 가리기 위해 나는 여행길에 머리를 올리지도 못했다.

심지어 요나와 타려던 마차도 로아드네스가 고집을 부려 자신이 탔다. 밀착 호위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말이다.

“빈센토 경은?”

“장례 뒤처리를 맡겼지. 바르데날도와는 사촌이니 나 대신 두고 가기 제격이야. 윈스터 후작가의 후계가 황태자의 장례를 마무리 한다니 아무도 이견이 없더군.”

그 말을 끝으로 로아드네스가 잠시 창밖을 내다봤다. 빈센토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장례식 때 집무실 앞까지 쫓아온 이후로, 빈센토는 더 이상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 닐을 통해 명령을 전달한 듯했지만, 그는 빈센토 이야기만 나오면 저런 미묘한 표정으로 창밖만 내다보았다. 어쩐지 좀 쓸쓸해 보였다.

“리엔, 이리 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로아드네스가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 말했다.

황궁의 것이라 최고급 마차였지만, 로아드네스는 어쩌다 한번 마차가 꿀렁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 허벅지를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왜?”

“여기 앉아.”

“거기가 더 불편할 것 같아.”

“……한번 앉아보고 판단해줘.”

“여기 쿠션이 적당히 단단하고 좋아. 엉덩이가 하나도 안 아파.”

“엉덩이가 안 아프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로아드네스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잘생겨서 봐준다.’

깎아놓은 듯한 콧날이며 밤새 바빴던 입술을 응시하며 나는 입속을 꾹 깨물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마차 안을 비출 때마다 그는 황금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반짝거렸다.

우리 둘 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음에도 어딘가 눈 밑이 거뭇해진 나와는 달리, 그는 결혼식 전에 열심히 마사지를 받은 새신부처럼 생기가 넘치고 반짝였다.

“내가 밤새…….”

“그만! 그래, 알겠어! 딱 10초만 앉아볼게. 됐지? 밤새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을 이런 대낮에 꺼내면, 어젯밤과 같은 일은 이제 다신 안 할 거야.”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딱 다물리는 입이 불만을 토로하려는 듯 살짝 벙긋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맛난 쿠키를 가졌다가 다시 빼앗긴 아이처럼 일순 서러운 빛이 스미던 눈은 내가 벌떡 일어나 제 무릎에 앉자 다시 반짝였다.

“리엔.”

자연스레 굵다란 목에 팔을 두르고 기대자, 그가 곧장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뜨끈한 입술이 꽁꽁 싸맨 목덜미에 자연스레 내려앉았다.

“사랑해.”

마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사랑하면 작작 좀 해, 로안. 나 몸살 났다고.”

“응.”

작작 하라는 말에 늘 ‘응’이라고 대답하며 밤새 괴롭히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상하게 화가 나기는커녕 간밤의 뜨거운 한숨이며 내게 몰입해 눈가를 붉히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의 얼굴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이건 알아줘야 해, 리엔. 나 정말 많이 참은 거야.”

“……그게 참은 거라고?”

작작 하라는 말에 조금 서러웠는지 그가 참았던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얼마나…….”

하지만 말을 쏟아내려던 입이 곧 멈췄다.

잠시 뜻 모를 눈빛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던 로아드네스가 얼굴을 붉히며 피식 웃더니 그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니야. 몰라도 돼.”

“뭔데?”

그때였다.

“전하! 전하!!”

수행을 맡은 닐이 요란스럽게 마차 창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전하! 어떤 여자가 저희 행렬을 바짝 따라오고 있습니다.”

로아드네스가 긴 팔을 뻗어 창문을 열자 말을 바짝 곁에 갖다 붙인 닐이 급히 전했다.

“알아서 처리해.”

“저, 그게…… 낯이 익습니다. 부인께서 아는 분인 것 같습니다.”

닐이 급히 덧붙였다.

“확인해보죠.”

나는 로아드네스의 품에서 벗어나 창문으로 상반신을 쭉 내밀었다.

“리엔!”

로아드네스가 깜짝 놀라 내 팔을 붙들어주었다.

마차가 알아서 속도를 조금씩 늦추어주었다. 뒷덜미를 가리기 위해 내린 머리가 바람에 세차게 나부꼈다.

나는 지나치게 화창한 날의 태양을 피해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고 멀리서 따라붙는 인영을 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구불거리는 다갈색 머리카락이 나보다 훨씬 거칠게 나부끼는 장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드리엔!”

나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희게 질려 몸을 물렸다. 내가 가슴에 손을 짚은 채 주저앉으려 하자 단번에 나를 끌어안은 로아드네스가 내 안색을 살폈다.

“누구지? 내가 나가서…….”

“아니! 아니, 그냥…… 그냥 가 줘.”

나는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겨우겨우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코가 찡해졌다.

“그냥, 그냥 가자.”

아직 비앙카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는 그저 눈을 꼭 감고 로아드네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어깨를 강하게 붙들어 끌어안아 주었다.

분명히 마차가 속도를 더 높였는데, 이질적으로 말발굽 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리엔!”

“!”

비앙카의 새된 목소리가 귓속에 박혀 들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아드리엔! 제발! 제발 멈춰!”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다, 가까워지다, 결국 서서히 멀어져갔다.

하지만 그 소리가 멀어질수록 그 절박한 말발굽 소리와 처절한 외침이 내 심장을 짓이기는 것만 같았다.

탕탕-!

“마차를 멈춰요!”

나는 결국 벌떡 일어나 마차 벽을 때렸다.

히히히힝-! 급하게 마차를 세우는 소리와 함께 로아드네스가 붙잡을 새도 없이 나는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짐마차 몇 대 뒤, 멀찍이. 거품을 문 말 한 마리에서 비앙카가 떨어지듯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휘청이면서도 나를 보자마자 눈알이 시뻘게진 채로 달려왔다.

그녀를 막아야 할지 말지 혼란스러워하는 호위들 사이를, 나 역시 헤집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곧.

지척에 다가온 비앙카가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

결국 로아드네스는 마차에서 쫓겨났다.

말없이 비앙카를 마차에 태운 나는 다른 마차를 타고 몇몇 사용인들과 함께 뒤따르던 요나를 불렀다.

비앙카는 내게 ‘블리에’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누구와 있든 어디서 나왔든 내가 아드리엔이라는 사실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듯 결연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눈물을 쏟아내길 반복했다.

끌어안은 품을 놓지 않으려는 그녀를 겨우 달래고, 나는 비앙카와 요나를 나란히 앉히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반쯤 열린 창문을 꽉 닫아 잠그고 커튼까지 치자 마차는 금세 어둠으로 물들었다.

요나는 갑작스러운 비앙카의 태도 변화는 물론, 담담한 내 표정을 보며 잠시 당황한 듯 눈을 일렁이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내 말을 기다렸다.

나 역시 비앙카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한차례 쏟아 냈기에 손수건으로 급히 얼굴을 추슬렀다.

“마님, 어디 아프세요?”

“요나, 그리고 비앙카.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줄 거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비앙카의 떨리는 눈동자와 요나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나를 향했다.

“나를 지금 블리에 아카시아가 아니야.”

***

속도를 늦춘 마차 안에서 비명과 탄식이 어슴푸레 흘러나왔다.

로아드네스는 뒤따르는 짐마차들과, 앞서가는 에페로 일행의 행렬과의 거리를 더 벌리며 말을 몰았다.

카랑카랑한 여자의 욕설과 외침이 방음이 잘 되는 마차를 뚫고 그의 귓전을 울렸다.

멀찍이서 불안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닐에게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젓고는 턱짓으로 앞서 보냈다.

그는 이 비극에 아드리엔의 아버지인 피레타 공작 역시 일조했다는 사실을 일찍이 들은 참이었다.

그러니 마차 안에서의 소란은 그와 연관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

최초로 내가 숨이 끊어졌다 생각한 지점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비앙카의 분노를 막을 순 없었다.

중간부터는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기절하는 게 낫겠다며 몸부림치던 비앙카는 요나가 붙잡아주자 이성의 끈을 겨우 잡았다.

“리엔, 리엔. 이 말도 안 되는 촌극을 너 혼자 어찌 견뎠단 말이야? 툭하면 쓰러지던 약한 애가 그 험한 꼴을 다 보고!”

결국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고 한참을 엉엉 울던 그녀는 겨우 잦아든 목소리로 ‘그래도 네가 살아 있어 다행이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녀에게 끌어안긴 채, 딱딱하게 굳어버린 요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요나는 떨리는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찬찬히 내 얼굴을 뜯어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아-. 제가 블리에 님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요나, 네 탓이 아니야. 미안해. 네가 블리에와 그렇게 깊은 사이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말해줄 수 있었을지도 몰라.”

혼란스러워하던 요나는 내가 사과하자 손수건으로 눈 밑을 찍어냈다.

“처음엔 나도…… 너무 혼란스러워서.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어. 누가 이런 말을 믿겠어? 그 어떤 소설을 봐도 이만큼이나 기가 막힌 상황은 없을 거야. 나도 차라리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다고 여긴 적이 있었으니까.”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마님.”

요나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

요나는 본래 블리에의 사람이니, 블리에를 관 속에 밀어 넣고 아직 그녀의 행세를 하고 있는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보내줄 작정이었다.

요나가 따르는 건 내가 아니라 자신의 은인인 블리에니까.

“저는 마님을 돕고 싶어요.”

긴장으로 꽉 쥐고 있던 주먹 위로, 요나의 작고 하얀 손이 올라왔다.

조금은 거친 듯한 손바닥은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님을 돕는 게, 우리 블리에 님도 돕는 길이잖아요. 아닌가요?”

“요나야…….”

“마님은 처음 보는 제게도 늘 다정하셨죠. 블리에 님도 안 그런 척 하시면서도 그랬어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은인의 행세를 하며 자신을 부릴 수 있었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을 텐데, 요나의 얼굴은 내가 블리에가 아니라고 해도 이전과 같았다.

“블리에 님이 제 은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제가 모시는 분이 마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마님, 저는 마님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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