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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18화 (118/171)

118화. 자극하지 마

아.

아까 한참 울어서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뜨겁게 내 뺨을 적셨다.

요나에게 고마운 건, 좋아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약해지면, 약점을 보이면.

대공저의 하녀들처럼 백작저의 하녀들 역시 나를 모욕하고 얕잡아 볼 것이라는 불안감이 산산이 조각났다.

대공저 밖의 사람들이 내게 친절할 리 없다며 지레 겁먹고 노에비안에게 응석을 부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진심이 통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답받는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더 큰 감동을 내게 선사했다.

병들어 초라해졌던 기간 동안 무너졌던 자존감이 무서운 속도로 회복되고, 건강한 몸이 아니라 온전한 아드리엔으로서 사람들과 통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런 상황임에도 가슴이 벅차올라 나는 요나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마지가 보고 싶어. 우리가 이렇게 우는 걸 보면, 왜 청승맞게 대낮부터 눈물 바람이냐고 잔소리를 할 텐데.”

“……저도요.”

대공저 하녀장 소피에 맞서 나를 지키려 했던 마지는 휴가를 줬음에도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백작저의 살림을 도맡았다.

내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로아드네스에게 잠 좀 자라며 등을 떠밀다가 그가 끝까지 버티자 등짝을 후려치려 손을 번쩍 들려는 것을 요나가 급히 막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던 참이었다.

그때 제 아들에게 하는 것처럼 로아드네스의 등짝을 후려쳤다면 그가 어찌 반응했을까 사실 궁금했다던 요나의 키득거림이 내 귓가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요나 역시 내게 일러바치던 그 날을 떠올리는지 한참 울다가 키득였다.

울다가, 웃다가.

우리는 첫 중간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를 얼싸안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

비앙카는 이 일에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쉬이 믿지 못했다.

물론 그녀 역시 아버지가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원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를 황태자의 정부라는 치욕스러운 자리에 밀어 넣을 만큼 간절한 욕망인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서도 비밀로 해줘, 언니.”

“그레고리에게도?”

“그레고리에게 제일.”

다혈질 기질이 있는 그레고리에게 알렸다간 충동적으로 일을 칠지도 몰랐다.

“그래, 대공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네 오빠가 주변 영지에 군사를 빌리기 시작했다는 건 알아?”

그레고리라면 그럴 법도 했다. 그러니 동부에서 군사라도 몰고 들이닥치진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고.

“그때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줄곧 침실에서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던 공작께서 처음으로 침실을 벗어나 크게 호통을 치셨지.”

그날을 떠올리듯 눈을 가늘게 좁히던 비앙카가 순간 동공을 키우고 나를 보았다.

“그때, ‘괜히 일을 그르치지 말고, 자중하며 때를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셨어.”

“…….”

“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란 말은 대공에게 복수할 순간을 기다리라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괜히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말은 왜 하신 걸까?”

그녀가 흥분해서 덧붙였다.

나는 어렴풋이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황태자와 아버지의 연결고리를 의미하는 것일 테다.

노에비안 트로비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말로 협박만 해놓고 반응을 기다린 것이겠지.

나는 대공비로서 죽었으니 어쨌든 동부는 황태자의 줄을 탄 것이니까. 내가 황태자의 정부가 될 뻔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비앙카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유모는 잘 지내?”

“유모야 네가 죽었다는 소식 이후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가, 이제야 겨우 기운이나 차린 수준이지.”

“……그래.”

“부쩍 공작 각하와 친해졌더라. 늘 찬 바람이 쌩쌩 불더니, 둘 다 나이가 들어 서로를 미워할 힘도 없어졌는지…… 네가 죽었다는 소식에 서로 연민이라도 하게 된 건지.”

내 어머니의 시녀였다가, 내 유모가 된 올리비아는 늘 바빠서 영지 밖을 나돌고 살갑지 못한 아버지를 미워했다.

어린 내게도 그런 그녀의 감정이 선명하게 와닿았던 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리에를 찾는다던 올리비아 루치아는 유모가 아닐 가능성이 더 커졌다. 그녀는 꽤 노쇠했고, 엘라콘에서 그런 수소문을 할 만큼의 재력도 없으니까.

“하루만 더 있다가 가.”

“내일 곧바로 엘라콘 국경을 넘는다며?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만, 엘라콘에는 사신의 자격으로 가는 것이니 괜히 명단에도 없는 내가 끼었다간 론타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어. 황실 귀에 들어가면 괜한 의심도 살 테고.”

비앙카는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시선을 줬다가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아드리엔, 내 동생. 너인 줄도 모르고 내가 그렇게 뺨을 치다니. 그 죗값은 언젠가 닳도록 받으마.”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호위 한 명이 그녀의 말을 몰고 다가왔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동부로 가야겠어. 1시간만 말을 달리면 동부의 경계를 넘을 수 있으니 내 걱정은 마.”

“호위를 붙여줄게.”

“어머. 피레타 소공작 부인이 호위하나 없이 밖을 돌아다닐 줄 알았니, 리엔? 귀여워라.”

그녀가 내 볼을 꼬집고는 애틋한 포옹을 한 번 더 선사했다.

“저 황자가 그 ‘안’이라고 했지? 맙소사 저런 훤칠한 미남자를 연인으로 삼다니. 내가 다 설레는구나. 노개비안 아, 아니. 노에비안 그 개새끼보다 더 젊고 더 키도 크고 더 듬직하고, 더 아름다워. 사실 노개비안 아니, 그놈이 안이라고 했을 때 난 마음에 좀 걸렸단다.”

“언니, 듣겠어.”

“들으라지. 칭찬인데 뭘. 노에비안 그 시커먼 놈이 조금만 더 어린놈이길 바랐었거든. 좀 젊어 보인다고 예닐곱 살 차이가 어디 가니? 살다 보면 젊은 게 최고라는 말뜻을 알게 되는 날이…….”

“언니!”

비앙카가 마침내 눈물을 지우고 깔깔 웃었다.

“허벅지도 튼실한 게 마음에 들어. 목도 적당히 굵직하고 길쭉해서 사내다우면서도 우아하구나.”

“그만해, 언니.”

“잘 들어, 리엔. 사내는 허벅지야.”

“알겠으니까, 이제 가.”

멀찍이서 이별의 시간을 주듯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로아드네스는 비앙카가 자신을 보며 윙크를 하자 눈썹을 쓱 들어 올리고 삐뚜름히 섰다.

“전하께 예를 갖추다간 주책이 터져 나올 것 같으니 네가 알아서 잘 말해주렴. 리엔, 그럼 이 언니는 네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게. 지금은 돌아가지만,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도울 거란다.”

“……응.”

비앙카는 내 뺨에 짧게 키스하곤 내가 준 망토를 단단히 둘러쓰고 훌쩍 말에 올라탔다. 멀어지는 그녀를 나는 요나와 함께 한참을 응시했다.

비앙카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나눈 이야기를 남편인 그레고리에게조차 말하지 않을 것을 나는 확신했다.

***

종일 뭘 하느라 그리 바빠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드냐는 에페로와 빅토르의 타박이 이어졌다.

우리가 도착해 천막을 펼친 야영지는 서쪽으로는 트로비카 영지와 아카시아 영지를, 북쪽으로는 엘라콘, 동쪽으로는 동부를 끼고 있는 작은 프레이아 영지였다.

한때 그레이스 프레이아였던 그레이스 황후의 고향이기도 했다.

작은 영지이지만 산지가 많아 저택으로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여기서 야영을 하고 곧장 엘라콘 국경을 넘을 생각이었다.

산 하나를 넘어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가기에는 겨우 최근 행적을 뒤쫓았다는 대주술사를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았다. 나는 다른 사용인들 사이에서 음식을 먹는 요나를 보다가 전서구를 받은 에페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아직 왕께서 대주술사를 잘 붙들고 계신답니다.”

에페로가 전서구에 대충 뭐라 휘갈기곤 다시 날려 보내더니, 구운 감자를 씹어먹으며 말했다.

“근데 그 대주술사를 만나면 뭘 물어볼 작정이에요? 귀부인이 물어볼 만한 질문에 답할 인물은 아닐 텐데.”

“그 주술사. 살았다. 1000년. 답해줄 거다. 뭐든.”

“아, 그런 전설도 있지. 사실 그것도 많이 줄인 거라던데. 한 5천 년쯤 살았다는 전설도 있잖아.”

“조심해라. 주술사보다. 누님들을.”

“그건 동감!”

나는 하도 울어 부르튼 눈가를 문지르며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왜요?”

“좋아한다. 누님들. 반짝거리는 것들. 지금 당신. 엄청 반짝인다.”

“?”

“예쁘다. 무척.”

푸쉬이익-.

모닥불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자청해 장작을 가지러 갔던 로아드네스가 장작더미를 모닥불에 거칠게 쏟아부은 탓이었다.

“형님!”

“많이 먹어라.”

불을 꺼트려 놓고 뭘 먹으라는 건지. 로아드네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가 앉아 있는 통나무 기둥에 앉아 딱 달라붙었다.

“하나. 질투?”

“에페로. 저놈 버르장머리는 네 담당이다.”

로아드네스가 차게 말하자 에페로가 옆구리에 찬 검집으로 빅토르를 쿡, 찔렀다.

어찌나 깊게 찔렀는지 빅토르가 미간을 확 찌푸릴 정도였다.

“아프다!”

“야, 곰탱이. 눈치 챙겨.”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 게 무슨 죄냐! 예쁘다. 황자. 당신도!”

빅토르는 진심으로 로아드네스가 질투하는 이유가 내게만 예쁘다고 해서라고 생각한 듯 순진하게 외쳤다.

로아드네스는 저런 바보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턱을 들어 내려다보는 걸로 응수했다.

하지만 그런 특유의 오만한 태도는 빅토르에게 하나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의 절친한 친우인 에페로야 말로 버르장머리 없음과 오만함을 섞은 끔찍한 혼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걱정한다! 당신들! 누님들! 무섭다!”

“목소리 낮춰, 쪽팔리게.”

에페로가 벌떡 일어난 빅토르를 억지로 주저앉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억울하다! 억울해!”

그가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로아드네스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

식사가 끝난 후, 나는 근처 호수에서 다른 여자 사용인들과 함께 대충 씻고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 의자를 조금만 움직이면 꽤 넓은 공간이 나왔기에 그 위에 두꺼운 요를 깔고 아쉽게나마 침대로 쓸 수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최소한의 호위만 멀찍이 남기고 본인이 직접 내 잠자리를 살폈다.

그는 비앙카나 요나에게 내가 뭐라 했는지 이미 짐작한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피곤할 테니, 어서 자.”

“너는?”

“마차 문을 지키고 있어야지.”

그가 당연하다는 듯 살짝 웃으며 답했다.

“……왜?”

“감히 내 행렬을 습격하는 무리가 있을 리 없지만, 가끔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 있기도 하니까.”

그가 마차 입구에 걸터앉은 내게 몸을 구부렸다.

자연스레 눈을 감았지만, 그의 손은 내 귓가에 머물다가 이제 겨우 다 마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귀 끝이 무척 간지러워 나는 낮게 웃었다.

손길이 떨어지고, 눈을 반짝 떴을 때 그는 내게서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고작 한걸음인데. 무척 아쉬워지는 마음에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같이 자면 안 돼?”

잠잠하던 그의 눈에 깊은 파동이 일었다.

“다른 기사들이 돌아가며 불침번도 서고 있고, 마차 안에서 날 지켜주면 되잖아.”

“……리엔.”

“벼, 별다른 짓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네가 앉아 있던 쪽 의자도 조금만 움직이면 침대가 되잖아. 네가 편하게 잤으면 좋겠어.”

로아드네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시간이 멈춘 듯 나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단호히 내저은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별다른 짓 안 할 자신이 없어서.”

그가 내게만 들릴 듯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곤 금세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시커먼 사내놈들이 지천인 여기서, 조금이라도 너를 상상할 여지를 주게 된다면…….”

“로안!”

이 무슨 망측한 상상이란 말인가! 나는 입이 떡 벌어져 손으로 급히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땐 습격이 아니라, 내가 놈들 목을 다 베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모두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어.”

단 한 점의 장난기도 없는 진지한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니 자극하지 마, 아드리엔.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보다 네 연인이 더 미친놈이니까.”

그가 부드럽게, 하지만 경고하듯 읊조렸다.

“로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그럼 어떡해. 네가 이렇게 예쁜 게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닌데.”

살짝 원망 섞인 적안이 내 얼굴선을 시선으로 덧그리듯 훑어내렸다.

에페로 일행과 함께 있을 때 꾹꾹 눌러둔 게 분명한 불안감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맙소사.

“네가 예쁜 게 죄야.”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짐승은, 지독한 팔불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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