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참지 마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던 나는 멋쩍게 일어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앞에서 마차 문을 닫아버리기에도 어색해서 간이침대에 누웠더니 그제야 로아드네스가 몸을 완전히 펴고 섰다.
“문 닫아줄래?”
말없이 닫힌 문에 딸린 커다란 창문 너머로 그가 여전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신경 쓰여.’
억지로 눈을 감아봤지만, 나도 로아드네스에게 옮았는지 이상한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번쩍 떴을 때도, 로아드네스는 여전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로안.”
그가 내 쪽으로 더 다가와 섰다. 나는 가까워진 그의 크라바트를 바투 쥐고 살짝 끌어당겼다.
아주 손쉽게 끌려온 얼굴이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잘 자.”
실없는 소리나 하려고 불렀나. 머쓱함과 아쉬운 마음이 들어 아주 가볍게 뺨에 입을 맞췄다.
“굿나잇 키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 안으로 커다란 두 손이 뻗어져 들어와 내 뺨과 뒤통수를 세게 당겼다.
“로…….”
그리고 로아드네스가 내 입술을 빠르게 삼켰다.
바깥공기와 달리 착실히 달아오른 뜨거운 숨이 곧바로 내 입안을 점령했다. 분명히 문을 사이에 두었는데, 두 몸이 맞붙은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게 키스잖아.”
축축한 소리를 끝으로 그가 여전히 입술을 맞붙인 채 속삭였다.
손아귀 힘이 얼마나 강한지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손이 다시 나를 끌어당겨 입술을 탐했다.
잡아먹힐 것 같아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니, 그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나를 쏘아보았다.
철천지원수도 저리 쏘아보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날카로운 눈빛 속에 타오르는 건 원망이 아니라 적나라한 욕망 그 자체라는 걸.
나는 괜스레 여밀 곳도 없이 꽁꽁 싸맨 앞섶을 꼭 붙잡고 뒤로 더 물러났다.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촉촉한 것이 그의 입술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였는데, 그는 닦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의 거친 숨이 잦아들길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로아드네스는 혼자 뭐라 씹어뱉고는 그대로 마차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곧장 마차 문을 닫아걸고 커튼을 죄다 드리워버린 로아드네스는 내가 앉아 있는 침대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앉으면서 깊은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여기서 자는 거야?”
“밖에서 잠든 널 생각하며 얼간이처럼 구느니, 여기서 네가 잠드는 걸 볼게.”
그 말에 나는 조용히 이불에 들어가 누웠다.
“네가 아까처럼 가만히 있으려는 날 자꾸 건드리면 제어가 안 돼.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예측이나 할 수 있는 편이 낫겠어.”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중얼거리던 로아드네스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로안. 그렇게 쳐다보면 못 자.”
“눈 감고 있어.”
나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하고 이불속에 파묻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거칠게 씨근대던 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게 들렸다.
“……빅토르 님 말처럼, 엘라콘 왕이 우리를 맞아줄까?”
나는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정적을 목소리로 채웠다.
“엘라콘에서 널 좋게 봤다며.”
“엘라콘 왕이 네게 반하면 어쩌지? 아직 국서가 없다 들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널 불안하게 할 일 같은 건 없다니까.”
귀엽게.
아주아주 작지만, 분명히 마지막에 한숨처럼 덧붙이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너무 생각의 흐름대로 솔직하게 말한 걸까.
제 누님들이 틀림없이 로아드네스를 좋아할 것이라 확신하던 빅토르의 말에 나 역시도 이유 모를 질투를 느낀 참이었다.
로아드네스가 대놓고 불쾌해해서 티 내지 않았을 뿐이었지.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데, 쓸데없는 데 질투나 하고.’
그런데 이 와중에 로아드네스는 또 뭔가. 귀엽다니. 남은 진지한데.
애 취급하는 건 내가 아니라 로아드네스였다.
나는 적어도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괜히 억울해져 입이 나오려 했다.
“로안. 그런데 빅토르 님에게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마. 우리를 도와주고 있잖아, 사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
“내 말은, 그저 서운해하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라는 거야. 사람이 단순하고 착해서 그렇게만 해줘도 너를 더 좋아할 거야.”
“…….”
“네가 정말로 황위 경쟁을 하겠다면, 빅토르 님을 통해 엘라콘과의 관계도…… 로안?”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나는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여전히 다리를 꼬고 기대앉은 로아드네스가 아예 팔짱까지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듣고 있어?”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조각상처럼 있길래 어디가 아픈가 싶어서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대답 없는 그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아드네스가 내 손을 턱 잡아채더니,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
아프진 않았지만, 너무 순식간이라 깜짝 놀랐다.
나는 눈 깜빡할 새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로안, 도대체…….”
로아드네스는 그대로 내 뒤통수를 끌어당겨 다시 입술을 삼켰다.
아까는 다급했지만 꽤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는데.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이 거칠고 충동적인 입맞춤이었다.
“자극하지 말라니까.”
“내가 언제 자극을…….”
“나랑 있으면서 다른 놈 이름이나 부르잖아.”
내 입가에 흩어졌던 뜨거운 숨결이 다시 거침없이 내 속을 헤집고, 깍지를 끼고 있던 손 하나는 어느새 내 허리를 휘감았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하루 만에 천하제일의 난봉꾼처럼 움직이는 그 덕분에 나는 단번에 흐물흐물해져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내 귀를 사정없이 후벼파고, 어느새 걸터앉아 있던 자세는 그를 마주 보고 단단한 허리에 안쪽 허벅다리를 감고 있었다.
꿈틀대는 그의 허벅지 근육이며, 묵직하게 치솟은 바지춤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자극적이었다.
말려 올라간 드레스 자락을 따라,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거침없이 침범해 살결을 쓰다듬었다.
“내가, 이럴까 봐.”
으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씹어 뱉어져 나왔다.
“자극하지 말라고 했는데.”
“로안.”
“너는 네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원망 섞인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축축한 입술이 내 귓바퀴를 잘근 깨물었다.
날것의 욕망이 아침까지 이어졌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 등골을 저릿하게 만들어버렸다.
로아드네스의 뜨거운 손이 거침없이 남들은 볼 수 없는 구간을 더듬다가 단추가 끝까지 잠긴 등으로 향했다.
“로안!”
‘시커먼 사내놈들이 지천인 여기서, 조금이라도 너를 상상할 여지를 주게 된다면…….’
그의 망측한 상상이 섬광처럼 내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뜨거운 입술이 내 귓가에 더 진득하게 달라붙더니 척추가 찌릿해 몸을 세울 만큼 살을 씹기 시작했다.
뒤늦게 자그마한 반항을 시작하는 나를 그는 아주 손쉽게 제압했다.
“……늦었어.”
지독하게 낮아진 목소리가 그가 씹고 있던 내 귓바퀴에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그에게서 얻은 흔적을 감춰주었던 뒷덜미의 가장 윗단추가 툭, 끌러졌다.
순식간에 목덜미가 허전해졌다.
“네가, 네가 말했잖아. 로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툭.
두 번째 단추마저 풀어졌다.
나는 절벽에서 추락하듯 선득한 기분에 그의 목을 꼭 껴안으며 낮게 외쳤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게 싫다고…….”
“호위들은 꽤 멀리 있는데.”
툭.
세 번째 단추가 풀렸다.
날갯죽지가 순식간에 서늘한 공기에 노출되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네가, 분명 그랬잖아. 나, 나 네가 움직일 때마다 절대 소리 안 참을 거야!”
툭.
단단히 채워둔 마지막 단추마저 풀리자 냉기가 등골을 휘저었다. 이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참지 마, 그럼.”
곧장 그의 뜨거운 손이 드러난 피부를 헤집었다.
내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잘근잘근 씹어대던 귓바퀴가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입술이 빈틈없이 붙들렸다.
몸을 터트릴 듯 당겨 안은 로아드네스의 다른 손이 자연스레 제 허리를 감고 있던 내 다리를 타고 드레스 속으로 뱀처럼 기어들어 왔다.
“다른 놈들은 절대 못 듣게…….”
그가 닿는 모든 곳이 절절 끓는 듯 뜨거워졌다.
점점 흐려지는 내 얼굴을 황홀한 듯 보고 있던 로아드네스는 제법 아프게 물어뜯고 삼키기를 반복하던 입술을 잠시 놓고 속삭였다.
“네 소리까지 다 삼켜버릴 테니까.”
그 음성을 마지막으로, 그는 아주 격렬하고 대범하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게 나를 탐했다.
“참지 마.”
입을 꼭 틀어막고 있는 내 두 손을 치우는 손은 퍽 무례하기까지 했다.
그래놓고 숨이 차오르다 못해 꼴딱 넘어갈 만큼 흩어져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참지 마, 나를 믿어.”
욕망에 휩싸인 음성을 끝으로,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이 내 불규칙한 날숨을 집어삼켰다.
무도한 정복자는 내 목을 긁으며 나오는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빼앗아버렸다.
시커멓고 뜨거운 늪 속으로 끝없이 빠지는 것 같은 황홀경이 온몸을 터트릴 듯 몇 번이고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
“피곤해 보여, 좀 쉬어.”
새벽 내내 한 번도 침대에 눕히지 않고, 앉은 채로 나를 탐한 사람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로아드네스는 자신했던 대로, 내게 한 줌의 소리도 허락하지 않고 제 입술로 막아냈다.
그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집요했다.
날이 서서히 밝아져 커튼 새로 빛이 스며들수록 흥분해 몰입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아랫배가 바짝 당겨지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로아드네스는 완전히 새벽이 되어서야, 온몸에 제 흔적으로 빼곡한 나를 보고 반성을 시작했다.
그는 나를 이불에 소중하게 꽁꽁 싸매놓고 자고 있던 요나를 깨워 옷을 한 벌 가져왔다.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물수건까지 만들어와 지쳐서 꼼짝도 못 하던 내 몸을 조용히 닦아주었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첫날밤처럼 직접 옷시중까지 들겠다며 빤히 보고 있지는 않았고, 잠깐 나가있으라는 말에 군말 없이 나가있다가 단추를 채워 달라고 하자 그제야 마차로 다시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찝찝해. 씻고 싶어. 넌 좋겠다. 아침에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밖에서 씻을 수 있어서.”
“……내가 깨끗하게 해줄까?”
말을 말아야지.
내 눈에 비친 불신의 빛을 본 로아드네스가 조금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지 마. 입으로가 아니라, 네가 어제 씻었던 호수에 데려가 씻겨줄까 하는 의미였으니까.”
입으로?
호수에 데려가 씻겨줘?
둘 다 지나치게 음탕한 생각이었다.
저 반짝이는 금빛 머리통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찬 걸까.
언제나 내 예상보다 크게 한 발 더 나아가는 그에게 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내저었다.
“엘라콘에 가면 큰 욕탕에서 씻을래.”
“욕탕?”
팔짱을 끼고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혼자 씻을 거야.”
“너는 엘라콘에서도 귀한 손님인데 시중들 사람은 있어야지.”
“그게 너는 아닐 거야.”
“……들켰네.”
그리 말하면서도 그는 전혀 아차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길쭉하고 시원하게 트인 눈이 사르르 접혔다.
나른한 미소와 함께 눈가를 붉히는 그의 얼굴은 왜 그가 론타 최고의 탕아로 불리는지 알 만한 절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