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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20화 (120/171)

120화. 대주술사

엘라콘 국경을 넘는다고 해서 수도인 벨로스터까지 금방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론타의 수도에서 국경 근처까지 오는 데엔 금방이었지만 벨로스터까지는 며칠을 꼬박 말을 달려야만 했다.

나와 로아드네스, 에페로와 빅토르는 여행길에 오른 지 며칠 만에 한 마차에 타게 되었다.

“멀지 않다. 대주술사의 행적은.”

“수도 부근에서 남하한다 했으니 왕께서는 남쪽으로, 우리는 북쪽으로 몰면서 올라가면 맞닥뜨릴 거예요.”

“사냥하는 것도 아니고, 번거롭게 하는군.”

엘라콘은 험준한 산과 미로 같은 숲으로 유명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있는 남부는 산을 오르며 찾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다들 안도했다.

“왕께서 붙잡아두고 계신다지 않았나요?”

“붙잡아둔다고 가만 있을 위인이면 애초에 찾아야 할 필요도 없었겠죠.”

에페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는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로아드네스 쪽을 보았다.

그는 마차 보조 테이블 위에 지도를 올려놓곤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었다.

“나오나. 저리 보면?”

“형님은 천재니까 뭐든 너보단 낫겠지.”

“똑똑하다. 나도.”

“퍽이나. 근육 만드는 것만큼 책을 읽었어도, 너는 아카데미 중간도 못 갔을걸.”

“하지 마. 무시.”

“할 만하니까 하지.”

나는 틈만 나면 다투는 에페로와 빅토르를 힐끔대며, 빅토르가 언젠가 저 빨간 머리통을 한 대 후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차 멈춰.”

“그러게 평소에 책을…… 예? 형님?”

“마차 멈춰.”

로아드네스의 명령에 에페로는 군말 없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마차를 멈추라 소리쳤다.

로아드네스는 지도를 들어 창문 너머와 번갈아 응시했다.

“여기부터 수색한다.”

로아드네스의 단호한 목소리에, 에페로는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마차 문을 열어젖히고 나섰다.

휑하니 열린 문밖으로, 바오밥나무가 우거진 숲이 나왔다.

남다른 높이와 굵기를 자랑하는 나무들에 압도당해 잠시 멈칫했던 나는, 모두가 내리고서야 한 발짝 나섰다.

“아. 공주님은 여기 계시고.”

“뭐?”

“여기 계시라고, 공주님은. 하인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로아드네스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에페로와 빅토르가 있었다.

눈앞에서 육중한 마차 문이 탁, 하고 닫혔다.

뒤늦게 소름이 돋아나 씩씩대며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로아드네스의 상체가 쑥 밀고 들어왔다.

“여기 공주님의 시종장에게 입 맞춰주면, 단번에 찾아드릴 수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건방진 시종장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 너 그 공주님 소리는 또 뭐야. 남들 앞에서 공주님의 공이라도 내 귀에 들리면…….”

“걱정 마, 공주님. 우리가 주종관계라는 건 비밀이니까. 근데 비밀 지키려면 값을 치러줘야지.”

“차라리 내가 찾을게. 나와 어서.”

“저렇게 험한 숲에, 어떻게 이 작고 소중하고 귀여운 공주님을 내보내란 말이야?”

아.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색하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여상히 말하는 얼굴은 반쯤 장난기가 어려 있었고, 일렁이는 눈은 핥으면 혀가 저릿해질 만큼 진득한 꿀이 뚝뚝 흘러넘쳤다.

“체력을 아껴둬, 공주님. 오늘 밤은 왕자님이 못 참겠다고 전해달랬으니까.”

겨우 며칠 밤을 함께하지 않았을 뿐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둘만 남으면 머리통이든 이마든, 식사를 하는 입이든 닥치는 대로 입술을 붙여오는 통에 곤욕스러웠던 참이었고.

“……그래? 그럼 왕자한테 전해줄래? 오늘 안에 그 망할 대주술사 못 찾아오면 여행 내내 털끝 하나 닿지 말아 달라고.”

한참 미련 가득한 눈으로 내 입술을 덧그리던 시선이 곧장 해야 할 일을 향해 나아갔다.

그 뒤로 선발대를 기다릴 인원들이 짐을 풀기 시작하는데, 마차 밖에 있던 요나가 충격이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게 틀림없어 보였다.

“아 이런 젠장. 내가 방금 ‘망할’이라 그랬니?”

“네.”

“맙소사 방금은 또 ‘젠장’이라 그랬잖아!”

“마님, 그거 아세요?”

자괴감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는 내게 요나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미 2황자 전하께 많이 물드신 것 같아요.”

이런 젠장!

***

선발대가 숲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가 지기도 전에 누군가 사냥을 한 흔적을 찾아내더니, 해질 무렵에는 거대한 바오밥 나무숲 한가운데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오두막 하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선발대가 붉은빛을 쏘아 올리자 대기하고 있던 나와 남은 호위들이 그쪽으로 향했다.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을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렸기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아무리 최고급 마차라 해도 나는 멀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던 로아드네스의 손을 꽉 부여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빨간 지붕의 오두막은 정말이지 뜬금없이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대충 쳐놓은 나무 울타리를 따라 반딧불이를 넣어둔 유리등이 타닥타닥 타면서 빛을 내고 있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섬뜩하고 기괴한 구석이 있었다.

울타리 밖에서 키가 낮은 나무 대문을 열자 삐걱 소리와 함께 유리등에 갇혀 있던 반딧불이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공중에 떠올랐다.

다들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는데, 빛이 오두막 입구를 향해 날아가 그 앞을 밝히자 문이 열렸다.

“누구냐, 이 밤에 여기까지 온 게.”

여인도, 사내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

키가 작달막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젊은 여인이 등장했다.

양 갈래로 두껍게 땋아 내린 은빛 머리카락은 조금 빛이 바랬는데, 아래를 상아를 깎아 만든 해골 모양장식으로 장식해 어딘가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언뜻 보면 대신전의 신관 같은 복장이지만, 빛이 지나는 자리마다 자줏빛 보석들이 번쩍여 밤중에 보아도 화려했다.

색상 조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한 노란 속치마도 황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풀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은 복장이었지만 여인의 행색이 기이해서일까 묘하게 밤과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로아드네스의 손을 놓고 겨우 허리를 곧게 펴고 선 나를 보자마자 나오던 걸음을 뚝 멈추어 섰다.

“오, 신이시여…….”

그 한마디가 그녀의 첫 감상이었다.

***

작은 오두막에 비해 턱없이 넓은 뒤뜰은 행렬의 야영지가 되었다.

그들을 통솔하러 간 에페로와 빅토르를 제외하고 나와 로아드네스만 오두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가 통통한 손 몇 번을 휘두르자 찻잔이며 다과가 작은 테이블에 저절로 세팅되었다.

나는 저 혼자 빙글빙글 돌며 찻물을 휘젓고 있는 티스푼을 눈이 튀어나올 만큼 쳐다보았다.

“반응이 꽤 귀엽네.”

중성적인 목소리가 심드렁하니 감상을 펼쳐놓았다.

“왕이 꼭 만나고 가라던 사람들이 맞나보군. 왕가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어. 밖에 있는 분홍 머리는 어릴 적에 내가 좀 골려주던 전적이 있어 기억도 나고.”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라,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왔습니다.”

“솔직히 내 여행에 방해되긴 하지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네. 이렇게 잘생긴 사내랑 마주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보기 좋아. 계속해 봐.”

“당신 보라고 있는 얼굴은 아닌데.”

나는 삐딱하게 대답하는 로아드네스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물론 지나치게 단단한 덕에 내 손만 아팠다.

“꽤 앙칼진 미남이네. 나는 가시 돋친 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나가 봐, 로안. 난 괜찮으니까.”

“저 여자를 뭘 믿고.”

팔짱을 끼고 우리가 아웅다웅하던 것을 지켜보던 대주술사가 피식 웃었다.

“그럼 난 당신들을 뭘 믿고 도와주지?”

대주술사는 다 휘저어놓은 찻잔을 술처럼 마시고 입가를 훔쳤다.

“도움을 청하려면 걸맞은 예의를 보여야지.”

“죄송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아…… 블리에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론타의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내내, 대주술사는 뭐가 그리 웃긴지 피식피식 웃었다.

“나는 롯시. 누구는 나를 대주술사라 하고 누구는 날 대마녀라고도 하지. 뭘 원하지?”

나는 롯시의 마음이 변할까 봐 얼른 준비해뒀던 약의 목록을 보여주었다.

롯시는 그것을 보자마자 한참을 침묵했다.

“그 약초들이 들어간 약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엘라콘의 수많은 의사들과 주술사들이 오직 롯시 님만이 그 약에 대해 아실 거라 했다더군요.”

“이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약도. 아무나 먹게 해서도 안 되는 약이야. 나 역시 딱 한 번밖에 만들어보지 않았고, 지금은 내 손에 없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허벅지를 꼬집힌 채 얌전히 있던 로아드네스가 내 손을 꽉 붙잡아주었다.

“살아 있는 죽음의 약.”

웃음기를 지운 입술이 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죽음의 약, 그 약을 나는 그리 불러.”

“그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산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지. 일시적으로 몸속의 체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아 입이나 코로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수 시간 동안 온몸으로 숨을 쉬게 해.”

비밀이 풀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몸속에 있던 독이나 안 좋은 기운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 하지만 대단히 위험해서, 그 약을 먹고 살아남으려면 건강한 몸보단 지속적으로 독에 당했던 사람이어야만 해. 몸이 회복되는 동안 버텨줄 체력도 필요하고.”

로아드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게서 그 약의 향기가 진동하는군.”

“!”

“지독한 독에, 아주 오래 당했었나 봐. 살아 있는 죽음의 약은 먹은 사람이 독에 중독된 것만큼 발현되거든.”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적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어지자 더 그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에는 보여. 너는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회복된 흔적이 있군. 누군가 네게 독을 마시게 한 게 아니라, 꽃이나 향에 넣어 지속적으로 숨통을 조이게 한 거야.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로아드네스에게 잡힌 손을 부들부들 떨던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 그리고 향기.

몸에 좋은 것이라며 항상 피워두었던 지독한 허브향.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그 향에 코를 적시며 하루를 시작했고, 잠들기 직전까지 그 향을 맡으며 잠자리에 들었었다.

“별로 그래 보이진 않은데, 원한을 많이 사고 다니는 스타일인가 봐?”

“…….”

“자, 원하는 답을 해줬으니 이제 나도 원하는 걸 말해볼까?”

“뭐?”

대답은 로아드네스에게서 나왔지만 롯시의 시선은 얼어붙은 내게 박혀 있었다.

“하나에는 하나가. 세상사 모든 것은 주고받는 것이 기본이지.”

그때였다.

앉을 때부터 삐걱거리던 나무 의자가 흔들거리더니, 곧장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듯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롯시의 옆으로 나를 데려갔다.

로아드네스가 벌떡 일어나 롯시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해보실까.”

하지만 롯시의 통통한 손은 이미 내 멱살을 잡고 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긴 상태였다.

“그 얼굴을 한 블리에란 아이는, 내 제자였거든. 아가씨.”

소용돌이치는 적회색 시선이 흔들리는 내 눈을 화살처럼 꿰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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