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올리비아 루치아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코앞에서 장검이 휘둘러졌다.
로아드네스는 롯시가 그러잡고 있던 내 앞섶을 잘라내고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롯시가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을 꽤 잘하더군. 블리에를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내게 감히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롯시의 손안에 남은 내 옷 조각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블리에 아카시아가…… 당신의 제자였다고요?”
“블리에, 아카시아? 그새 귀여운 성까지 붙이고 다녔네. 그 애는 그리 귀여운 타입은 아닌데.”
이미 미소가 사라진 롯시의 얼굴이 로아드네스의 등으로 가려졌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하지.”
로아드네스가 나를 제 뒤에 숨기고 경고했다.
“블리에 그 발칙한 것이 홀연히 떠나기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나는 조용히 로아드네스의 뒤에서 벗어나 롯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자신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 온다면…….”
롯시가 그때를 떠올리는지 눈썹을 순간 꿈틀, 했다.
“그땐 저가 죽었을 때뿐이라고.”
“!”
“죽었는데, 어떻게 돌아온다는 건지……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귀여운 금발 아가씨. 당신을 보니 알겠어.”
“블리에가 그런 말도…… 했다고요.”
“이제 알아듣겠지?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가씨야.”
탁!
탁, 탁! 탁!
열려 있던 창문이며 현관문이 저절로 닫혔다. 롯시가 미끄러지듯이 내 앞에 다가왔다.
“블리에,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지?”
“관 속에요.”
나는 떨리는 몸을 감싸 안고 답했다.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관 속에, 저 대신 블리에를 밀어 넣고 오는 길이에요.”
롯시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혼란스러운 빛을 띠는 눈은 대번에 분노를 머금었다.
“하지만 살아 있죠.”
“뭐라고?”
분노가 애매하게 흩어져버린 눈은 이제 의심의 빛을 쏘아냈다.
“저는 블리에 아카시아가 아니라, 론타의 동부 피레타 영지의 공녀. 아드리엔 피레타예요.”
“……피레타.”
미묘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제가 블리에로서 살아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시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내가 왜?”
나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곧게 세워 턱을 들었다.
“하나에는 하나.”
“허?”
“롯시님의 방식을 따르겠어요. 듣고 싶으시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
대치상태인 우리 사이에, 로아드네스가 심판처럼 서서 언제든 롯시를 베어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나는 블리에로 눈을 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1000년은 넘게 살았다는 전설이 헛소문만은 아닌지,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미동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런 오두막에서 듣기엔 스케일이 큰 이야기로군. 그래서, 내가 뭘 도울 수 있지?”
“방금 말씀드린 마나석 관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나는 어머니의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이 목걸이에 들어 있는 조약돌만 한 마나석이 어째서 마나석 관의 열쇠가 될 수 있는지. 된다면 왜 다른 사람들 손에선 열리지 않고 저만 열 수 있는지. 롯시님이라면 답변해주실 수 있겠죠.”
“…….”
롯시는 말없이 내 목걸이를 가져갔다. 그리고 열어보지도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나석 광산에 가본 적 있나?”
“아니요.”
“마나석은 바위처럼 거대한 덩어리가 원석이야. 아주 먼 옛날, 지금은 주술이라 불리는 힘이 당당하게 마법이라 불리던 시절. 고대 왕족의 관은 다 그 마나석으로 만들었어. 밖에서 물리적인 힘으로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같은 마나석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경계를 푸는 특징을 이용해 관과 열쇠로 만들었지.”
롯시는 옛날을 떠올리는 듯 눈이 가늘어졌다.
“거기까지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고. 열쇠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그 열쇠는 죽은 자가 아바델리아에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영생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그 손에 쥐여 주거나 보물들과 함께 관 속에 담겼어. 밖에서는 아무도 열지 말라는 뜻이지. 다른 사람의 손에서 열리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마력을 가졌던 고대 왕족들은 죽기 전에 자신의 관이 될 원석에 자신의 마력을 미리 담거든. 그러니 마력이 담긴 마나석은 같은 마력이 담긴 관과 열쇠, 그리고 마력의 주인에게만 반응해.”
“그럼 그 마나석 관을 구한 것도, 마력을 담은 것도 블리에가 이렇게 될 줄 알고 꾸민 것일까요? 블리에에게 마력이 있단 뜻인가요?”
“몰랐어? 그 앤 마력이 있었어. 그러니 날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지. 하지만 아무리 관과 열쇠의 원석이 같아도, 마력을 담았다면 그 마력의 주인에만 반응하기 때문에 아가씨가 그 관을 열 수 있었던 이유가 되진 않아. 마력은 진정한 주인을 찾아 반응하는 것이니까. 블리에의 몸에 당신이 들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리 없지.”
“어쨌든 블리에가 저를 살리기 위해 무언가를 꾸민 건 확실해 보이는데요. 어째서 마력도 없는 제게 그 관과 열쇠가 반응했는지는 몰라도요.”
블리에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날 살리려고 기획한 것이라 가정해야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의문점이 해소된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다.
“앉고 싶으면 앉아. 아가씨 반응을 보니 어쨌든 가만히 있는 블리에를 아가씨가 죽여서 관속에 넣은 게 아니란 건 알겠어.”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건 롯시 역시 마찬가지인지, 의자 하나가 그녀의 다리 뒤로 스멀스멀 미끄러져 왔다.
“그래서, 지금 아가씨의 몸은 아주 건강해졌다는 건가?”
“검진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더는 아프지 않아요. 약하다는 느낌도 없고요.”
“살아 있는 죽음의 약을 아가씨가 먹은 시기는 언제지?”
“제일 가능성이 큰 건, 죽기 직전에 가문의 주치의가 삼키라고 건넨 약이에요. 평소보다 유달리 커서 삼키기도 힘든 약이었는데…….”
“그거겠네. 블리에가 내 약을 훔쳐 간 게 확실하다면 그 약이 맞아. 무식하게 크게 만들긴 했었지.”
“하지만 주치의와 블리에는 관련이 없어요.”
“그야 아가씨가 찾아볼 일이고. 만약 블리에가 당신에게 그 약을 먹이려 한 거라면 당신이 가장 약해졌을 때, 즉 죽기 직전에 먹이는 게 최선이야.”
롯시는 심란한 표정으로 식어 빠진 찻물을 들이켰다. 나 역시 입안이 바짝 말라갔기에 그녀를 따라 찻물을 마셨다. 형편없이 떫은 차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블리에는 왜 그랬을까요?”
“…….”
“블리에는 어째서 저를 살렸을까요? 그보다, 제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진실을 보여주려 한 이유는 뭘까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에 대해 수많은 감정을 느껴왔지만, 이제는 다 소용없게 느껴져요. 저는 이제 진심으로 그녀에 대해 알고 싶고, 그녀를 깨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롯시는 끔찍하게 떫은 차를 깨끗이 비우고는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몇 년을 그 애와 함께했지만.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지. 그 애는 항상 비밀이 많았어. 인정해야겠네. 아가씨를 도울 수밖에 없겠어. 이래 봬도 나는 학자 타입이라 궁금한 건 못 참거든.”
우리는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눈을 마주했다. 분노가 스몄던 롯시의 눈은 이제 흥미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롯시가 굳게 닫아놓았던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로아드네스가 롯시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전하! 부인을 찾는 이가 찾아왔습니다!”
“뭐?”
한밤중에. 이 거대한 바오밥 나무숲으로. 블리에를 찾는 사람이 왔단 말이다.
로아드네스와 나는 동시에 얼어붙어서 시선을 교환했다.
“누구라더냐?”
“밝히면 도망갈까 봐, 밝히지 않겠답니다. 여인입니다.”
“……올리비아 루치아.”
로아드네스가 대번에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내 머리에도 섬광처럼 스쳤던 이름이었다.
“아가씨를 찾는 게 아니라, 블리에를 찾는 거라면 나 역시 만나보고 싶은데.”
롯시가 굳어 있는 우리에게 여인의 동석을 허락했다.
로아드네스가 내게 괜찮겠냐는 듯 시선을 던졌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에 이 험한 곳까지 왔을 정도면, 그만큼 다급하다는 뜻이었고, 그런 다급한 사람에게 정보를 얻기란 쉬울 테니까.
***
로아드네스의 허락을 받은 닐이 오두막 문을 열어젖혔다.
오두막 앞은 뒤늦게 도착한 무리로 인산인해였다.
호위를 맡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이 밤중에 으스스한 숲에 왔다며 구시렁거리다가, 검은 인영이 고개를 돌리자 금세 입을 다물었다.
인영은 롯시만큼이나 자그마했다.
닐이 몸을 물리자 검은 인영이 서서히 문 앞으로 다가왔다.
“블리에 님……?”
잿빛과 갈색이 섞인 쪽진 머리. 노쇠했지만 주름이 많지 않은 얼굴. 다소 구부정한 자세의 비쩍 마른 여자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
나는 여자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뒷걸음질 쳤다.
“블리에…….”
대답 없는 나를 애타게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오, 맙소사!”
툭. 하고 떨어진 나무 지팡이가 오두막 바닥을 구르고, 여자의 눈이 시뻘게졌다.
올리비아 루치아.
그녀는 나를 길러준 내 유모가 맞았다.
“맙소사. 맙소사. 오, 신이시여…….”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늘어진 눈꺼풀을 치켜떴다. 시커먼 동공이 커질 대로 커져 그녀가 숨을 몰아쉬지 않았다면 선 채로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공녀님?”
올리비아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
“공녀, 공녀님? 아드리엔 님? 맞아요? 아드리엔 아가씨가! 아드리엔 아가씨가……!”
그녀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허둥대더니 곧이어 눈물을 주르륵 떨궜다.
어느새 블리에를 찾아왔다는 목적을 머릿속에서 새카맣게 태운 듯. 그녀는 로아드네스에게 기대선 내 손을 망설임 없이 꼭 붙들었다.
“공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세요? 이 유모는 돌아가신 우리 마님이 불쌍하고, 늘 아프기만 했던 공녀님이 불쌍해 100일 내내 울고 또 울다가 실신하길 반복했다고요!”
“……유모.”
유모라는 한 마디에, 올리비아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더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따위의 질문은 소용없었다.
“블리에, 블리에 님은 만나보셨나요?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나 역시 혼란과 슬픔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모. 유모가 블리에를 어떻게 알아?”
“마님께서 아바델리아에서 공녀님을 보살펴주신 게 분명해요!”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게 먼저야, 올리브.”
주저앉아버린 그녀를 따라 나는 무릎으로 앉아 그녀의 양어깨를 그러쥐었다.
정신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내 어머니를 찾던 유모는 내 기세에 잠시 놀란 듯 입을 벙긋거렸다.
“블리에 님은, 아니.”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블리에 아가씨는…….”
동시에, 억눌렸던 설움을 토해내는 얼굴이 내게 간절히 호소하듯 일그러졌다.
“……공녀님의 쌍둥이 언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올리비아가 단전에서 꾹꾹 누르고 있던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