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블리에가 빼앗은 것
“그리고 아가씨의 몸이 건강해진 건, 아가씨 몸이 그 마나석 관에 있던 블리에의 마력을 흡수했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겠고. 있어야 했던 게 돌아왔으니 당연한 수순이야.”
한참 말을 이어가던 롯시의 시선은 이제 연신 울음을 삼키고 있는 올리비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당신. 갑자기 블리에를 찾아 엘라콘까지 온 이유는 뭐지? 가출한 이후로는 둘이 만난 적도 없잖아.”
“저는 늘 블리에 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다만 몸이 아파 엘라콘까지 직접 오는 게 힘들기도 했고 블리에 님이 만나길 원치 않았으니 참았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호위를 몇 십이나 끌고 이 숲까지 왔냐고. 내 위치를 알려줄 만한 고급 정보를 샀다면 돈깨나 썼을 텐데.”
롯시의 날카로운 지적에 올리비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오두막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의 떨리는 입술로 향했을 무렵, 정적을 이기지 못한 올리비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드리엔의 죽음은 평화롭던 피레타 영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소식을 들은 피레타 공작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노쇠했던 그는 아드리엔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날 이후 줄곧 자리를 보전했다.
사용인들 모두가 ‘공작께서 티는 안 내셔도, 공녀님을 사랑하셨던 게 분명하다.’라고 생각할 만큼 유난이었다.
사용인들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공작은 아드리엔을 구박하거나 혼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다정한 말을 건네는 아비는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공녀의 오라비인 피레타 소공작과 그 부인인 비앙카가 어릴 적부터 아드리엔의 보호자를 자처했으며, 유모 올리비아의 비호 아래 아드리엔이 구김살 없이 커왔다는 점이었다.
피레타 공작은 아들인 그레고리라고 해서 마냥 살갑게 구는 위인도 아니었으니 편애하는 것이라 보기엔 힘들었다.
사용인들은 자식보다 아내를 사랑했던 공작이 일찍이 아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공작부인을 데려오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 여겼다.
귀족 사내들의 사랑이란 가볍기 그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올리비아 역시, 공작이 자식을 ‘조금쯤은’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올리비아는 헬레네의 죽음과 블리에 사건 이후, 늘 공작을 증오해왔지만 아드리엔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 증오마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만에 찾아간 공작이 한 말은 올리비아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애…….”
“예?”
“그, 애 있잖나.”
늦은 밤. 공작의 약을 챙겨주러 갔던 날.
공작은 시름시름 앓으면서 블리에를 찾았다.
“그 애를 살려뒀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
올리비아는 떨리는 손으로 가져왔던 약그릇을 내려놓고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애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드리엔을 대신해서…….”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지만, 올리비아는 ‘그’ 공작이 처음으로 제 딸을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려두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전제로 찾았다는 것에 환희를 느꼈다.
어쩌면 블리에가 공작의 딸로서 인정받고. 죽은 아드리엔처럼 당당한 피레타의 장녀이자 공녀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블리에 역시 힘들었던 지난날은 다 잊고 엘라콘이 아닌, 이 론타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각하. 첫째 아가씨가 살아계셨다면 좋으시겠어요?”
“그래. 내가 왜 그 아이를 버리라 했는지. 생각이…… 짧았어.”
올리비아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일지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드리엔이 죽은 건 분명 슬픈 일이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아드리엔은 늘 몸이 약했으니 오래 살지 못했으리라 짐작했었다. 헬레네가 그랬듯 말이다.
그러니 오랜 기간 외면 받아온 블리에가 행복해지는 것만이 이제 올리비아의 유일한 삶의 이유가 되고 만 것이다.
“각하. 제가 사실…….”
그래서 블리에를 불러들이려 했다. 20년 넘게 홀로 꽁꽁 감춰두었던 비밀을 말하자 공작은 그날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블리에를 찾아오라. 그 애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 아드리엔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주겠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올리비아는 그가 지원해준 돈으로 블리에를 수소문했다.
황태자의 죽음으로 공작은 또 쓰러지긴 했지만 말이다.
***
“죄송해요, 아가씨. 못난 유모의 탓이에요. 아가씨가 이렇게 살아계신 줄 알았다면 아가씨를 챙겼을 텐데.”
회한이 듬뿍 묻은 얼굴을 한 유모는 이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유모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아니야. 유모는 항상 내게 진심이었잖아. 내가 어머니 없이도 한 번도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던 건 유모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어.”
오히려 나는 올리비아가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블리에가 그리워서, 자신의 선택을 진심으로 후회해서 딸을 찾은 게 아니야.’
올리비아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진 않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아버지가 쓰러졌던 이유는 분명 황태자와의 굳건한 동맹의 상징인 내가 죽었기 때문이고. 그 황태자마저 죽어버려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죽기 전에 블리에를 찾았던 이유 역시. 쌍둥이인 그녀가 나를 대신해 내 행세를 하며 대공비가 되고 나아가 황태자의 정부가 되어 그의 아이를 낳길 바랐겠지.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는 전제를 두자 올리비아가 말하는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기분은 저조했지만 답답하던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올리비아. 놀라지 말고 들어.”
나는 올리비아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롯시에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아주 간략하지만 굵직한 상황들.
그리고 나아가 이 일의 배후에 아버지 역시도 있었으며 그가 블리에를 찾는 이유는 아마 나를 대신해 황태자의 정부가 되어주길 바랐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마저도 황태자가 죽어버렸으니 병이 나서 몸져눕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으리라고.
“그럴 수가!”
올리비아는 지팡이를 짚는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거친 목소리였는지, 밖에 있던 닐이 잠시 들어와서 상황을 살폈다가 나갈 정도였다.
“맙소사. 이럴 수가. 그 늙은 영감이! 그 망할 노인네가 공녀님이 돌아가셨다고 바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올리비아, 자책하지 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저만은 알아봤어야 했어요! 젊은 시절부터 헬레네 님 말고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던 그 성정을! 그게 제 자식이라 해도 야망 때문에 금방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 핏덩이를 버리고, 죽이라 했을 때부터! 늘 원망하며 살았는데 어떻게 중요한 순간에 그 사람을 일반 사람들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했는지……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올리비아, 과거에 대한 후회는 다 부질없는 짓이야.”
한참 그녀를 달래던 내가 조금 엄숙하게 말했다. 올리비아는 곱게 쪽진 머리가 다 헝클어질 만큼 동요하다가 내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죄송, 죄송해요. 아가씨. 순간의 판단으로 제가 블리에 님을 또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는 생각에 그만……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과거에 대한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이 유모는 알고 있답니다. 그 누구보다 잘 알아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올리비아는 필요하다면 아버지의 목이라도 따올 수 있을 것 같은 눈으로 내게 물었다.
“일단은 계획을 세워보자. 너무 많은 진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바람에 마음이 너무 힘든 참이니까.”
밤이 깊었다.
달도 떠 있지 않은 어두컴컴한 밤.
불을 밝힌 오두막은 정원을 초과해 복작였지만 고요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블리에를 깨우고 싶다고 했지.”
조용히 있던 롯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블리에를 깨우는 건 간단해.”
그녀는 올리비아의 말까지 들은 뒤라 그런지 짐짓 적극적인 말투였다.
“네게로 옮겨간 그 애의 마력을. 그 애에게 다시 나누어주면 끝이지. 그럼 관도 다시 열리고, 블리에도 깨어나고.”
“하지만 저는 제 몸에 마력이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나요?”
“마력은 쉽게 인지되는 게 아니야. 나 역시 아가씨에게서 마력을 느끼지 못하겠는 걸. 마력의 주인이 각성하는 계기가 있어야지. 아가씨가 가지고 있는 손톱만 한 마나석 말고, 마나석 원석 덩어리라도 끌어안고 내 도움을 받아 수련하면, 가지고 있는 마력을 인지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것 정도는 금방 깨우칠 수 있어.”
롯시의 눈이 반짝이다 못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한 마나석을 구하는 게 문제지. 론타는 황제 직속으로 마나석을 관리하고 양도 터무니없이 적어. 엘라콘 역시 마나석 생산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관리하니까. 이거 원 도와줄 마음이 지금 아주 절실히 든 참인데!”
“마나석 원석만 있으면 되나요?”
“그럼. 그 정도는 되어야 네가 가진 마력을 날려버리지 않고 잘 전달하는 연습을 할 수 있지. 마나석이 아닌 타인의 몸에 전달하면 그 마력은 날아가 버리니까. 젠장 마나석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기는 게 진절머리가 나서 광산이 있다고 소문난 곳을 다 뒤지고 다니고 있었는데. 이놈의 마나석은…….”
“……제게 마나석 광산이 있어요.”
“뭐?”
롯시가 찢어진 눈을 살짝 치켜뜨고 끔뻑였다.
“제가 가진 아카시아 백작령에, 마나석 광산이 있다고 했어요. 에페로 황자가 분명 그런 말을 했어요.”
오늘 본 롯시의 얼굴 중 가장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롯시는 금세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으로 내게 바짝 다가왔다.
“가자. 아카시아 령이라면 엘라콘 국경 근처잖아. 남하하고 있을 왕께는 우리가 만났으니 함께 수도로 가겠다, 그러니 먼저 돌아가라 전달하면 돼.”
그 이후로는 놀라울 만치 속전속결이었다.
뒤뜰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던 인원들은 로아드네스의 명령에 따라 천막을 거둬들이고 다시 행렬을 정비했다.
모두가 오두막 근처에서 조금 멀어지자 롯시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빠각, 빠각 소리와 함께 오두막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롯시의 오두막 주위를 밝히던 반딧불이들이 행렬을 감싸고 점점 무리를 키우더니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우리를 안내했다.
로아드네스와 마차에 올라탄 나는 마차가 숲을 벗어나자 영혼이 빼앗긴 사람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내 몸과 내 영혼. 모두 다 알맞은 자리에 있는데도 내 것 같지 않은 감각이 깊은 바닷속에 잠겨버렸다.
“아드리엔.”
“…….”
“내게 기대.”
어둠과 빛이 교차해 들어오는 마차 안에서, 로아드네스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거대한 그림자와 따끈한 온기가 나를 데우자 나는 그제야 얼굴을 무너뜨렸다.
“나는 늘 블리에가 무서웠어.”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품에 기대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남편을 빼앗았고. 내 가족의 행복을 빼앗았고. 내 자리도 빼앗으려 했다고 생각했는데.”
“…….”
“그런데 내가 죽어서 빼앗긴 건……. 너라고 생각했던 노에비안.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던 황태자. 표현은 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했을 아버지야.”
“그렇네.”
“블리에가 빼앗은 건 죄다 진짜라 생각했던 가짜였어.”
비단 나뿐만이 아닐 테다. 내가 거짓된 것들을 빼앗김으로써, 날 감싸 안은 로아드네스까지 환상에서 벗어났으니까 말이다.
나만큼이나 급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진동과 따스함이 눈물을 부추겼다.
“블리에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불쌍한 아드리엔 피레타.’라는 말이 언제나 날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뭉그러져버린 머릿속에서부터 서러움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블리에가 내 언니라면. 만에 하나라도 그 애가 날 증오하거나 미워해서 그런 일기를 쓴 게 아니라면…….”
일그러지는 얼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 정말 내가 불쌍해서 도와준 거잖아. 정작 불쌍한 게 누군데…….”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와 서글픔이 이지를 쥐고 흔들었다.
“그게 나를 정말 화나고, 슬프게 만들어.”
딛고 있던 환상이 깨지고, 겨우 로아드네스를 붙들고 버티던 나는 결국 그 환상들의 잔해 위를 스스로 밟고서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조용히 응답하던 로아드네스의 입술이 서러움이 묻은 내 눈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눈물이 멈출 때까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