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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24화 (124/171)

124화. 광증

나는 아카시아 영지로 가는 내내 악몽을 꾸었다.

꿈에는 아버지가 나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어째서 블리에를 버렸느냐고. 아무리 소리치고 악을 써도 대답은 하나였다.

‘네가 말하는 그 블리에가 누구냐?’

그 대답에 아득함을 느끼면 나는 늘 눈가가 축축해진 상태로 꿈에서 빠져나왔다.

로아드네스의 어깨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깨면, 조용히 빛나고 있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매번 잠 한숨 자지 않고 나를 지킨 사람처럼 곧장 입술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거대한 온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악몽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울어도 돼, 아드리엔.”

로아드네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는 가는 내내 내게 울어도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울고 털어내버려.”

강한 팔에 감싸인 채 그런 말을 듣고 있노라면 문득 황태자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로아드네스가 떠올랐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로아드네스가 아닐까?’

로아드네스는 황태자의 배신과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내게만 매달렸다.

제 세상에 오직 나밖에 남지 않은 사람처럼 내게 닿지 못해 불안해했고.

“로안, 너도…….”

“전하.”

너도 울어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한참 달리던 마차가 잠시 느려지더니 닐이 창문으로 신문이며 가십지들을 불쑥 들여보냈다.

바르데날도가 죽고, 로아드네스는 필요하다면 황위 경쟁도 하겠다는 입장이었으니 늘 수도에서 전서구를 통해 받아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평소보다 늦은 전달이었고, 동시에 닐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기민한 로아드네스가 그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 신문이며 가십지 1면만 빠르게 살피던 로아드네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나는 차마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하고 힐끔 내용을 훔쳐보았다.

평소 같았다면 활짝 펼쳐 놓고 같이 읽기도 했었는데, 로아드네스가 어쩐지 혼자서만 읽으려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를 죽인 진범은 사실 2황자 전하가 아닐까?】

【황위에 욕심이 생긴 2황자가 요부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이용해 대공을 쳐냈나?】

【마물을 부르는 불길한 ‘2황자’가 수도를 떠나자마자 북쪽에서 날뛰기 시작하는 마물, 과연 우연인가?】

로아드네스가 황급히 읽어내리던 가십지를 덮었다. 그리고 일렁이는 붉은 눈이 내 눈과 정확히 마주했다.

“로안, 걱정 마. 난 저런 괴담 같은 거 믿지도 않아. 마물이 출몰하는 게 하루 이틀이야? 게다가 서부에 출몰했던 마물들은 노에비안이 수를 쓴 거였잖아. 지금 가는 길에는 마물은커녕 산짐승 한 마리도 안 지나다녔고.”

그러니 네가 마물을 부르는 사람일 리 없어.

줄줄 쏟아내는 변명에 가까운 위로에,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으아아아악! 마물! 마물이다!!”

마차 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역겨운 소문들을 읽어내리던 순간보다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훨씬 더 창백해졌다.

“절대. 나오지 마.”

“……로안?”

그가 내게 이토록 강력하게 말을 씹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아드네스는 절대 어기면 안 될 명령을 하듯 내 양어깨를 세게 그러쥐고 재차 말했다.

“절대 나오지 마, 아드리엔.”

어쩐지 간곡한 부탁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땅이 쿵. 쿵 울리기 시작하자 로아드네스가 번개처럼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

***

뜬금없는 마물의 출현은 아카시아 영지를 코앞에 두고 발생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마물에 사람들이 공포에 질렸다.

마물이 익숙한 2 기사단조차도 기가 질릴 만큼 거대한 마물이 대여섯 마리나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육중한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마물은 오물을 뒤집어쓴 털짐승 같은 모양새를 했다.

머리에 눈이 세 개나 달린 마물 중 한 마리가 점점 속도를 내며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달려왔다.

“에페로, 너는 여기서 마차를 지켜라.”

소란에 놀란 이들이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기 전에, 로아드네스가 올라탄 말을 달리더니 말 등을 밟고 쇄도했다.

뭐라 말릴 새도 없었다.

로아드네스는 짐마차에 손을 뻗은 마수의 손을 밟고 뛰어올라 그대로 세 개의 눈을 단번에 베어냈다.

“끄웨에에에에엑!”

“꺄아아악-!!”

고통에 찬 마물의 신음과 시종들의 비명이 교차로 숲길을 울렸다.

로아드네스를 뒤따라 말을 몰고 갔던 닐과 빅토르가 그 곁에 있던 마수를 함께 맡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로아드네스는 암벽을 타고 오르듯 방금 눈을 베어낸 마물의 등을 타고 올랐다. 더럽고 축축한 털을 그러쥐고 올라가는 내내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하! 전하!!”

꾸에에에에엑-!

눈을 감싸 쥐고 날뛰는 마물의 목이 단번에 로아드네스의 장검에 의해 잘려 나갔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피가 그대로 로아드네스에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마물의 피를 본 로아드네스의 적안이 산불처럼 타올랐다.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굳혀놓았다고 생각했던 심장에 다시금 피가 끓었다.

‘광증.’

목이 마르고, 심장이 끓는 듯한 느낌이 로아드네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검만 휘둘렀다.

장검을 쥔 손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웬만한 기사들은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들어하는 무겁고 대단한 무기였다.

“물러서십시오, 빅토르 왕자 저하!”

그 모습이 익숙한 닐이 마물에게서 고전하고 있던 빅토르를 끌고 물러났다.

“꾸에에엑!”

또 한 마리의 거대한 마물의 대가리가 일행의 앞에 툭! 떨궈졌다.

로아드네스의 검기가 지나는 자리마다, 마물의 대가리가 떨어지고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검마저 우아하게 휘두를 것 같던 2황자의 전투는 날 것의 무언가였다.

마물의 몸통을 기어오르고, 더러운 털에 몸을 비비고 쥐어뜯듯 잡아채 기필코 목을 베는 광경은 경이로움과 공포를 동시에 선사했다.

그러나 정작 마물과 싸우고 있는 로아드네스의 마음은 점점 지하에 처박히고 있었다.

그 역시 붉은 눈이 세상을 멸한다는 괴담을 터무니없다 생각했지만, 마물을 소탕할 때마다 자신에게 유독 공격적이었던 마물들을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물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 괴담이 정말 사실이 되어, 자신이 아주 조금이라도 이성을 잃는 순간 적이 아닌 아군을 베어버릴까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지금 가장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솟구치는 피를 응시하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아드리엔의 마차로 옮겨갔다.

‘나는 정말 불길한 놈이 아닌가?’

늘 바위처럼 짓누르던 질문이 가슴을 터트릴 듯 팽창했다.

자신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추문과 불길한 황자라는 일종의 저주 같은 꼬리표가 아드리엔에게 붙는다면?

장검을 그러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바르데날도에게 인생을 헌납하며 살았던 과거가 이토록 발목을 잡으니 저도 모르게 통탄할 지경이었다. 늘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아드리엔마저 그 버거운 삶에 끼워 넣는 것은 사절이었다.

주변의 소문들이 아드리엔의 마음을 흔들어 결국 아드리엔이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서워하거나 불길하다 생각한다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숨통이 틀어막히는 듯 아득했다.

어둑한 시선이 아드리엔이 있을 마차에 머물렀다 곧장 떨어졌다.

뒤늦게 몰려온 마물까지 총 20여 마리의 마물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호위를 맡은 2 기사단이 몰려가 서너 마리를 겨우 해치웠을 무렵 로아드네스가 해치운 마물들이었다.

검붉은 피가 늪처럼 질게 퍼져 있는 공간에서, 살육을 끝낸 로아드네스의 적안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살육이 끝나고, 자연스레 마차 밖으로 나온 아드리엔을 발견한 직후였다.

‘아드리엔이 봤다.’

바짝 조여졌던 동공이 맥없이 풀리고, 들끓던 심장의 피가 차게 식었다.

아. 봐버렸구나. 들어버렸구나.

발아래 낭자한 피처럼 붉은 적안을 빛내며 마물의 목을 베는 모습을. 경의를 표하던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소리까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우는 너를 안아주기 힘들 만큼 피로 절여진 모습을.’

로아드네스는 아연해지는 마음을 겨우겨우 붙들었다.

‘무언가를 잡아 죽이기 않고는 멈추지 않는 이 살육자의 눈을…….’

봐버렸구나.

로아드네스는 마물의 피로 절여진 손을 대충 옷에 닦아 내고, 급하게 재킷을 벗어 집어 던졌다.

하얀 부분이 하나도 없는 셔츠까지 벗어 얼굴을 닦았지만 겨우 붉은 기만 없앤 얼굴은 희미한 핏자국까지 지우진 못했다.

‘사랑하려 노력했단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너 같이 불길한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니.’

‘아드리엔 피레타도 네 눈을 봤다면, 절대로 사랑할 수 없었을걸.’

‘네가 그 불길한 황자라인 걸 알았다면 입은커녕 눈 한번 제대로 맞춰주지 않았을 거야.’

피를 닦아 낼 때마다 꾸역꾸역 눌러놓았던 바르데날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래, 그것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을 감추고 아드리엔과 교류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을 보며 두려워하기 바빴으니까.

평상시 그의 눈을 아름답다고 했던 사람은 아드리엔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피를 갈구하는 광증이 돋을 때 번뜩이는 눈은 그 누구도 감히 아름답다 하지 못했다.

그게 그의 어머니라 해도 말이다.

아드리엔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눈이다.

아드리엔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지친 기사단들이 마물의 시체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이미 피로 물든 셔츠로 자신의 얼굴을 필사적일 만큼 거칠게 닦아냈다.

“로안.”

“잠깐, 오지 마.”

아드리엔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가오자 그는 그녀를 등진 채 더 열심히 얼굴을 닦았다.

피부가 벗겨질 만큼 닦아내었을 때쯤 뒤에서 아드리엔의 기척이 들렸다. 로아드네스는 등줄기를 긴장시키고 그녀를 더 등지고 섰다.

“로안, 나를 봐.”

“저리 가, 아드리엔. 나 지금 피가 너무…….”

로아드네스는 결국 아드리엔을 마주하지 못하고 닐이 달려와 건네는 셔츠만 꿰어 입었다.

눈을 마주쳐서 좋을 게 없었다.

광증이 가라앉았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도 불을 켜놓은 듯 번뜩이는 눈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마물 수십 마리와 마주하는 것보다, 공포로 얼룩질 아드리엔의 눈을 보는 게 더 힘들었다.

“로안…….”

그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여럿 가까워졌다.

정신을 차린 로아드네스가 머뭇거리던 아드리엔을 제 뒤에 숨기고 앞으로 나서서 경계했다.

동시에 에페로와 빅토르가 더 앞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소리를 향해 검을 빼 들었다.

“마, 마물의 시체가……!”

생각보다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인영이 말에서 내려 중천에 뜬 태양을 등지고 달려왔다. 그 뒤로 병장기가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다가온 인영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아드리엔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하얗게 센 금발과 호박색 눈동자. 그리고 주름진 얼굴에 눈꼬리가 축 처진 눈.

아드리엔은 다소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단숨에 붕 띄워지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백작님?”

죽은 줄 알았던 아카시아 백작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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