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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26화 (126/171)

백작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다가 깊게 탄식했다.

“죽을 때가 다가오니 이런 경우도 겪는군요. 이 변방의 늙은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입니다, 부인. 어쨌든 블리에 님이 제 목숨을 살리신 건 맞습니다.”

“제가, 아니 블리에가요?”

“예. 유언장이 있다면 숨기라 했던 것도. 대공이나 황태자 전하께서 제가 거슬리는 순간부터 죽일 거라는 말을 해준 것도 블리에 님이십니다.”

“그럼 백작의 죽음은 처음부터 조작된 것인가요?”

“예, 그 사고가 일어난 마차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마차였습니다. 제가 탄 척하고 중간에 내렸지요. 저택이 워낙 작아 대공 전하의 첩자가 누군지 미리 알고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첩자와 대공 전하와의 연락이 잦아지는 걸 확인하고 당하기 전에 호위와 짜고 속였습니다.”

끝까지 백작의 시신을 찾지 못해 가슴 아팠던 순간.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아카시아 백작을 죽인 게 아니라 우기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노에비안이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백작을 죽이려 마음먹었을 때쯤 백작이 알아서 죽은 척한 것이지.

나는 진실의 무게에 짓눌린 듯 무거워진 눈을 느리게 한번 깜빡였다.

“어찌 되었건 대공이 백작님을 죽이려 한 건 맞다는 이야기로군요.”

“블리에 님께서는 황태자 전하나 대공께서 분명 마나석 광산을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지요. 어쩌면 블리에 님과 저를 결혼시킨 이유도 아내상속법을 이용해 대공께서 광산을 가지기 위해서라고요.”

손끝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후사도 없는 늙은이가 뭐 그리 대단한 유언을 남긴 것도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제가 죽으면 블리에 님이 아카시아 백작이 되고, 연인이신 대공께서는 블리에 님을 구슬려 광산을 얻고. 유언장을 조작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대공께선 워낙 일 처리가 확실하신 분이니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둘 거라고.”

역시.

노에비안이 단지 사랑만으로 블리에라는 폭탄을 자신의 정부로 삼았을 리는 없다.

[아카시아 백작 역시, 노에비안 트로비카와 한통속이었다가 버려질 사람일 뿐.]

백작의 금고에서 찾은 블리에의 일기장에 분명 그리 적혀 있었다.

블리에는 노에비안이 자신을 이용해 광산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백작님. 백작님께서는 블리에가 하는 말을 어찌 다 믿으셨어요? 그리 신뢰가 갈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블리에 님은 저와 서류상 부부가 되기 전부터 대공 전하와 교류가 있으셨고. 마나석 광산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대공께서 아내 상속법이란 걸 만든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셨는데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쏟아졌다.

나는 아카시아 백작을 따라 동굴을 걸으며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백작을 빤히 보았다.

‘죽었다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백작이 말을 길게 할수록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생각에 늘 마음 한구석이 바위를 지고 사는 것처럼 무거웠기 때문이다.

“블리에 님이 좀 거칠게 구시고, 사치가 심하긴 하셨어도……. 사용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가끔 아주 비상할 정도로 머리가 좋으셨습니다. 제가 바빠서 자주 뵙진 못했지만, 언젠가 이런 말씀도 하셨었지요.”

나는 백작의 입에서 나오는 블리에의 흔적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갑자기 이상해지더라도, 계획한 일을 완수하라고요.”

백작보다 앞서 걷던 롯시가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나는 곧장 롯시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이 이혼을 요구하는 순간부터는 아마 늘 죽음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좀 얌전해지면 안주인의 열쇠 꾸러미도 달라고 하셨고요.”

그때를 생각하는지 백작이 흐릿하게 웃었다.

“블리에가 싫어서 이혼하자는 말에 좋아했던 것 아니었나요?”

“예, 뭐……. 제가 중간에 끼여서 곤란했던 것은 사실이니 이혼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맞습니다만. 블리에 님이 대공 전하의 곁으로 가시기 전에 이 가엾은 늙은이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조언처럼 해주신 말씀에는 귀를 기울였지요. 저는 늘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것보다 영지에 머물며 광산을 지키던 선대의 유지를 잇고 싶었으니까요.”

“그것이 원래 그랬어. 입은 거칠고. 뭐든지 솔직하게 제 기분 따라 말하는 것 같아 보여도. 늘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계략을 짜는데 능했지. 사람 속이는 데는 도가 튼 애야. 그러니 스승인 나를 속이고 감쪽같이 약을 훔쳐 달아났지.”

잠자코 듣고 있던 롯시가 기가 찬 듯 말했지만, 나는 블리에가 그린 그림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늠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아가씨. 우리는 갈 길이 바빠. 무슨 변수가 또 있을지 모르니 일단 나머지는 블리에를 깨워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자고.”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이미 지나버린 행적을 좇아봤자 감탄밖에 더 하겠는가. 일단은 내 몸에 있을지도 모르는 마력을 인지하고 롯시의 도움을 받아 블리에를 깨우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조용히 우리 뒤를 따라오는 로아드네스를 힐끔 보았다.

어둑해진 시선이 내 얼굴에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아직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몸이 신경 쓰이는지 그는 내가 다가가려 할 때마다 움찔하며 몸을 물렸다.

“백작님. 광산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저희는 원석을 잠깐 빌리기 위해서 왔어요.”

결국 로아드네스와의 대화를 미루고, 나는 한숨과 함께 백작에게 부탁했다.

“예. 그것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블리에 님이 시키신 광산 조사는 어찌할까요?”

“블리에가 시켰다는 일이 이 마나석 광산을 조사하라는 건가요?”

“예. 사실 광산의 존재는 대공과 황태자 전하께서 알고 계셨고, 충성의 증명으로 바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척박하고 작은 영지에 있는 것이라곤 광산뿐이라, 얼마간만 빌려드리기로 했던 곳인데…….”

자그마한 입구에 비하면 개미굴처럼 뻗어져 나간 이 광산 안은 또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을 만큼 거대했다.

우리는 미로 같이 얽혀 있는 여러 갈림길을 지나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을 듯 세워진 가시 울타리가 우리를 반겼다.

이 동굴 입구를 가리던 가시덤불과 같은 것이었다.

로아드네스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 울타리를 툭툭 건들자 꿈틀대던 가시울타리가 길을 냈다.

그리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로아드네스가 입구에서 뚝 멈춰 서버렸다.

백작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떨면서 말했다.

“보시다시피…….”

말을 잇지 못하는 백작을 지나 로아드네스를 향해 걸어간 롯시와 나는 둘 다 말문이 막혀 억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시선이 로아드네스에게로 옮겨갔다.

숨 쉬는 것을 잊은 듯한 로아드네스의 눈은 백작이 들고 있던 횃불에 반사되어 번쩍이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게…… 뭐야?”

우리 뒤에서 또 다른 무리의 기척이 들려왔다.

몰래 우리를 쫓아온 듯한 에페로와 닐, 수도에 있어야 할 빈센토까지 있었다.

“이게 뭐냐고!!”

에페로가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멈춰서버린 채 굳은 로아드네스까지 지나친 에페로는 가시 울타리를 지나 안쪽으로 달려갔다.

이어 숨을 들이켜는 에페로의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꽂혀 들었다.

나는 떨리는 걸음으로 로아드네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 아까처럼 피할 생각조차 못 하는 그의 손은 차게 식은 채 움찔했다.

우리의 시선이 모인 안쪽 공간에는…….

레티나 황후를 포함한 일곱 구의 시신이 담긴 7개의 유리관이 있었다.

“레티나 황후 폐하와…… 제 기억이 맞다면 지금의 황후이신 그레이스 황후 폐하께서 일찍이 보내신 여섯 분의 황자 전하 분들이십니다.”

수많은 비명과 경악, 정적을 지나 백작이 겨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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