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비틀림
황후 레티나의 유언이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빈센토는 몸을 굳히고 침묵했다.
“내 생에 가장 찬란한 빛인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마땅히 황위를 잇기를. 그리하여 동생의 허물을 덮어주며 후세에 길이 남을 나, 레티나의 영광이 되기를.”
담담하게 울리는 정결한 목소리.
뒤늦게 도착한 황제는 황태자의 입에서 나오는 레티나의 유언에 오열했다.
이미 너무 울어 퉁퉁 불어버린 로아드네스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멈칫하던 바르데날도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로아드네스 코즈마 드 론타. 네 형님을 지키고.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이변 없이 황위에 오르게 하라. 내 유일한 빛인 네 형님을 황제로 만들어, 후세에 내 이름이 영광으로 남을 수 있게 해주렴.”
어린 로아드네스의 눈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내 유일한 빛인 네 형님’이라는 문장에 숨을 들이켠 로아드네스는 그 어떤 이견도 내지 않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체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로아드네스는 더 이상 흐느끼지 않겠다는 의지를 꾹 다문 입으로 대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작은 턱을 응시하던 바르데날도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방에 모인 누구도 레티나의 유언을 의심하지 않았다. 빈센토만 제외하고는.
‘저는 평생을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어머니.’
잠든 듯 죽어버린 레티나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바르데날도는 이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
레티나 황후의 100일 장례가 시작되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게 보이는 로아드네스에 비해, 바르데날도는 침착했다.
대신 밤마다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허락된 황실 비밀 서고로 향했다.
바르데날도는 최근 마나석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레티나 황후가 죽자마자 위태로워진 자신의 위치 때문일까.
어머니의 시체가 썩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나석 관에 대한 소문에 매달렸다.
그러다 시신을 보존하는 마나석 관에 대한 기록을 보고는 노에비안에게 은밀히 알아봐 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빈센토는 아직 어린 황태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자신이 들은 유언과 전혀 다른 유언을 말한 황태자였지만 안쓰러워 보였다.
어차피 바르데날도가 진실을 그대로 이야기한들, 황태자는 바르데날도였으며 윈스터 후작가는 그를 최우선으로 지지했을 테니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리고 100일 장례가 끝나갈 무렵.
평소처럼 비밀 서고를 찾은 바르데날도는, 아주 깊숙이 숨겨진 한 기록을 보고 말았다.
『초대 황제 키르프스는 배신자다.』
여러 왕국을 통합해 론타를 제국으로 만든 초대 황제, 키르프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키르프스의 업적에 가려진 추악한 뒷이야기. 론타를 제국으로 통합한 사람은 역사가 기록하는 것처럼 키르프스가 아니다. 본디 초대 황제는 그의 형님인 칼데이온이며 동생인 키르프스가 형님을 전장에서 베어버리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키르프스는 초대 황제이기 이전에 배신자였다.』
바르데날도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기록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론타 황실의 상징은 배신자 키르프스의 푸른 눈이 아니다. 칼데이온의 붉은 눈이 진정한 론타 황실의 상징이다.』
그는 그 책을 손에서 놓고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누군가 목을 틀어쥔 것 같이 숨이 막혔다.
역대 황실에서 이물질처럼 하나씩 끼워져 태어나던 붉은 눈의 아이들.
황비의 소생이거나 사생아일 경우 가차 없이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했던 그 아이들이 사실은 진짜 초대 황제의 정통성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도 안 돼.”
아우를 사랑했기에 더 미안했던 마음이 대번에 뭉그러졌다.
어머니의 유언은 고통이란 이름의 늪이 되어 서서히 그를 잠식했다.
‘붉은 눈’이 진짜 초대 황제의 정통성이다.
그 문장이 거대한 장검이 되어 머릿속을 후벼팠다.
반복해서 기록을 읽은 바르데날도는 동이 틀 때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책을 숨겨왔다.
책은 분명히 종이임에도 찢어지지도, 불에 태워지지도 않아 바르데날도의 속을 썩였다.
제 침실에 기록을 숨겨두고 불안해하던 바르데날도는 결국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하녀가 청소 중 그 기록을 발견하고 이상한 낌새를 보이자 죽여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죄책감으로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무뎌졌다.
분명, 아주 아끼는 하녀였다.
그런데 노에비안이 구해온 마나석 관에 그녀를 안치하고 내려다보니 마음이 되려 편안해졌다.
그의 정통성에 대해. 그의 자질에 대해 조금이라도 떠들어대는 꼴을 보느니 죽은 채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하녀가 훨씬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오히려 영원히 곁에 둘 수 있다는 의미가 되어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의 첫사랑이었던 하녀는 침실 아래에 있는 비밀의 방에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마나석 관이 하나씩 만들어지고. 그 안에 사람이 채워지고.
손에 쥔 열쇠의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그는 제게 아무런 실망도, 절망도 안기지 않는 자신의 편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부터였던가.
그는 누군가의 죽음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100일 장례가 끝나자마자 황제의 눈을 피해 레티나의 시신을 마나석 관에 다시 안치했을 때는 관을 끌어안고 꽤 결연한 다짐까지 했다.
‘제가 어머니의 유일한 빛이 될 겁니다. 그러니 꼭 지켜보세요. 어머니가 틀렸다는 걸. 그 기록이 틀렸다는 걸. 제가 아닌 그 누구도 제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보여드릴게요. 후세의 사람들은 어머니를 론타의 성자, 황제 바르데날도의 어머니로 기억할 거예요.’
그 후 바르데날도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부족한 정통성’을 채우기 위해 두 명의 황태자비 후보를 골랐다.
론타가 왕국이었던 시절 수도였던 피레타 영지의 공녀 아드리엔 피레타.
그리고 현 제국의 기틀이 된 서부의 왕이자, 유서 깊은 대귀족이었던 카스타냐 공작의 딸 도리스 카스타냐.
바르데날도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도리스에 비해 아드리엔이 황태자인 자신보다 로아드네스와 친하게 지낸다는 보고를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태자비 후보에 올랐음에도 제게 서신 한 통 하지 않는 공녀였다.
그즈음 바르데날도는 시간이 흐른 만큼 비뚤어져 있었다.
로아드네스가 군말 없이 자신에게 져주고, 희생하는 만큼 마음은 이상하게 더 비틀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로아드네스를 향한 미안한 마음이 아주 조금쯤은 남아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로아드네스가 처음으로 제게 욕망을 꺼내 보인 순간, 그리고 정통성을 가진 아드리엔 피레타라는 여자를 로아드네스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건 몰라도 아드리엔은 절대 양보 못 해요.”
그 ‘양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바르데날도의 마음은 더 비틀어질 수도 없을 만큼 비틀리고야 말았다.
마른걸레를 사정없이 쥐어짜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바르데날도는 처음으로 로아드네스를 향해 강한 살기를 느꼈다.
다음 지존이 될 제게 양보하라느니 안 된다느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어린 로아드네스가 건방져 보이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살심을 누르고 되려 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로아드네스의 머리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짓밟기 직전의 벌레를 제 그림자 속에 가둬두는 것처럼.
“이 형님이 도와주랴?”
그날로부터 바르데날도는 로아드네스에게 자신의 위치를 똑똑히 인식시켜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드리엔 피레타에게는 ‘황태자의 정부’라는 자리를 주기로 결정했다. 물론 살아서가 아닌 죽여서 말이다.
로아드네스를 좋아하는 아드리엔에게 황태자비 자리를 내줄 순 없었다. 정통성이 없다면 가지면 그만이다. 살려서든 죽여서든.
‘황태자는 나야.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은 나뿐이야. 어머니는 실수 하신 거야. 그 괴상한 기록은 가짜야. 괴담은 곧 '진짜' 전설이 될 테고.’
“붉은 눈의 불길한 황자, 로아드네스가 마물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붉은 눈에 관한 괴담을 전설처럼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노에비안이 사형 직전의 죄수들로 반란군을 만들어 로아드네스를 괴롭히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동시에 마나석을 서부에 심어 마물을 출몰시키는 것까지 망설임 없이 도왔다.
‘거짓도 계속 말하면, 결국엔 진실이 된다.’
제 입으로 전해진 레티나의 유언처럼.
붉은 눈의 괴담을 그럴듯한 전설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로아드네스가 황제에게 아드리엔을 청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가자마자 시작된 일이었다.
***
깊은 물속에 잠겼다 벗어난 사람들처럼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바르데날도의 과거에서 벗어났다.
“오늘 마력을 각성하긴 글렀군.”
무거운 분위기에 비해, 롯시가 가볍게 말했다.
롯시는 천천히 걸어 정확히 로아드네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충격으로 물들어 있는 적안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잘생긴 황자 전하. 당신 마력이 있지?”
어둑하게 일렁이는 시선이 롯시의 눈과 정확히 마주했다.
“마법을 금지한 론타에서 혼자 어찌 그런 경지에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해. 그런 게 타고나는 거지. 나조차도 깜빡 속았어. 그 정도나 되는 마력을 숨길 수도 있다니. 근데 마물 죽일 때 알겠던걸. 황자 전하한테만 마물들이 들러붙던데. 저가 죽는 줄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같이.”
짐짓 여유롭던 롯시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해졌다.
“당신은 진짜 정통성 있는 후계가 맞아. 붉은 눈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구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마력의 상징이지.”
롯시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비겁한 키르프스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그 마력. 진짜 초대 황제인 칼데이온이 마물을 불러들였지만, 결국 모조리 토벌해 나라를 세운 것처럼. 세상의 태양이 될 붉은 눈. 가장 밝은 빛으로 마물을 태워죽이고 세상을 구할 빛이지.”
로아드네스가 헛웃었다. 어둡게 번들거리는 눈이 비틀리며 휘어졌다.
세상을 구하는 빛? 그는 스스로조차 구원하지 못한 채 번뇌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지? 어떻게 이런 갑작스러운 기록을 확신하고 내게 그런 소리를 하지?”
“그 기록은 내가 쓴 거니까.”
“롯시 님……!”
아드리엔이 낮게 비명 지르며 입을 막았다.
“믿어도 좋아. 내 이름은 롯시 코즈마. 주술사가 아닌 고대 왕국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수천 년을 살아온 대마법사.”
여자의 것도 남자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동굴에 낮게 깔렸다. 마치 절대자의 음성처럼 상서로웠다.
“로아드네스 코즈마 드 론타. 네 이름은 분명 신탁에 의해 가장 강력한 마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코즈마라는 이름을 두 번째 이름으로 하사받았겠지. 나 그리고 칼데이온 코즈마 드 론타가 그랬던 것처럼.”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났다.
“당신의 마력은. 당신의 힘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힘이 아닌, 마물을 죽이고 사람을 살리는 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