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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정부로 환생한 심정을 서술하시오-128화 (128/171)

128화. 도와줘

롯시의 말에도 로아드네스의 눈은 계속해서 일렁이기만 했다.

여전히 꿇어앉아 있던 빈센토가 몸을 바로 세웠다.

“전하. 제가 굳이 바르데날도가 비틀린 이유를 알리고 싶었던 건. 단순히 전하께서 진정한 이 나라의 후계이니 바르데날도를 대신해 달라 청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끓어 넘치기 직전의 물처럼 조용히 들끓는 눈을 확인한 빈센토는 엄청난 진실을 마주하고도 고요하기만 한 그를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많이 늦었지만…… 전하께서 레티나 황후 폐하의 어둠이 아닌, 빛이었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후계가 어떻고. 진정한 후계자가 어떻고.

사실 그런 것보다, 빈센토는 로아드네스를 평생 괴롭혀왔던 그 말을 바로 잡아주고 싶었다.

최근 몇 달간 로아드네스의 눈이 점점 빛을 잃고 삶의 의미가 오로지 아카시아 백작 부인에게만 있다는 듯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그 과거의 상황들만 보고 바르데날도 님이 전하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그토록 마구잡이로 비틀렸지만, 그 기록을 보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전하를 사랑했습니다. 그 기록을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빈센토는 그동안 로아드네스의 헌신을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이었다.

자신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는 자괴감.

그런 형님일지라도 그 죽음에 일조했다는 죄책감.

어머니의 유언을 제 손으로 뭉그러뜨렸다는 부채감.

그런 어두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에 자신의 주군은 너무나도 대단하고 아까운 사람이었다.

로아드네스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위로였다. 빈센토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속으로 슬픔을 삭이실 필요도, 그리 홀로 모든 걸 짊어지고 계실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망설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원하는 걸 다 가지시면 됩니다.”

빈센토가 그 말을 끝으로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로아드네스는 생전 처음 보는 남처럼 빈센토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닐은 로아드네스의 눈을 보고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여러 빛깔로 일렁이던 눈이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균열이 일더니, 그 속에서 시커먼 어둠이 빛처럼 솟아나 퍼져나갔다.

인격이 바뀐 것처럼 돌연 더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눈을 보자 발끝까지 오한이 돌았다.

그동안 주군의 무서운 모습은 수도 없이 봐왔으나 저토록 완전히 돌아버린 눈은 처음이었다.

이 상황에서만큼은 감히, 성난 얼굴을 했던 에페로마저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횃불에 이지러졌다.

소름 끼칠 만큼 차갑고 어둑한 붉은 눈이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가슴을 선득하게 만드는 그늘을 드리웠다.

“네가 감히 나를 위로하려느냐.”

“……비겁하게 침묵했던 제 처신에 용서를 구할 따름입니다.”

빈센토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속삭였다.

온기가 하나도 없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모로 살짝 기울었다.

굳은 피가 엉긴 백금발이 가닥가닥 기울어진 이마로 쏟아질 때마다 보는 사람들은 숨이 턱턱 막혔다.

“용서를 원한다면…….”

강한 아래턱에서부터 귀밑 턱까지 번진 붉은 핏자국이 울렁거렸다.

“……이제 내게 네 쓰임을 증명해라.”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강렬한 횃불.

붉게 타오르는 로아드네스의 눈은 분명 그런 빛깔로 빈센토를 종용했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도록.”

마물을 모두 토벌하고, 론타를 제국으로 통합한 칼데이온의 후예가 서늘하게 명령했다.

***

벌떡 일어나 동굴 밖으로 튀어 나간 빈센토를 따라 얼이 빠진 닐과 겁에 질린 백작. 그리고 그들에게 물을 것이 산더미인 에페로까지 동굴을 벗어났다.

“마력은 내일 각성하도록 하지.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데.”

롯시마저 고개를 젓고는 느릿하게 동굴을 빠져나가자 가시 울타리 안쪽에는 로아드네스와 아드리엔만이 남았다.

진실을 듣고 빈센토의 위로까지 받은 로아드네스의 눈은 되레 더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것도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을 마주했던 모든 순간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백작에게 건네받은 횃불을 벽에 걸었다.

로아드네스는 잘 만들어 세워둔 조각상처럼 레티나 황후의 시신과 몇 걸음 떨어진 채 그것을 응시했다.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시선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다가가 손을 잡았다.

마물의 피가 묻었던 손이라 그런지 로아드네스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손을 빼려 했다.

나는 혼을 내는 어머니처럼 아랫입술을 말아 물곤 진득한 핏기가 가시지 않은 그 커다란 손을 꼭 잡아 내 쪽으로 이끌었다.

어둑한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모양 그대로 부서져 버린 가짜 보석 같은 눈이었다.

“……피 묻어, 아드리엔.”

“상관없어.”

나는 보란 듯이 그의 손을 품에 끌어와 꼭 끌어안았다.

일렁이는 눈이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했다. 늘 뜨겁던 손이 차게 식어 있는 게 마음 아팠다.

“……무섭지 않았어?”

“뭐가?”

“내가 마물을 죽일 때.”

고작 그런 걸 걱정했던 건가.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도, 로아드네스는 내게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자신이 무섭지 않냐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공포보단 슬픔과 연민의 감정이 더 컸다.

나는 그때 어린 날의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멋있게 슥슥 마물을 썰어버리는 영웅담의 주인공이 아닌, 마물을 죽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사투를 벌이던 어린 소년의 잔상 말이다.

로아드네스는 힘겹게 나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유리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해 불안한 얼굴이 둘만 남자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이 겁에 질리고 말았던 그의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도 내겐 그저 상처 입은 짐승 같아 보였다.

“로안, 들었잖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빈센토도 롯시도 그 누구도 아닌 나야말로 로아드네스에게 늘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너는 처음부터. 앞으로도 네 어머니의 어둠 따위가 아니야.”

그의 삶이 증명해주지 않았나. 그는 누군가의 어둠이 아니다.

“너는 네 어머니의 빛이자, 내 빛이야.”

나는 여전히 시신에만 머물러 있는 로아드네스의 시선을 당기듯 그의 손을 끌어왔다.

그리고 거세게 흔들리는 로아드네스의 눈을 오래도록 마주하다가, 그의 품에 파고들어 깊게 껴안았다.

오늘 내내 내 눈을 피하던 로아드네스를 이제야 안아줄 수 있게 되어 가슴이 벅찼다.

안긴 채로 우뚝 서 있는 로아드네스의 몸은 늘 그렇듯 단단하고 거대했다.

***

로아드네스는 빈센토도, 낡은 기록도, 그것을 쓴 록시의 확신도 아닌 아드리엔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일렁이는 횃불 같은 눈동자가 잠든 레티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어머니의 어둠이 아니었습니까?’

바위처럼 단단히 굳은 뺨 위로 뒤늦은 눈물이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형님이 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말도 거짓입니까?’

바르데날도의 추악한 과거를 보면서도, 그는 오로지 바르데날도의 진심을 찾아 헤맸다.

그도 알았다.

빈센토의 말처럼.

바르데날도가 자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아주 어릴 적.

자신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 숨어 있을 때, 늘 손을 내밀어주던 것은 바르데날도였다.

울다 지쳐 잠이 들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악몽이라도 꿀까 봐 지키고 있었다며 배시시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황실 서고를 들락거렸다던 그 시기에도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던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며 아프지 말라고 속삭이던 형님이었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거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기에. 어머니의 유일한 빛이라 생각했던 바르데날도가 죽던 순간, 그것을 막지 않았기에.

로아드네스는 레티나에게 면목이 없어서라도 바르데날도의 죽음에 대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울어도 돼, 로안.”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라도 하듯, 아드리엔이 그의 가슴에 사랑스러운 뺨을 기대고 속삭였다.

그가 늘, 누군가에게 듣고 싶어 마지않았던 말이었다.

“울어도 괜찮아.”

바르데날도를 용서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흐르는 눈물은, 어린 날의 바르데날도를 떠나보내는 눈물이다.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 중 둘을 떠나보내고 제대로 울지도 못했던 로아드네스는 아드리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바르데날도의 장례식에서조차 꽁꽁 감춰두었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자신을 파고드는 아드리엔을 품어 안으며 어머니의 진짜 유언을 뒤늦게 곱씹어보았다.

‘누군가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라. 스스로 영광되게 살아라.’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빈센토의 말도. 바르데날도의 환상도. 롯시의 이야기도. 아직은 전혀 현실 같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바르데날도의 잔상이 로아드네스의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머니, 비틀린 아들이 바르데날도 하나만은 아닌가 봅니다.’

롯시가 말하는 론타의 태양. 마물을 태워버릴 만큼 강렬한 세상의 빛?

‘그런 것 따윈 개나 주라지.’

그는 오직 품 안에 있는 여자가 제 어둠이 아니라 빛 속에서 살 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머니. 저는 아드리엔을 지킬 수 있는 자리라면…… 그게 황제든 신이든 되려 합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마지막을 지켰던 그날처럼 편안히 잠든 어머니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이런 빛도 어머니를 비출 수 있을까요?’

조금은 자조 섞인 질문이었다.

***

“우리도 나가자, 로안.”

아드리엔은 조심스럽게 로아드네스를 이끌어 동굴 밖으로 향했다.

밝은 태양 아래로 먼저 나선 아드리엔이 동굴 입구에 멈춰서 자신을 응시하는 로아드네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역광을 받아 빛나는 아드리엔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웠다.

“네가 황제가 되고 싶다면, 내가 도울게.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줄게.”

로아드네스는 그가 왜 황제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고 말하는 아드리엔의 목소리가 사랑스러워 심장이 뻐근했다.

“도리스 말고, 내가.”

당당히 그렇게 말했던 도리스가 부러웠던 아드리엔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로아드네스는 그 말에 젖은 얼굴로 픽 웃었다. 아드리엔이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어도 로아드네스의 미소는 심장이 조여들 만큼 아름다웠다.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는 도리스의 제안에 무감각하게 빤히 보고만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아드리엔이 로아드네스에게 손을 더 뻗어 내밀었다.

그에게 옮겨 묻은 옅은 핏자국을 응시하던 로아드네스가 서서히 그 손에 자신의 손을 뻗었다.

아드리엔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단번에 그 손을 꽉 잡아당겼다.

어둠에 잠겨 있던 그의 군홧발이 빛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래, 잘 부탁해.”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 아드리엔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이 위험하리만치 아름다운 황자님은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는 아드리엔을 품에 안고 오늘 내내 올라가지 않던 입꼬리를 더 끌어올렸다.

아직 피에 절어 있는 몸이었지만, 아드리엔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로아드네스의 가슴이 순식간에 벅차올랐다.

그는 지독히 어두운 동굴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드리엔의 귓전에 속삭였다.

“도와줘, 아드리엔. 내가 정말 밝은 빛이 될 수 있게.”

로아드네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누구보다 네 도움이 가장 절실해.”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도와줘, 아드리엔.”

그 말을 끝으로.

시커멓게 번들거리던 눈이 순식간에 아름다운 보석처럼 반짝이고, 제 빛깔을 찾은 입술이 아드리엔의 입술을 곧장 삼켜버렸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젊은 연인의 주위를 맴돌던 마물의 피 냄새가 단번에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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