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도리스의 선물
다음 날 아침, 아카시아 백작령의 저택.
한숨도 못 잔 얼굴을 한 사람들이 비척비척 1층 로비에 모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몇 없는 사용인들이 분주한 가운데, 떠날 준비를 마치고 서류 가방을 챙겨나온 빈센토가 사람들을 불러 앉혔다.
“뻔뻔하게 혼자 잘 잔 거 같네. 번드르르하게 차려입고 나온 꼴이라니.”
아직 사나운 에페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빈센토가 묵직해 보이는 가방에서 신문을 여러 개 꺼냈다.
“저는 이 길로 할머님께 가서, 2황자 전하의 의지와 진실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로아드네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계속해보라는 듯 턱을 들었다.
“그 전에 수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실 이 소식을 전달하러 온 게 주목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수도 소식을 잘 모르시는 듯하여.”
지친 사람들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빈센토가 늘어놓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얼굴은 다름 아닌 도리스와 카스타냐 공작이었다.
“카스타냐 공작이 쓰러졌습니다.”
“뭐?”
에페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건강해 보이던 공작이 쓰러진 건 확실히 의외의 소식이긴 했다.
“엘라콘으로 향하는 행렬이 수도를 떠나던 당일 벌어진 일이라 역시 모르실 줄 알았습니다.”
빈센토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카스타냐 공작이 갑자기 쓰러지고, 조용하던 황태자비가 갑자기 대신전의 사제로 귀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마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내용은…….”
빈센토가 로아드네스 쪽으로 신문들을 더 밀어주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대신전의 사제로 귀의할 뜻을 밝히시었다.】
【황태자비 전하의 신실함에 감복한 대신관 예하, 신탁을 받다.】
【신탁 : ‘붉은 눈이 나라를 멸한다’는 전설을 잠재울 수 있는 성녀가 등장할 것.】
【그 ‘성녀’가 황태자비 전하는 아니실까?】
“말도 안 돼. 그 여자가 성녀?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네! x발!”
에페로가 열이 올라 외쳤다.
“그리고 우리에게 온 제국 일보에는 그동안 왜 이런 소식은 쏙 빼놓고 왔지? 뭐야? 황태자비가 중간에 가로채기라도 한 거야? 어쩐지 신문보다 가십지가 더 많더라니!”
“조사해보지요. 그리고 이게 오늘 신문입니다.”
【형사취수제의 극적인 부활! 불길한 붉은 눈으로부터 론타를 구하려는 주신의 의지인가?】
“어제저녁. 레일론 백작과 서부 귀족들이 단합해 폐지되었던 낡은 법을 되살렸습니다.”
형사취수제!
형님이 죽으면 아우가 그 형수를 취한다.
아드리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법적으로 계승서열이 가장 높은 2황자 전하께서, 도리스 카스타냐를 아내로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
노우라 주세타는 도리스가 제 물건들을 하나둘씩 꺼내 나눠주는 모습을 보았다.
“엘라콘산 루비, 카타리난 공국산 다이아몬드…… 아이린에게는 특별히 이 브로치도 줄게요. 내가 황가에 시집을 간다고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패물이랍니다. 데뷔탕트 때 잘 쓰도록 해요.”
“이렇게나 귀한 것을요? 전하, 다시 생각해보세요. 대신전의 사제가 되시면 이런 것들은 더 이상 몸에 둘러보시지도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고요.”
“고민은 끝났어요. 남편이 론타의 성자라 불리다 죽었는데, 그 부인인 내가 황궁에서 호위호식하며 남은 생을 살 수는 없지요.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남은 생은 오로지 주신과, 아바델리아에 계신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살겠어요.”
아이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도리스를 끌어안았다. 도리스는 기꺼이 아이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안해요, 아이린. 내년에 있을 아이린의 데뷔탕트에서 내가 샤프롱을 맡아주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황태자비 궁을 나가기 전에 아이린의 샤프롱이 되어줄 지체 높은 귀부인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할게요.”
“전하! 어쩜 그리 남만 보살피려 하세요? 제 데뷔탕트 걱정은 마세요. 그리고 저만 믿으세요. 제가 아버지께 비 전하를 최대한의 예우로 모실 방법을 강구하라 강력히 말씀드릴 테니까요!”
한참 도리스와 다정한 말을 나누던 아이린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퇴궁하자 도리스 옆에는 노우라만이 남았다.
도리스는 글썽이던 눈물을 얼마간 훔쳐내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작은 보석함을 열어 노우라에게 내밀었다.
“나머지는 다 노라의 것이에요. 황태자 전하는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저리 갑자기 쓰러지시고…… 세상에 혼자 남은 것만 같았는데. 노라가 있어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지 몰라요.”
노우라는 여전히 자신을 ‘노라’라 부르는 도리스를 응시하다가 그녀가 내민 보석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알이 굵은 진주며, 바다보다 영롱한 사파이어. 블리에 아카시아가 유행시킨 장미 모양의 루비까지.
‘다 내가 전하께 드린 것들.’
진짜 값진 보물은 모조리 아이린 시스코메틴에게 내밀어 놓고, 노우라에게 내민 것은 죄다 노우라가 가져다 바친 본래 노우라의 것이었던 것들뿐이었다.
노우라는 잠깐 빈정이 상했지만,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내가 대신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라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요.”
노우라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떠오르자 도리스가 테이블 아래 선반에서 묵직한 검은색 나무함 하나를 꺼냈다.
그 함을 보는 순간, 노우라의 얼굴은 미소를 띤 채 경직되었다.
“내가 정말 아끼느라 한 번도 이 궁에서 피우지 못한 향…… 기억하죠?”
기억하다마다.
노우라는 테이블 아래로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쥐었다.
“나와 황태자 전하를 성심껏 보필해주고 엘라콘으로 먼 길을 떠난 블리에에게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노우라는 애써 눌러놓은 두려움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바로 저것과 똑같이 생긴 나무함을 카스타냐 공작에게 전달한 후. 다음날 바로 카스타냐 공작이 쓰러졌다.
노우라는 저 함에 담긴 향이 카스타냐 공작을 그리 만들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건 추측이지만.
저게 대공비 아드리엔의 죽음에 일조했으리라.
저 함을 황태자가 보내는 약에 슬쩍 끼워놓고는 대공저의 하녀장에게 신경 써서 향을 피워주라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병자에게 쓰는 것이니 각별히 유의해 아주 적은 양으로 희석해서 사용하라는 주의사항도.
늘 정원에 있는 풀 이름이나 알려주던 황태자가 몸을 보하는 것이라 일러줬던 약초로 만든 아주 귀한 향이라 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노우라는 소름이 돋아나는 팔을 몰래 쓸어올렸다.
귀하다는 것을 정작 제 궁에서는 한 번도 피우질 않고 대공저에 보내기만 했던 것을 떠올리자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게다가 공작과 블리에에게 전하라 시킨 향은 희석하라는 주의사항조차 없었다.
“이제 나는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사제가 될 사람이니, 이 향도 필요 없겠죠. 수고스럽겠지만 노라가 좀 전해줘요. 듣자 하니 아카시아 백작령에 2황자 전하와…… 잠깐 머문다던데.”
도리스는 2황자라는 단어와 함께 스치듯 미간을 찌푸리곤 다시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우라는 갑자기 연고도 없는 북쪽으로 직접 가서 이것을 전해주라는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 아카시아 백작령까지 제가 직접 가서 전해주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런 험한 여정을 당당히 요구하면서도 도리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우정의 의미로 주는 것이니, 꼭 혼자 있을 때 내 생각을 하며 피워 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해줘요.”
우정을 운운하는 사람의 얼굴치고는 퍽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연스럽게 노우라는 도리스의 심부름으로 다시 들렀던 카스타냐 수도 저택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하녀들의 비명 사이로 코를 찌르던 허브향.
노우라는 천천히 제 앞에 놓인 함을 끌어안았다. 여상히 차를 들이켜는 도리스의 옆모습은 평소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았다.
***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한 빈센토가 아카시아 령을 떠난 지 며칠이 흘렀다.
로아드네스는 로아드네스대로 바빴다.
첫날 마주했던 마물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마물이 규칙적으로 출몰해 에페로와 빅토르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던 것이다.
로아드네스는 형사취수제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겹다.”는 말만 한마디 했다.
그는 내게 전혀 불안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나대로 불안함에서 벗어나고자 롯시와 마력을 일깨우는 데 집중했다.
진심으로 나를 돕기 시작한 롯시 덕분일까.
나는 내 몸 안에 따뜻하게 흐르는 마력을 금방 인지하고 그것을 마나석에 옮기고 다시 가져오는 데까지 성공한 참이었다.
“저, 마님. 수도에서 마님을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손님?”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에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왔다.
1층 로비로 내려간 나는 이 험한 곳까지 나를 찾아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주세타 자작 부인?”
“안녕하세요, 아카시아 백작 부인. 오랜만이네요.”
살이 핼쑥하게 빠지고 푸석한 얼굴을 한 노우라였다.
최근까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아서일까. 노우라의 등장이 꽤 반가웠던 나는 빠르게 그녀를 대접하라 하녀들에게 이르곤 그녀를 맞았다.
그런데 대접을 받을수록, 노우라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카시아 백작이 우리를 위해 헐레벌떡 새로 구입한 고급 소파에 앉아서도 편히 있지를 못하고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2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시려면 시간이 좀 남았답니다. 그러니 편히 있어도 괜찮아요.”
나는 그녀가 로아드네스를 볼 때마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겁을 내던 것을 기억하고 도닥이듯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나요? 부인이 저를 이렇게나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면 편지라도 할 걸 그랬어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 농담에도 노우라는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뒤따라온 하녀에게서 웬 검은색 함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대신전에 귀의하게 되신다는 소식은 들으셨지요?”
별다른 안부의 말없이 불쑥 도리스의 근황부터 뱉어내는 입을 나는 조용히 응시했다.
“전하께서 이젠 필요가 없으시다며 온갖 귀중품들을 저희 시녀들에게 나눠주셨어요. 부인에게도 물론 그동안 비 전하를 보필한 공을 치하하시며 마지막 선물을 주셨지요.”
도리스가 그렇게 착하지 않다는 걸, 아이린은 몰라도 나와 노우라는 알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를 한참 보다가 싱긋 웃었다.
“그것참 감사한 일이군요. 매번 밖으로만 나돌던 제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억지로 다정함을 끌어모아 대답한 나는 싸늘하게 식어 있는 노우라의 손을 붙들고 꼭 잡아주었다. 떨림을 감추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전하도 참. 제가 수도에 돌아가면 어련히 문안을 드릴 텐데 굳이 이 험한 북쪽까지 부인을 홀로 보내시다니……. 온 김에 온천욕이라도 좀 하고 가요, 부인. 이곳은 엘라콘과 인접해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욕탕이 발달했답니다. 이 저택에도 거대한 욕탕이 두 개나 있어요. 하나는 손님용이니 내가 특별히 부인이 쉴 수 있게…….”
“……부인.”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데, 흔들리는 눈으로 내 입을 응시하던 노우라가 내 말을 툭 잘랐다.
“부인, 부인 나는…….”
“왜 그래요, 노우라 님?”
“못 하겠어요, 부인.”
그녀가 제 두 뺨을 감싸 쥐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함에 든 건 향이에요. 하지만 내가 가고 나면…… 비 전하께서 내게 딸려 보낸 저 하녀들이 부인이 향을 피우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면…… 제발 저걸 다 쏟아서 버려줘요!”
노우라가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고 괴롭게 소리쳤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비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그녀가 사실대로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